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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7/10/26) 게시물이에요

한국전쟁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에
관한 연구*1)

김 용 현**

목 차
Ⅰ. 서론
Ⅱ. 한국전쟁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Ⅲ. 전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과 철군
Ⅳ. 철군에 대한 북한의 대응
Ⅴ. 결론

사적으로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1950년대를 주목하며, 그 중심에는 중국
인민지원군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주목했
다. 본 논문은 지원군의 한국전쟁 참전과
휴전 후 잔류한 지원군의 역할에 대해 구
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또 지원군 잔류의
정치군사적, 경제적 의미와 아울러 1958
년 지원군의 완전 철군에 따른 북한의 대
응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당
시 북․중 관계와 1950년대 북한 사회의
역동적인 모습들을 엿볼 수 있었다.
1950년 10월 19일부터 1958년 10월 28일
까지 8년 동안 지원군이 한반도 및 휴전선
이북에 주둔했다. 지원군은 한국전쟁 당시
최대 135여만 명이 참전했으며, 휴전 이후
에도 34개 사단 40여만 명이 잔류했다. 휴
전 이후 북한은 안보를 지원군에 의존하면
서 전후복구사업에 전력투구할 수 있었다.
전후복구사업의 원활한 진행과 1950년대
고도성장의 배경에는 지원군의 주둔이 매
우 중요한 몫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1958년
10월 지원군이 완전 철군함으로써 북한은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 주제어: 중국인민지원군, 한국전쟁, 전후
복구사업, 혈맹관계, 철군

* 본 연구는 동국대학교 논문게재장려금 지원으로 이루어졌음.
** 동국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북한학과 조교수, 동국대 정치학박사, 주요 저서로는 공저 로동신문을 통해
본 북한 변화 (서울: 선인, 2006) 외 다수.
150 북한연구학회보 제10권 제2호

Ⅰ. 서 론
북한의 핵실험 이후 중국이 유엔안보리 대북제재결의안 1718호 채택에 찬성함으로써 전
통적인 북․중 관계가 변하고 있다는 견해가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혈맹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북․중 관계가 실리관계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현상
적으로 미묘한 변화를 보이고 있지만, 본질적인 변화는 현재로서는 대단히 어렵다는 판단
이다.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내려온 양국의 역사적 관계와 동북아의 지리구조적 조건이 결
정적으로 양국 관계의 급격한 변화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우선 양국이 역사적으
로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1950년대를 주목하며, 그 중심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이하 지
원군)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본 논문은 한국전쟁 이후 완전 철군 때까지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과 철군에 따른 북한
의 대응을 역사적 접근을 통해 살펴보았다. 1950년 10월 19일부터 1958년 10월 28일까지
8년 동안 지원군이 한반도 및 휴전선 이북에 주둔했다. 지원군은 한국전쟁 당시 최대 135여
만 명이 참전했으며, 휴전 이후에도 이들은 불안정한 대내외 정세 속에서 34개 사단 40여
만 명이 잔류했다. 이 8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북․중 양국 간 혈맹관계는 확고히 다져졌으
며, 실제 북한에서 지원군의 역할도 매우 컸다. 지원군은 전후 북한 안보의 일익을 담당했
으며, 전후복구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지원군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북한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며, 휴전
이후 이들의 잔류로 북한은 안보를 지원군에 의존하면서 전후복구사업에 전력투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북한의 전후복구사업의 원활한 진행과 1950년대 고도성장의 배
경에는 지원군의 주둔이 매우 중요한 몫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1958년 10월 지원군이 완
전 철군함으로써 북한은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철군은 북한의 자신감 속에
서 진행된 것이었지만, 그 ‘자신감’은 곧 이은 중소 갈등의 심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원조 중단에 따른 경제사정의 악화 등 대내외적인 상황 변화 속에 ‘위기의식’으로
바뀌었다.2)
본 논문은 지원군의 한국전쟁 참전과 휴전 후 잔류한 지원군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1) 洪學智, 抗美援朝戰爭回憶 再版(北京: 解放軍文藝出版社, 1991), 洪學智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
이 본 한국전쟁 (서울: 고려원, 1992), p.354; 이종석, 북한 - 중국관계 1945~2000 (서울 : 중심,
2000), pp.191~205 참조.
2) 김용현. “북한의 군사국가화에 관한 연구: 1950-60년대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정치학과 박사논문,
2002), pp.82~84.
한국전쟁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에 관한 연구 151

살펴보았다. 또 지원군 잔류의 정치군사적, 경제적 의미와 아울러 1958년 지원군의 완전
철군에 따른 북한의 대응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당시 북․중 관계와 1950년대
북한 사회의 역동적인 모습들을 엿볼 수 있었다.

Ⅱ. 한국전쟁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한국전쟁은 사실상 개전과 동시에 국제전으로 전환했다. 미군의 즉각적인 개입과 이후
중국의 참전으로 한반도는 냉전체제의 대리전장이 되었다. 개전 초기 인민군의 우세는 석
달 만에 미군에 의해 곧 뒤바뀌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은 이러한
변화된 정세의 반영이었다.3) 지원군의 참전은 북한을 돕기 위한 ‘항미원조’(抗美援朝)뿐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가위국’(保家衛國)이 목적이었다.4) 하지만 실
제 보다 중요한 목적은 후자였다. 중국혁명 이후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이 피할 수 없는 것
으로 의식되던 상황에서 전장이 한반도가 됨으로써 중국에게는 유리한 것이었고, 참전은
적극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5)
전쟁 결정과정은 스탈린․모택동․김일성 3자 간의 사전 합의부터 복잡했다.6) 전쟁 발
발 직후 지원군의 출병을 둘러싼 중국 내외부의 논란도 상당히 복잡했다. 당시 서북군정위
원회 주석겸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팽덕회(彭德懷) 등 출병 찬성론자와 중앙군
사위원회 부주석 임표(林彪), 동북인민혁명정부 주석겸 동북군구 사령 고강(高岡) 등 반대
론자 간에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모택동의 강력한 설득으로 참전이 결정되었
다.7) 중국 외부의 논란은 소련 공군의 참전과 인민해방군 현대화와 관련한 것이었다. 스탈

3) 참전 전반을 정리한 중국의 최근 공식문헌은 지원군 참전 50주년을 기념한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
著, 抗美援朝戰爭史第一․二․三卷 (北京: 軍事科學出版社, 2000).
4) 와다 하루키는 참전 배경을 중국이 자신의 혁명과 한국전쟁을 하나의 연속체로 의식하고 있었던 점과
승리한 중국혁명에 대한 미국의 반격 가능성을 미연에 저지하기 위한 것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는 중국혁명의 귀결에 비중을 더 두고 있다. 와다 하루키 지음, 서동만 옮김, 한국전쟁 (서울 : 창작과
비평사, 1999), pp.36~52 참조.
5) 姚旭, “抗美援朝的英明決策,“ 黨史硏究 , 1980年第5期, 이홍영 옮김,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
한 현명한 정책”, 한양대학교 중소문제연구소, 중소연구 제8권 4호 (1984/5 겨울), pp.217~227; 이종
석, 북한-중국관계 1945~2000 , pp.159~161 참조.
6) 김일성은 1949년 3월 이후 수 차례의 방소, 방중을 통해 스탈린, 모택동 등과 전쟁 승인과 지원문제 등을
협의했다. 중국혁명의 성공과 끈질긴 김일성, 박헌영의 설득에 스탈린이 모택동의 동의를 얻는 것을 전
제로 동의하면서 전쟁은 결정되었다.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 결정과 발발 (서울: 나남출판,
1996), pp.83~326 참조.
152 북한연구학회보 제10권 제2호

린은 해방군의 현대화와 관련된 부문만 동의했으며, 소련 공군의 참전에는 부정적이었다.8)
급박한 현지 상황 때문에 논란은 곧 정리되었다. 지원군의 참전은 1950년 10월 19일 중
국인민해방군 제13병단 39, 40, 42, 38군 12개 사단이 압록강을 도강하면서 시작되었다.9)
10월 24일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지휘부가 구성되었다. 지원군 총사령부 사령원 겸 정치위
원에 팽덕회, 제1부사령 겸 부정치위원에 등화(鄧華), 제2부사령에 홍학지(洪學智), 제3부
사령에 한선초(韓先楚), 정치부 주임에 두평(杜平), 북한 측 부사령 겸 부정치위원에 내무
상 박일우가 임명되었다.10) 이후 휴전협정 체결 때까지 지원군은 제1차 전역부터 제5차
전역에 이르는 대규모의 전투를 치렀다.11)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1950년 12월 초 설치된 ‘중조 연합사령부’였다.12) 원활
한 작전을 목적으로 설치된 연합사령부는 모택동과 김일성의 합의 하에 사령관 겸 정치위
원 팽덕회, 부사령관에는 연안계 김웅, 부정치위원에 박일우가 핵심 구성원이었다. 지원군
과 인민군의 작전 범위 및 전선에 속하는 일체 활동이 비공개 연합사령부에 귀속되었다.
이로써 휴전 당시까지 최고사령관인 팽덕회가 일체의 군사지휘권을 행사했다. 이런 상황에
서 김일성이 인민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있다는 것은 완전히 명목상의 것이었다. 그는 정전
협정 체결 당시까지 군사지휘권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는 실제 연합사령부가 지원군사령부
였다는 것을 의미했다.13)
지원군의 참전은 북한과 중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괴멸 직전의 북한체제를 소생
시키고 전쟁의 물줄기를 되돌릴 수 있었다. 정전상태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원군의 참전은 또한 그때까지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던 북한에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왔다. 북한정치에서 박일우, 방호산 등 연안계 인사들을 통해,
정치군사적 동맹관계를 통해, 그리고 이론과 제도의 이식 등을 통해 중국의 영향력은 서서

7) 朱建榮, 毛澤東の朝鮮戰爭 (東京: 岩波書店, 1991), pp.191~228; 洪學智지음, 홍인표 옮김, 중
국이 본 한국전쟁 , pp.33~35; 팽덕회 자서 편찬조, 팽덕회 자서 (延吉: 연변인민출판사, 1981),
pp.344~346 참조.
8) 朱建榮, 毛澤東の朝鮮戰爭 , pp.255~272 참조.
9)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著, 抗美援朝戰爭史第二卷 (北京: 軍事科學出版社, 2000), pp.1~3 참조.
10) 洪學智지음․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 pp.33~35.
11) 팽덕회 자서 편찬조, 팽덕회 자서 , pp.346~353; “항미원조 운동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이 수행한 사업
에 관한 팽덕회 사령원의 보고,” 로동신문 , 1953년 9월 16일자;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著, 抗
美援朝戰爭史第二․三卷 ; 洪學智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 pp.57~373 참조.
12) 軍事科學院軍事歷史硏究部著, 抗美援朝戰爭史第二卷 , pp.166~169 참조.
13) 와다 하루끼 지음, 서동만 옮김, 한국전쟁 , pp.202~203.
한국전쟁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에 관한 연구 153

히 확대되었다.14)
하지만 작전지휘권 이양 이후 김일성은 모든 역량을 당에 쏟아 부으면서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무정, 허가이, 박헌영 등 잠재적인 정치적 라이벌들을 숙청했다.
또 박일우 등 연안계 인사들을 권력 핵심에서 배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지원군 참전만 없었
다면 전쟁 실패의 최종 책임을 져야 했던 김일성이 이들의 참전 이후 권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것이었다.
한국전쟁은 중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만주지역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위협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향후 있을 수도 있는 미국의 침공에 총력을 다해 대처할 태세를 갖추는 것이
중국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중국을 사회주의체제로 이끈 중요한 동력이 되었
다.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전국적인 대중운동의 차원에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고양시
키고 인민을 조직, 동원했다. 재정과 금융의 국가통제도 강화되었다. 1951년 가을부터는
‘삼반오반(三反五反)’운동15)이 벌어져 중국 사회주의체제 건설의 커다란 전환점이 마련되
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래 농업 이외의 부문에서 국공영화가 사실상 이루어졌으며, 전후
곧바로 농업집단화가 시작되었다.16) 한국전쟁이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을 몇 년 간 지체시
켰지만, 전쟁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의 인적․물적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Ⅲ. 전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과 철군
1. 전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

중국은 정전 이후 전후복구사업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지원군의 잔류를 통한 군사안보
적 지원을 동시에 진행시켰다. 여기서 보다 주목되는 것은 후자였다. 군사안보적 지원은
그 자체로서 의미뿐만 아니라 북한의 안보 비용을 감소시킨다는 점에서 결국 북한의 축적

14) 이종석, 북한 - 중국관계 1945~2000 , p.194.
15) 삼반(三反)은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국가기관 공작원의 삼해(三害), 즉 독직, 낭
비,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오반(五反)은 오독(五毒), 즉 뇌물수수행위, 탈세, 국가자재 절도, 부실공사, 국가경제 정보 유출 등에 대한 규탄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공산당이 지휘한 사실상의 계급투
쟁이었다. 1952년 9월 운동의 종료 직후 모택동은 처음으로 중국의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제기했다. 오
쿠무라 사토시(奧村哲) 지음, 박선영 옮김, 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전쟁과 사회주의의 변주곡 (서
울: 소나무, 2001), pp.141~143.
16) 오쿠무라 사토시(奧村哲) 지음, 박선영 옮김, 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 전쟁과 사회주의의 변주곡 ,
pp.143~148 참조.
154 북한연구학회보 제10권 제2호

재원, 나아가 경제적 지원의 효과로 환원되었다.
중국은 전후 지원군 34개 사단, 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북한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1954
년 9월부터 단계적인 철수과정을 밟아 1958년 10월 완전 철군시켰다. 지원군의 잔류는 불
안정한 군사정세에 대응하여 휴전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지원군
이 정전체제의 중요한 버팀목으로 기능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북한정치에 거의 개
입하지 않았다. 또한 지원군은 전후복구사업의 주요한 노동자원으로 기능했다. 이와 같이
지원군이 북한 지도부 및 주민과 인적․물적 유대를 긴밀하게 함으로써 북중관계는 더욱
진한 혈맹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중국은 정전 직후 전후복구사업에 물질적 지원을 벌였다. 정전 직후인 1953년 11월 김일
성은 중국을 방문하여 전후복구사업에 대한 원조를 요청했다. 방중 기간 동안 양국은 ‘조중
경제 및 문화합작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원조문제에 대해 합의했다.17) 이때 지원군의
잔류문제도 구체적으로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전쟁 기간 중 원조물자와 비용을
무상으로 하고, 1954년부터 57년까지 4년에 걸쳐 인민폐 8만 억 원의 대규모 무상원조가
이루어졌다.18) 이 자금은 주로 주민생활 향상을 위해 사용되었다. 또 절대적으로 부족한
곡물 지원도 이루어졌다. 1954년 한 해 동안 13만 톤의 양곡지원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상
당 기간 동안 비슷한 수준의 지원이 계속되었다.19)
[표 1] 1950년대 김일성의 중국 방문 현황
방문 기간 방문 내용 방문 결과
1953.11.10~11.27 휴전 직후 김일성의 중국 방문 “조중 경제 및 문화합작에 관한
협정 체결”
1954.9.28~10.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4주년 기념 방문 각국 공산당 지도자와 면담
1958.11.21~12. 10 중국 및 월맹(월남민주공화국) 방문 중국 및 월맹과의 공동성명 발표, 중국인민지원군 철군 완료
1959.9.26~10.3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주년 기념
방문
인민일보에 “조중 량국인민의
전투적우의” 발표

237, 288, 303.

17) 박태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외관계사 1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5), pp.193~195 참조.
18) “사설-피로써 맺어진 위대한 친선“, 로동신문 , 1958년 11월 22일자; 전석담, “조선 로동당의 령도
하에 전후 사회주의 건설에서 조선 인민이 달성한 성과와 그 의의,” 과학원 력사 연구소 근세 및 최근
세사 연구실 편, 력사 론문집(사회주의 건설 편) 4 (평양: 과학원 출판사, 1960), p.17.
19) “중국으로부터 다량의 량곡 계속 도착,” 로동신문 , 1955년 4월 11일자.
한국전쟁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에 관한 연구 155

하지만 중국의 가장 큰 지원은 지원군을 잔류시켜 북한의 군사 및 경제가 자생력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었다. 지원군이 전쟁의 여진이 남아 있는 휴전선을 방어함으로
써 북한은 가장 중요한 안보문제에서 한 발짝 비켜나 전후복구사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한 연구의 추론에 따르면, 북한의 국방비 지출이 지원군 철군이 완료되는 1958년부터 급증
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20) 이는 지원군의 군사적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를 반증하는 것이
었다. 인민군이 전후복구사업에 대거 동원될 수 있었던 것도 지원군의 대규모 잔류 덕분이
었다. 전후 3년 동안 연 인원 160여만 명의 군인이 투입될 정도로 인민군의 전후복구사업
에 대한 기여는 상당한 수준의 것이었다.21)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인민군은 전열을 재정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한편 지원군은 북한의 전후복구 건설 작업, 특히 국가 기간 건설사업 및 농업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지원사업을 벌였다. 지원군은 공공건물 8백여 채, 민가 개축 4만여 채, 교량
복구 및 신설 4천여 개 등 주요 시설 복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2) 28만 4천여 정보의
농업 협조와 1천여 Km에 달하는 관개, 하천 및 제방공사를 하는 등 농업분야에서도 지원
을 아끼지 않았다.23) 아울러 중국의 민간 기술자들도 복구사업에 투입되었다.24) 이 과정에
서 한 농업협동조합이 조합의 명칭을 지원군 참전기념일인 ‘10․25조합’으로 바꿀 정도로
지원군과 북한주민들과의 연대감이 높아졌다.25) 여기에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가 이루어지면서, 북한은 빠른 시간 내에 복구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2.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
1954년부터 단계적으로 지원군의 철군이 이루어졌다. 1954년 9월 1차 7개 사단이, 1955
20) 이영훈, “북한의 경제성장 및 축적체제에 관한 연구(1956~64년) : Kaleckian CGE 모델 분석” (고려
대학교 경제학과 박사논문, 2000), pp.152~153.
21) 리권무, 영광스러운 조선인민군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58), p.57; “우리의 건설을 돕는 지원군
용사들(전원에 꽃피는 친선, 건설장에서의 이야기),” 로동신문 , 1955년 10월 17일자.
22) 抗美援朝保家衛國硏究編輯部, 抗美援朝保家衛國硏究創刊號 (丹東: 抗美援朝保家衛國硏究編
輯部, 1993. 7), 이종석, 북한 - 중국관계 1945~2000 , p.202에서 재인용. 지원군은 모란봉극장, 대동
강 철교 및 인도교, 청천강 철교 등 북한의 주요 기간시설 복구에 투입되었다. “중국인민들의 거대한
원조,” 로동신문 , 1955년 10월 1일; “<귀국하는 중국 인민지원군 장병들을 위한 환송대회에서>환송
사(조국전선 대표 정일룡),” 로동신문 , 1955년 10월 9일자.
23) 서철, “영웅적 중국인민지원군과의 전투적 우의는 영원불멸할 것이다,” 로동신문 , 1958년 10월
21일자.
24) “복구 공사를 협조하는 중국 기술자들의 투쟁,” 로동신문 , 1954년 4월 1일자.
25) “10.25 농업 협동조합,” 로동신문 , 1957년 12월 6일자.
156 북한연구학회보 제10권 제2호

년 4월 2차 6개 사단과 10월 3차 6개 사단이 철수했다.26) 이어서 1958년 3~4월 제1단계
6개 사단, 7~8월 6개 사단 및 특별병종부대, 9~10월 사령부와 나머지 잔류병력이 모두
철수함으로써 8년에 걸친 지원군의 북한 주둔이 종결되었다.27) 1958년 10월 28일, 이 날은
전쟁을 통해 만들어진 양국 간의 관계가 지원과 수혜의 일방적 관계에서 일반적인 관계로
바뀌게 되는 날이었다.
당시 철군은 북한이 중국에 요청하고, 중국이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1958
년 2월 5일 북한은 “미국 군대와 또한 중국 인민지원군을 포함한 모든 외국 군대가 조선으
로부터 동시에 철거할 것과, 외국 군대가 철퇴한 후 일정한 기한 내 전조선 자유선거를 실
시함으로써 조선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할 것을 천명했다.28) 이에 대한 언급은 이미 1955
년 3월 최고인민회의의 “외국군대의 한반도 철수를 전제로 남북한 병력을 각각 10만 명
수준으로의 축소" 주장에서부터 비롯되었다.29)

[표 2] 정전 이후 중국인민지원군 철군 현황
년 도 구 분 규 모
1954 제1차(9월) 7개 사단
1955
제2차(3.31~4.20) 6개 사단(52,192명)
제3차(10.?~10.26) 6개 사단(63,257명)
1958
제1단계(3.15~4.25) 6개 사단(8만 명)
제2단계(7.11~8.14) 6개 사단, 특별병종부대(10만 명)
제3단계(9.25~10.26) 사령부, 3개 사단, 후방공급부대(7만 명)

28일자. 이종석, 북한 - 중국관계 1945~2000 (서울: 중심, 2000).
26) “남북조선의 병력은 축소되여야 한다,” 로동신문 , 1955년 4월 1일; 양용, “위대한 국제주의적 우의와
단결,” 로동신문 , 1955년 6월 24일; 리권무, “피로써 맺어진 조중인민의 불패의 유대,” 로동신문 ,
1955년 10월 22일자.
27) “중국 인민 지원군 6개사 조선으로부터 철거 완료,” 로동신문 , 1955년 4월 21일; “귀국하는 지원군
환송 대회 신의주 역두에서 성대히 진행,” 로동신문 , 1955년 10월 16일; “중국 인민 지원군 제1계단
철거 완료와 관련하여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부 공보 발표,” 로동신문 , 1958년 4월 26일; “중국 인민
지원군 철거에 관한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부 공보,” 로동신문 , 1958년 8월 15일; “중국 인민 지원군
철거에 관한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부의 공보,” 로동신문 , 1958년 10월 28일자.
28) “사설-평화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조선 인민의 일치한 의사,” 로동신문 , 1958년 2월 6일; “조
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성명,” 로동신문 , 1958년 2월 6일자.
29) “남북조선의 병력은 축소되여야 한다,” 로동신문 , 1955년 4월 1일자.
한국전쟁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에 관한 연구 157

하지만 이러한 대외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제 철군의 배경은 중국의 내부문제 때문이
었다.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건설은 실질적으로 한국전쟁 정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그 과
정에서 중국은 40만 이상의 병력을 북한의 지원 없이 주둔시키면서 발생하는 장기간의 막
대한 경제적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58년 5월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이
채택되고, 이로부터 ‘대약진’30) 정책과 ‘인민공사’31)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양국 간의 완전철군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57년 11월 말부터였다. 한반도 휴전체제가
안정화되고 있다고 판단한 김일성과 모택동은 195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10
월혁명 40주년 기념 각국 공산당지도자대회’에 함께 참석한 것을 계기로 지원군의 완전 철
수를 논의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조선의 정세가 이미 안정되었고, 중국인민지원군의 사명
이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고 의견을 같이하고, 1958년 완전 철군을 합의했다.32)
모스크바에서 모택동의 ‘세계 제2위의 영국을 15년 안에 따라잡겠다’33)는 유명한 연설
이후, 중국은 대약진으로 전국이 휩쓸려 들어갔다. 상당 기간 지연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시점에 양국 간 완전철군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중국의 고민은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의 집중문제였다. 지원군의 완전철군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
이었다. 이 밖에도 지원군의 철군 배경에는 미소 간 평화무드의 조성, 북일관계의 개선34)

30) 대약진은 한마디로 소비 억제, 저축 강화와 더불어 ‘인해전술’, 즉 극단적인 대중동원에 의한 초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압축성장 정책이었다. 특히 철강, 에너지, 식량 등의 대증산이
주요 목표였다. 하지만 과학성과 합리성이 무시된 무모한 상부의 일방적인 목표 제시와 하부의 거짓
목표 초과달성 보고가 반복되면서 지표상의 성장만을 가져와 결국 중국을 파탄 직전으로 몰고 갔다. 오쿠무라 사토시(奧村哲) 지음, 박선영 옮김, 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전쟁과 사회주의의 변주곡 ,
pp.169~171.
31) 인민공사는 ‘대약진’의 극단적인 인해전술을 뒷받침하고, 대중동원 조직과 개인의 사적생활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파리 코뮌을 모델로 농촌의 농업, 공업, 상업, 교육, 군사 등의 전 부문을 담당한
인민공사는 사회의 기본단위이자 하나의 완결된 공동체였다. 공동식당이 보여준 바처럼 사생활의 중요
한 부분마저도 공동으로 해결할 정도의 공동체였다. 이 과정에서 인민은 중국이 곧바로 공산주의 사회
로 이행할 것이라는 ‘유토피아이즘’을 갖게 되었다. 오쿠무라 사토시(奧村哲) 지음, 박선영 옮김, 새롭
게 쓴 중국 현대사: 전쟁과 사회주의의 변주곡 , pp.71~172.
32) 북중간의 철군 논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종석, 북한 - 중국관계 1945~2000 , pp.203~204.
33) 모택동은 “흐루시초프 동지는 우리들에게 15년 후 소련은 미국을 따라잡는다고 말하였다. 나도 15년
후에 중국도 영국을 따라잡아 추월할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모택동, “모스크바의 공산당․노동당
당대표 회의에서의 강화,” 오쿠무라 사토시(奧村哲) 지음, 박선영 옮김, 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전쟁
과 사회주의의 변주곡 , p.169.
34) 당시 북일관계는 정부 간 관계개선은 없었지만, 1955년 10월 일본 국회의원단의 수 차례에 걸친 방문
등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방문단과 최고인민회의가 발표한 공동 코뮤니케에는 양국 간
국교 정상화, 무역대표부 설치, 수산업 협력, 문화 교류 등을 위해 공동 노력한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북한이 일본과 관계개선에 적극성을 띠고 있었다. “조일 량국간의 관계의 정상화를 위하여,” 로동신
문 , 1955년 10월 21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방문 제2차 일본 국회 의원단 래조,” 로동신문 ,
1955년 10월 27일자.
158 북한연구학회보 제10권 제2호

및 한반도 정세의 상대적 안정 등도 한몫을 했다.

Ⅳ. 철군에 대한 북한의 대응
1958년 10월 28일 지원군이 완전 철군했다. 예고된 것이기는 했지만, 이는 당장 북한이
군사력의 상당 부분 공백을 메워야 할 짐을 지게 된 것을 의미했다. 이제 막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의 전환에 들어선 북한은 경제건설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군사건설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북한지도부는 이 상황을 상당한 위기로 규정했다. 군대를 강화하고
주민생활에 있어서 절약과 내핍을 강조했으며, 사회를 더 강한 군사화로 이끌었다.
북한은 지원군의 완전 철군 직후인 1959년 1월 14일 ‘로농적위대’를 창설함으로써 군사
부문의 공백을 메우려 했다. 로농적위대는 최초의 준군사조직이었던 인민자위대35)와 조국
보위후원회를 확대 개편한 조직이었다.36) 창건 당시 이 기구는 “항일무장투쟁의 영광스러
운 혁명전통을 계승한 혁명적무장조직이며 조선로동당의 령도를 받는 위력한 무장력이며
사회주의건설에 직접 참가하고 있는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대중의 자위
적무장대오“로서 규정되었다.37) 로농적위대는 1963년 교도대 창설 이전까지 청장년의 대
부분을 포용하고 있었으며, 제대군인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로농적위대가
신속하면서도 광범위하게 창설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북한이 가진 위기의식의 직접적인
반응이었다.
게다가 지원군이 철군과정에서 비공식적으로 다량의 무기를 북한에 남겨 놓은 점도 창
설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지원군은 모든 휴대 무기를 반출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모든 군사인원의 철거와 작전물자의 반출이 중립국의 감시 하에 진행되
어야 한다는 정전협정의 규정에 의거한 것이었다.38) 제2차 철군 당시 중립국 시찰요원은

35) 이전부터 있던 자위대 등의 조직을 한국전쟁 후퇴기 직후 확대 개편한 준군사조직이다. 당시 내무성
정치국 자료는 “애국적 인민들이 조국과 인민 그리고 자기의 향토를 원쑤들의 침해로부터 보위하기
위하여 내무기관의 지도밑에서 자원적 원칙하에 조직된 반군사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인민자위대는
‘향토 보위, 국가시설 및 생산기업소와 현물세 창고 보위’ 등을 하며, 농촌 및 직장별로 북한 전역에
조직되었다. “조국의 국토를 보위하는 인민자위대원의 영예로운 임무와 과업(내무성 정치국 자료,
1952. 8),” 중앙정보부 편, 북괴군사전략자료집 (서울: 중앙정보부, 1974), pp.529~545 참조.
36)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는 낫과 망치를 들고 온 강토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다지자(로동청년 사설,
69. 1.14),” 중앙정보부 편, 북괴군사전략자료집 (서울: 중앙정보부, 1974), p.629.
37) “군사적으로 튼튼히 준비된 불패의 혁명무력 로농적위대(로동청년, 69. 1. 14),” 중앙정보부 편, 북괴군
사전략자료집 (서울: 중앙정보부, 1974), p.622.
38) “중국 인민 지원군 6개사 조선으로부터 철거 완료,” 로동신문 , 1955년 4월 21일; “중국인민지원군
한국전쟁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에 관한 연구 159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 스위스 등 4개 나라의 연 인원 약 400명이 담당했다.39)
하지만 이들의 ‘시찰’은 제한적이고 매우 느슨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작전물자의 공식적
인 반출 내역과 실제는 달랐고, 상당 수량의 군수품이 은닉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전후 제대군인 대부분이 당과 국가의 주요 하부자원으로 편입되었다. 노동력 부
족과 유동성이 극심했던 농촌과 탄광지역에 대부분의 제대군인들이 ‘무리배치’되었다.40)
김일성은 “농촌의 로력 부족을 해결하며 그를 증가하기 위한 중요한 대책의 하나로서 농촌
의 로력을 고착시키며 수만 명의 제대 군인들을 농촌에 파견”41)했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전쟁 이전 공장과 기업소 소속이던 군인들은 원대 복귀했으며, 이들 분야로의 희망자들도
일부 배치가 이루어졌다.42) 아울러 제대군인들은 각 부문에서 사회의 군사적 동원 주체로
서 활동했다.43) 제대군인들이 사회로 복귀하면서 이들은 로농적위대 창설에 긍정적 요인
으로 작용했다. 이들은 농촌과 공장에서 곧바로 로농적위대의 핵심자원으로 전환되었던 것
이다. 또한 이들이 체제 군사화의 적극적인 담지자로 활동하게 됨으로써 북한사회의 군사
국가화는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지원군 완전철군 무렵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로의 전환을 마무리하고 1차 5
계획(1957~61) 기간에 들어가 있었다. 이때 북한 지도부는 아래로부터의 ‘반탐오․
반낭비투쟁’과 ‘자백운동’ 등으로 사회질서를 새롭게 하고 대중에게 강력한 압박을 가했
다.44) 또 천리마운동을 통해 경제건설의 ‘혁명적 고조’를 시도했다. 물론 지원군 철군 그
자체가 이러한 운동들을 발기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의 반전과 새로
운 질서로의 재편에 철군은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철군은 중국으로부터의 북한의 독립
성을 보다 강화시킨 주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6개 사단 조선으로부터 철거 완료,” 로동신문 , 1955년 10월 27일자.
39) “중국 인민 지원군 6개사 조선으로부터 철거 완료,” 로동신문 , 1955년 4월 21일자.
40) 삼신탄광에는 전쟁 이전 탄광일과 전혀 무관했던 160여 명의 제대군인들이 ‘무리배치’되었다. “탄갱에
나선 제대 군인들,” 로동신문 , 1956년 7월 21일자.
41)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진술한 중앙위원회 사업총결보고,” 국토통일원 편, 조선노동당대
회자료집 , 제1집 (서울: 국토통일원, 1980), p.307.
42) 로동신문 , 1956년 6월 21일자.
43) 김용현, “북한 사회의 군사적 동원에 관한 연구: 1950~1960년대를 중심으로,” 북한연구학회보 , 제5권
2호 (2001년 겨울호), pp.36~39.
44) 리효순, “자백운동을 강력히 추진시키자,” 로동신문 , 1955년 12월 11일자.
160 북한연구학회보 제10권 제2호

Ⅴ. 결 론
한국전쟁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과 이들의 철군에 따른 북한의 대응을 살펴보았다.
지원군의 참전으로 북한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위기 사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
다. 1950년 9월 압록강 인근까지 후퇴한 북한 지도부에게 중국의 대규모 참전은 국가 존망
의 위기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지원군의 참전은 또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
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그 결과 전쟁 전에는 소련의 일방적인 영향력 아래 놓여 있던 북한
의 정치지형에 연안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친중세력이 형성되었으며, 정치군사적 동맹
관계의 공고화를 통해 중국의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휴전 후 5년 여 동안 지원군의 잔류로 북한은 안보를 지원군에 의존하면서 전후복구사업
에 전력투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중국은 정전 이후 전후복구사업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지원군의 잔류를 통한 군사안보적 지원을 동시에 진행시켰다. 여기서 보다 주목되
는 것은 후자였다. 군사안보적 지원은 그 자체로서 의미뿐만 아니라 북한의 안보 비용을
감소시킨다는 점에서 결국 북한의 축적재원, 나아가 경제적 지원의 효과로 환원되었다. 어
쨌든 북한의 전후복구사업의 원활한 진행과 1950년대 고도성장의 배경에는 지원군의 주둔
이 매우 중요한 몫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1958년 10월 지원군이 완전 철군함으로써 북한은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철군은
예고된 것이었고, 북한에 줄 충격을 줄이기 위해 6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철군은 북한의 요청에 중국이 화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반도 내에서의 미
군과 지원군의 동치 철수라는 대외적인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제 철군의 주요 배경은 중국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휴전체제가 안정화하는 가운데, 40만 이상의 병력을 장기간 북
한에 주둔시킬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며,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건설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한편 겉으로 보기에 철군은 북한의 자신감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철군은 북한
에게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했다. 북한의 ‘자신감’은 곧 이은 중소 갈등의 심화, 소련을 비
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원조 중단에 따른 경제사정의 악화 등 대내외적인 상황 변화
속에 ‘위기의식’으로 바뀌었다. 당장 대체병력의 확보를 위해 대규모의 ‘로농적위대’가 창설
되었다. 복구와 생산 활동에 지출될 물적 자원도 군으로 빠져나갔다. 보다 크게 장기적으로
부담이 된 것은 이후 1960년대 준전시상태로 북한사회가 휩쓸려가면서 치른 부담들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에 관한 연구 161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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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하는 지원군 환송 대회 신의주 역두에서 성대히 진행.” 로동신문 . 1955년 10월
16일.
“남북조선의 병력은 축소되여야 한다.” 로동신문 . 1955년 4월 1일.
리권무. “피로써 맺어진 조중인민의 불패의 유대.” 로동신문 . 1955년 10월 22일.
리효순. “자백운동을 강력히 추진시키자.” 로동신문 . 1955년 12월 11일자
“복구 공사를 협조하는 중국 기술자들의 투쟁.” 로동신문 . 1954년 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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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 “영웅적 중국인민지원군과의 전투적 우의는 영원불멸할 것이다.” 로동신문 . 1958
한국전쟁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에 관한 연구 163
년 10월 21일.
“10.25 농업 협동조합.” 로동신문 . 1957년 12월 6일.
양용. “위대한 국제주의적 우의와 단결.” 로동신문 . 1955년 6월 24일.
“우리의 건설을 돕는 지원군 용사들(전원에 꽃피는 친선. 건설장에서의 이야기).” 로동신
문 . 1955년 10월 17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방문 제2차 일본 국회 의원단 래조.” 로동신문 . 1955년 10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성명.” 로동신문 . 1958년 2월 6일.
“조일 량국간의 관계의 정상화를 위하여.” 로동신문 . 1955년 10월 21일.
“중국으로부터 다량의 량곡 계속 도착.” 로동신문 . 1955년 4월 11일.
“중국인민들의 거대한 원조.” 로동신문 . 1955년 10월 1일.
“중국인민지원군 6개 사단 조선으로부터 철거 완료.” 로동신문 . 1955년 10월 27일.
“중국 인민 지원군 6개사 조선으로부터 철거 완료.” 로동신문 . 1955년 4월 21일.
“중국 인민 지원군 제1계단 철거 완료와 관련하여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부 공보 발표.”
로동신문 . 1958년 4월 26일.
“중국 인민 지원군 철거에 관한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부 공보.” 로동신문 . 1958년 8월
15일.
“중국 인민 지원군 철거에 관한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부의 공보.” 로동신문 . 1958년
10월 28일.
“탄갱에 나선 제대 군인들.” 로동신문 . 1956년 7월 21일.
“항미원조 운동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이 수행한 사업에 관한 팽덕회 사령원의 보고.” 로동
신문 . 1953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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