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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7/10/08) 게시물이에요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 인스티즈


정재학, 공전

 

 

 

둘레에 나이테를 그리며 돌고 있던 나는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늙은 성벽이 되었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 인스티즈


김재진, 은둔의 사랑

 

 

 

그 자리에 네가 있어 주기만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웃고 있는 네 모습을

멀리서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스치기 전 한 번쯤 내가 보낸 눈길에

미소짓기만 해도 너를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기다림은 멀고 나의 밤은 채워지지 않는다

단지 제 이름 불러 스스로를 애무하는

고독한 위로

세상 어딘가에 네가 존재하기만 해도 나는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 인스티즈


복효근, 인연

 

 

 

저 강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면

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텐데

바다로 흘러간다고도 하고 하늘로 간다고도 하지만

시방 듣는 이 물소리는 무엇인가

흘러간다면

저기 아직 먹이 잡는 새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가

은빛 배를 뒤채는 저 물고기들은

또 어디로 흘러간 물의 노래인가

공이라 부를 건가

색이라 부를 건가

물은 거기 서서 가지 않고 흐르는데

내 마음속으로도 흐르는데

저 나무와 새와 나와는 또 어디에 흘러

있는 것인가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 인스티즈


손택수, 이슬점

 

 

 

뿌연 너머로 별이 보인다

길을 가다 가끔씩 그 별을 바라본다

흐트러진 숨을 가지런히 하고

골똘하게 시선을 별에 비끄러맨 채

한참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별이 조금씩 살아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 별이 흐르는구나

별도 나도 어딘가로 글썽이며 흘러가고 있구나

보일 듯 말 듯

, 흐릿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멈춤, 그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

흘러가던 별도 나도 잠시

서로 눈을 맞춘다

덥고 비린 살갗에

한 점 이 뭉쳐진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 인스티즈


이성복, 바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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