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록주(朴綠珠) 명창은 1905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 박중근은 집안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노름과 술로 세월을 보낸 한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12세 때, 고향에 판소리나 춤이나 줄타기 등의 갖가지 전통예술을 보여주는 순회 공연단체인 <협률사>가 들어왔습니다.
박록주의 부친이 그 공연 중 판소리 명창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돈도 제일 많이 버는 것을 보고서, 평소 목소리가 우렁차고 노래를 잘 부르는 박록주를 명창으로 길러 돈벌이시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 손에 억지로 이끌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박기홍 명창의 문하에 들어가서 소리 공부를 한 박록주는 얼마 뒤부터 경상도 곳곳에 불려다니며 판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생기는 족족 그의 부친이 놀음값과 술값으로 써버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다시 부친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가서 기생 수업을 받습니다. 당시 그녀는 소녀 명창으로 이름이 알려져서 하룻밤 초청료로 10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쌀 한 가마니가 50전 할 때의 일이니 대단한 수입이었죠.
그 뒤 17세 되던 1921년에 원산 명창대회에서 만난 남백우와 혼인을 하여 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독립지사였다는 남백우는 박록주의 재능을 높이 사서 "그대의 목소리는 만인의 것이 되어야 한다."며 그녀를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1922년, 박록주는 서울로 가서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에게 판소리를 배웠습니다. 그 이후 눈부신 활동을 하며 전성기를 보내던 1928년 봄, 그녀는 '운명의 스토커' 김유정을 만나게 됩니다.

김유정이 박록주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의 휘문고등학교인 휘문고보 4학년 때였습니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박록주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이후 김유정은 박록주의 공연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사랑을 호소하는 편지를 띄웠으나 번번이 무시되었습니다. 그러자 김유정의 연정은 점점 불타 오르기 시적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집에 찾아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호소하였습니다.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혈서로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패기와 열정에 넘치는 구애이기는 하였으나, 제가 보기에도 정상을 넘어 선 그의 구애 방식은 여성의 사랑을 얻기엔 너무도 일방적이고 서투른 것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게다가 김유정보다 3살이나 나이도 많고 기생 신분이었던 박록주는 끝끝내 그의 사랑을 거절합니다. 박록주 명창은 늘그막의 인터뷰에서 막무가내로 집에 찾아 와서 사랑을 고백하는 김유정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학생이 기생과 무슨 연애를 하자는 말이오?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 주시오.
(박록주 명창의 회상기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에서)

김유정은 1908년 지금의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증리인 실레마을에서 부친 김춘식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내노라 하는 부농이었지만 유정이 7살 되던 해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 2년 뒤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가장이 된 형은 잦은 난봉과 가정 폭력을 서슴지 않아 잡안의 재산은 탕진되고, 유정은 갈 곳도 없어 삼촌에게 얹혀 지내게 되는데,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던 청춘 시절에 박록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하루도 빼지 않고 보낸 그의 편지는 되돌려지거나 찢어지거나 불태워지고, 사랑을 얻지 못한 그는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집니다.
1929년 3월, 휘문고보를 졸업한 김유정은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지만 두 달 여만에 제명 당하고 맙니다. 그 무렵에도 그는 박록주에게 계속 연애편지를 보내고, 끈질긴 구애를 계속합니다.
김유정은 혈서와 협박과 애원으로 가득한 거의 스토커에 가까운 열렬한 구애를 3년 동안이나 계속합니다. 그러나 박록주는 끝끝내 김유정을 차갑게 대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당시의 조선극장 지배인 신모씨와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1929년 3월, 박록주는 여전히 자신을 갈취하며 괴롭히는 부친에 대한 원망과, 자신을 배신한 신씨와의 애정관계를 비관하여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김유정 못지 않게 박록주도 외로움과 격정에 시달리는 성격이었던 모양입니다.
박록주가 자살에서 깨어나니 김유정이 병실에서 머릿맡을 지키고 있었다는군요. 그렇다고 그녀의 마음이 돌아서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1930년 여름, 마침내 김유정은 박록주의 사랑을 얻는 것을 포기하고 실레마을로 돌아옵니다. 얼마 뒤 1931년에 박록주는 경제적으로 그녀를 후원하는 김종익과 재혼하였습니다.
사랑을 잃은 김유정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폐결핵 등의 병을 얻은 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며 소설쓰기에 매진합니다.
드디어 1935년 『따라지 목숨』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으로 당선되고 『노다지』가 중앙일보에 가작으로 당선된 뒤,『봄봄』,『금따는 콩밭』,『만무방』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1936년에도『동백꽃』,『봄과 따라지』,『슬픈 이야기』등을 연이어 발표하여 뛰어난 소설가로 유명해지고, 이상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과 교류도 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은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삼십여 편의 작품을 남겨 놓은 채, 아내도 없고 슬하의 자식도 없이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박록주는 해방 후 김소희, 박귀희 등의 여류 명창들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6. 25 때는 월북을 강요 당하기도 했으며, 전쟁통에 한쪽 눈을 실명하여 그 뒤로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녀는 음반 취입이나 무대 공연 등으로 많은 돈을 벌기도 했지만 돈이 생기면 모두 써버리는 성격 탓에,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늑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렬했던 그녀의 눈빛도 차츰 빛을 잃어갔습니다.
남편도 없고 슬하의 자식도 없이 외롭고 가난하게 살며 셋방을 전전하던 박록주는 1979년 면목동의 단칸방에서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유정이 죽은 뒤 남겨진 일기장에는 '녹주, 너를 사랑한다!'는 혈서가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김유정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록주 명창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이가 그렇게 훌륭한 소설가인줄 알았더라면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게 해 줄 것을 그랬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의 한 여인에 대한 집요한 짝사랑!
이승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뜬 두 분의 죽음은 너무도 닮았습니다. 아마도 저승에서 뒤늦은 사랑을 나누며 외로움을 달래고 계시지 않을까요?
http://dreamnet21.tistory.com/141 [김명곤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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