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미야의 븍아프리카 전역 버전의 영국 8군 피규어 키트-바로 롬멜과 맞붙었던 이집트 주둔
영국군의 복장과 무기들입니다.)
앞글에서 설명 드렸듯이 히틀러는 전혀 북아프리카 전쟁에 끼어들고싶지도 않았고 1939년부터 1940년 6월까지 폴란드와 프랑스라는 약골들을 상대하다가 영국이라는 의외의 강적에게 1940년말 "영국 본토 공중전"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1941년초에 히틀러와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과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바르바로사" 작전 수립을 거의 마쳐 가던 시기였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히틀러는 북아프리카에 관심도 없었고, 욕심도 없었고 어차피 이태리의 무솔리니의 몫이었던 고기 덩어리였습니다. 도리어 무솔리니가 제대로 이집트 주둔 영국군을 몰아내주기만 했다면 지중해는 이태리 해군이 장악할 것이고 독일이 정복한 프랑스 땅의 남쪽은 북아프리카를 집어 삼킨 이태리가 지켜주는 꽃놀이 패였던 것입니다.

(그냥 우리가 학교 지리 시간에 보던 유럽 지도입니다. 굳이 군사 지식이 없는 사람도
프랑스를 점령한 히틀러 입장에서 알제리-리비아-이집트로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이태리가 먹어 치우고 프랑스 남부 해안과 접한 지중해를 이태리 해군들이
틀어쥐고 연합군측 해군들(특히 영국 해군)이 얼씬 못하게 해주면 얼마나 마음이 든든
했겠습니까?)

(타란토 공습에 투입된 당시로서는 영국 최신예 항모 HMS 일러스트리오스,
갑판 위에 소드피시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영국 해군 항모에서 발진한 12대의 복엽기에 실린 어뢰들로 전함 3척이 침몰하는 (그나마 수면이 얕은 항구에서 침몰한 덕분에 2척은 건져내서 수리 후 재취역했는데 나머지 1척은 결국 폐기되었음.), 2척의 순양함은 대파되어 오랜 시간 취역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사건이 터지자 히틀러는 더 이상 무솔리니를 믿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타란토 항의 위치를 보면 아시겠지만 영국 해군이 이태리 반도 동쪽으로 깊수욱히
들어와서 이태리 해군들을 박살내놓고 유유히 돌아간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화는 당시 진주만 공격을 불과 몇개월 앞두고 있던 일본은 타란토 공습 작전을 매우 좋은 교과서로 생각하고 연구했다고 합니다.

(타란토 공습으로 얕은 근해에서 침몰해버린 이태리 전함........)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쌩뚱맞게 북아프리카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지휘관 롬멜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하였을까는 능히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나이 든 사람들은 좀 반복 학습을 해야 맥을 놓치지 않아서 50대 이후 장년층 회원들을 위해서 이렇게 "지난 회 줄거리" 스타일로 서비스 해드렸습니다.)
자! 그러면 롬멜의 활약을 얘기하기 전에 그가 북아프리카로 부임하기 전 몇개월 동안 이태리군들과 이집트의 영국군들에 사이에 벌어진 일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1940년 6월 독일의 프랑스 점령 직후에 무솔리니는 북아프리카 이태리 군 사령관 그리치아니 원수에게 독일이 이 기세로 영국 본토를 점령하면 자기가 눈독 들이고 있던 영국 식민지 이집트조차 히틀러에게 빼앗기게 되니 영국이 독일 땅이 되기 전에 속히 이집트를 정리하라면서 펄펄 뛰었고, 2차대전 역사 상 무능하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리치아니 원수는 마지못해 시작한 이집트 침공을 느릿 느릿 진행하다가 9월에 이집트 국경 130km 전방에서 멈춰선 후에 대치 상태에서 늑장을 부리게 되는데 여기서 결사항전을 각오했던 영국군은 이태리군이 무려 3개월 씩이나 현위치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 추가로 본국으로부터 보급 물자와 무기를 공급 받고, 힘을 고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여기서 프랑스 점령 직전에 독일군에게 공포를 느끼게 만든 강력한 장갑의 마틸다 전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국의 마틸다 전차는 절대 큰 체구도 아니었고, 속도는 시속 26km
로 독일 전차들이 보통 시속 40km 가까운 속도로 주행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느림보 곰탱이였습니다. 하지만 40mm 주포의 위력은 독일 1호~4호
전차들에게는 한방으로 장갑에 구멍을 낼 수 있는 위력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독일이 보유한 어떤 전차로도 뚫을 수 없는 전면 장갑은 88mm 대공포
가 아니면 절대 파괴가 불가능한 괴물이었습니다. 타미야는 40년 전 출시했던
이 전차를 최근에 다시 한번 새롭게 업그래이드해서 출시했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태리군은 왜 한번에 확 밀어버리지않고 멈춰서고 영국군에게 귀중한 시간을 3개월씩이나 주었을까요? 그건 바로 이태리의 고질적인 보급의 문제였습니다. 애초에 이태리령 리비아에 부임했던 그리치아니 원수가 곧바로 이집트를 공격하지 않고 늑장을 부리다가 무솔리니의 성화로 마지못해 공격을 시작한 이유도 그가 원했던 최신 무기의 보급 지원을 약속했던 무솔리니가 정작 부임 후에 아무리 기다려도 만족할만큼 보급 지원을 해주지 않다보니 마냥 세월만 보내게 되었던 것이고 7월이 되어서야 비로서 부족한 보급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집트까지 느릿 느릿 전진을 하다가 또다시 보급이 원활히 되지 않으니까 "야! 모두 보급 제대로 올 때까지 여기에 방어선 구축하고 영국애들 공격하면 방어만 하고 있자!"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무솔리니(좌)와 북아프리카 이태리군 총사령관 그리치아니 원수(우)- 이 두사람에 의해서
히틀러는 전혀 원치 않았던 북아프리카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
어쨌든 1940년 9월에 이태리 군이 멈춰선지 3개월 후인 12월 9일에 영국군의 본격적인 반격(작전명 : 컴퍼스)은 시작됩니다. 경계도 허술하고, 보급도 빈약한데다가, 사기도 떨어지고, 무기는 거의가 1차대전때 사용하던 골동품이었던 이태리군은 영국군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의 공격을 받게 되자 혼비백산하여 상당 수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습니다. (정말 만화와 같은 이야기지만 이태리군들의 황당한 무능함과 멍청함은 상식을 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 정통한 사실이었습니다.)

(이태리군에게도 M11/39 전차가 있었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주포가 포탑에
장착되어있지 않고 차체에 장착되어있고, 기관총만 회전 포탑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이런 황당한 설계는 M11/40으로 급히 개량형을 만들면서 회전 포탑으로 주포를 옮기게
되지만 무슨 생각으로 전차 디자인을 한 것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됩니다.
게다가 체격은 일본 경전차 "치하"전차보다도 작아서 "누구를 위한 전차"인지? 이걸
가지고 뭘 하려고 했었는지 이해가 안갑니다.어쨌든 영국 마틸다 전차 앞에 나타난
이 한심한 전차는 마틸다의 40mm 주포뿐만 아니라 기관총 사격으로도 무력화 되곤
했다고 합니다.)

(부랴 부랴 회전 포탑으로 주포를 옮긴 개량형 M11/40 전차)
1월에 영국군은 무려 13만명의 이태리군을 생포하며 반격을 시작한 지점에서 무려 800km나 전진하는 큰 전과를 올립니다. 특히 영국군은 숫적으로는 열세였지만 당시 세계 최강이라고 평가되던 괴링의 루프트바페를 패퇴시킨 영국 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메서슈미트와 유일하게 맞짱을 뜰 수 있는 전투기로 인정받던 허리케인 전투기의 활약으로 지상군 못지 않게 부실했던 이태리 공군의 수많은 전투기들이 공중에서 불쏘시개로 변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뛰어난 성능과 공습 능력을 가진 빅커스 웰링톤 폭격기의 공습도 이태리 군이 두손 두발 들고 항복하도록 만드는 엄청난 위협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쟁 초기에 활약한 영국의 빅커스 웰링톤 폭격기)
2월 5일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한지 두달도 안되어 리비아 국경 안쪽에 토브룩(아래 지도에 붉은 별표 위치)을 점령하고 본격적으로 리비아에서 이태리군을 완전히 쫓아내기 위한 강공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드디어 롬멜이 이태리군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리비아로 부임하게 됩니다.

결국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오합지졸들에게 북아프리카 전선을 맡겼다가는 영국과 연합군 해군이 지중해를 자기네 집 수영장쯤으로 생각하고 프랑스 해방을 위해 남부 프랑스 해안에 자기들 마음대로 상륙작전을 시도할지도 로르겠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정말 정말 북아프리카 전선에 휘말리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급기야.......히틀러가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총사령관 괴링과 프랑스 침공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지상전의 명장 롬멜을 불러서 내린 명령은 "북아프리카 가서 멍청한 이태리 놈들 대신 이집트에 영국군 놈들을 모두 내쫓아라!"가 아니었습니다.
히틀러의 명령은, "내가 유럽에서 영국과 소련을 상대하는 동안....
-괴링 너는 영국이나 연합군 놈들이 이집트에 영국군들에게 공급해주는 보급선을 차단하고 지중해에 얼씬 못하도록 하고,

(독일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1차대전 때
복엽기 공중전의 에이스로써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으나
2차대전 발발 후 히틀러의 밑에서 히믈러 친위대
사령관과 함께 가장 충성스러운 나치 광신자가
되었고, 종전 후에 나치 전범으로 기소되나
감옥에서 음독 자살로 불행한 삶을 마감합니다.)
-롬멜 너는 북아프리카 영국군들이 이집트에서 튀어나와 리비아에 이태리 놈들 괴롭히지 못하도록 현재 전선에서 딱 묶어놓아라
이상 두가지 명령이었습니다.
괴링은 총통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서 지중해 상공에서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연합군 화물선, 전함 그리고 항공기들이 이집트의 영국군에게 각종 무기와 보급 물자를 공급하는 것을 철저하게 봉쇄하기 시작했습니다.

(탁월한 성능과 스피드로 대전 초기에 스핏파이어와 함께 가장 강력한 전투기로 인정 받았던 메서슈미트 Bf-109)
롬멜도 처음에는 총통의 명령대로 따르려고 북아프리카로 부임하게 되는데 막상 현지에 도착해보니 영국군의 기동력있는 공격과 무능한 지휘관의 한심한 전술로 연전연패를 거듭해온 이태리 군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보급 물자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탓에 숫적으로 영국군보다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력은 턱없이 열세라는 판단에 이르게 됩니다.(숫자로만 보면 이태리 군은 25만명인 반면에 이집트 주둔 영국군은 4만명이 좀 안되는 수준이었습니다.)
즉 이런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현재 위치에서 영국군을 막는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제는 독일-이태리 연합군이 된 아군에게 더 불리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먼저 공격을 하여 영국군을 이집트에서 축출하기로 목표를 바꾸게 됩니다.

(남아프리카 전선에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여기서부터 롬멜 장군이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는 전설이 시작됩니다. 독일 본국에서 영국과의 공중전과 독소전쟁 발발 전야의 긴장 상태에서 북아프리카 전역까지 신경을 쓰고 풍족하게 도와줄 여유가 없다보니 롬멜이 갖고 있는 전차의 숫자나 병력들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침공 당시부터 이미 장난감 전차 수준으로 뒷켠에 물러나게 된 2호 전차와 영국의 당시 주력 전차인 마틸다에게 절대적으로 열세의 장갑과 화력을 갖고있던 3호 전차, 4호 전차로 구성된 병력으르 비록 숫자는 적지만 강력한 훈련과 최신 무기로 무장된 영국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아무리 롬멜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호 전차와 독일 아프리카 군단 보병부대가 함께 들어있는 타미야 빈티지 키트,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된 2호 전차라면
이미 보병 지원용이나 전찰용으로 밖에 사용할 수 없는 퇴물이었고, 그런 전차와 보병부대가 함께 작전에 투입되었다?
아마 영국군 방어선을 향해서 돌격하는 2호 전차와 보병부대의 전투씬이라.......
나름 역사에서 크게 틀이지 않은 디오라마 한 작품 나올만한 키트입니다........)
일단 롬멜은 영국의 스파이들이 지휘부에 독일-이태리 추축군은 많은 전차와 보급 물자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 위해서 택도 없는 숫자의 전차를 늘리기 위해서 지상에 굴러다니는 모든 차량들을 사용한 가짜 전차들을 만들게 했고, 많은 전차들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나도록 화려한 거리 퍼레이드로 자신들의 군사력을 뻥치기 시작합니다. 그런 배경에는 한참 이태리 군을 거칠게 밀어붙혔던 이집트 주둔 영국군 병력의 상당수가 2월 토브룩 함락 후에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명령으로 인접한 그리스 전선으로 투입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가뜩이나 숫적으로 열세인 영국군의 군사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롬멜은 사막에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가짜 전차들까지 동원하여 엄청난 숫자의 전차들이 공격해오는 것으로 영국군들을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공포에 질린 영국군들은 롬멜의 반격에 놀라서 줄행랑을 치게 되며 그가 지휘한 북아프리카 전역에 첫번째 작전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고,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멈춰 선 독일 3호 전차를 엄호물로 사용하여 공격중인 영국 보병 부대-1941년 토브룩 전투)
만약 그가 풍족한 숫자의 전차를 앞세우고 북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엄청난 기세로 영국군을 밀어붙혔다면 "사막의 명장"이라든가 "사막의 공포"와 같은 별명이 붙혀졌겠지만 영국군이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은 나중에 알고보니 턱없이 부족했던 보급 물자에도 불구하고 신출귀몰한 지휘 능력을 가지고 승리를 일궈낸 "사막의 여우"만큼 교활하고, 무서운 인물이라는 뜻으로 그의 별명을 이렇게 붙혔습니다.
사실 롬멜의 리더쉽은 많은 책들에서 전해지고 있는데 당시 이태리 장군들은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하얀 식탁보에 정찬으로 식사를 즐기곤 하였지만 롬멜은 총사령관의 위치에서도 직접 전차에 올라타서 전선을 시찰하고 작전 수행 중인 어린 병사들과 함께 통조림으로 끼니를 떼우면서 그들의 의견을 경청할 뿐 아니라 직접 작전에 적용할 정도로 현장 지휘관이었던 반면 조금이라도 공포에 질려서 또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올바른 임무 수행을 하지 못하는 장군이나 장교들이 있으면 가차없이 몰아세우는 무서운 장군이었습니다.


(현장 위주의 지휘관이었던 롬멜이 즐겨 탔던 Sdkfz 250 하프 트럭)
그런 탓에 독일군들 뿐만 아니라 무능한 지휘관을 두었던 이태리군들도 롬멜 장군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였고, 심지어 영국군을 포함하여 그와 전추를 벌이는 연합군들조차 롬멜 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가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하들과 심지어 적들의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두가지 였다. 즉 첫째, 항상 부족하고, 아슬아슬했던 본토로부터의 보급으로 무기와 탄약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보급 물양조차 항상 부족하고, 힘들게 버텨야 했습니다. 그나마 롬멜이 이정도 전쟁 수행을 가능케 했던 것은 히틀러가 본격적인 독소전쟁의 시작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북아프리카로 최대한의 지원을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과 1주만에 800km를 전진하는 강력하고, 신속한 롬멜의 공격으로 불과 몇 주전에 똑같은 거리를 10주만에 진격하고 기뻐했던 영국군들은 그동안의 점령지들을 반납하고 이집트 국경 너머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나마 토브룩 요새에 연합군들은 롬멜의 휘하부대에 포위되었지만 위에 지도에서 보듯이 지중해에 인접한 탓에 꾸준히 영국 본토의 보급을 받으며 버티게 됩니다.
한편 토브룩 요새에 아군을 적의 포위망에 남겨두고 이집트로 넘어온 영국군 본진은 시급히 보급 물자를 지원 받아서 다시 한번 반격하고 토브룩 요새에 고립된 전우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하게 됩니다. 1941년 5월 15일 브레비티 작전을 수립한 영국군은 다시 한번 리비아 국경으로 넘어와서 롬멜의 군대를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영국군은 마틸다 전차 1개 대대를 앞세워서 힘차게 진격해나가지만 롬멜은 불과 1년 전에 프랑스 침공 당시에 아라스 전투에서 그러했듯히 88mm 대공포를 사용하여 마틸다 전차들을 마음껏 부셔버리고 맙니다.

(타미야의 88mm 대공포의 북아프리카 버젼 키트, 왜 이 대공포는 하늘도 아니고 평지를 향해서
발사하게 되어있을까 궁금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적이 지상에 있기 때문이라는....
독일 지상전 역사에서 타이거1이나 4호 전차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대전차 무기였기에
두가지 종류의 키트로 발매되었나 보네요.)
여기서 한가지 이 "사막의 여우"가 얼마나 적의 무기 체계에 대해서 해박하였는가를 알려주는 실증이 있습니다. 영국은 마틸다 전차의 개발 목적을 "적 전차에게 아군 보병 부대가 공격 받을 때 적의 전차를 제압하기 위한 전차"로써 마틸다를 개발한 탓에 주요 목표는 자신들과 같은 적의 전차들이었고 마틸다가 주로 사용하는 포탄은 알맹이 속에 화약이 들어가지 않고 오진 두꺼운 장갑의 구멍을 뚫고 무력화 시키기 위한 철갑탄이었습니다. 즉 지상에 보병이나 포병부대들을 살상하기 위한 유탄 용도의 포탄은 마틸다 잔차를 위해서 아예 개발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탓에 88mm 대공포들이 사막에 나지막한 나무들 사이나 맨땅에 노출된 상황에서 상대방 탱크들에게 조준 사격을 하더라도 영국군 탱크들은 유탄이 아닌 그냥 철갑탄을 발사하였고, 이런 발사가 지상에서 살아 움직이고 뛰어다니는 독일-이태리군들에게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상대가 됩니다. (유탄 탑재 탱크들의 경우 대전차 공격보다 적 보병부대 살상이나 기관총 진지의 제압을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88mm 대공포가 마틸다의 전면 장갑을 여지없이 부숴버리는 와중에 3호 전차, 4호 전차의 50mm, 75mm 주포를 가지고 신속하게 미틸다의 측면으로 달려가서 사격하면 전면 장갑 대비 얇은 장갑을 가진 마틸다 전차가 의외로 쉽게 타격을 입고, 무력화하게 되자 더이상 마틸다는 독일-이태리 동맹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토브룩 전투에서 파괴된 영국 마틸다 전차)
롬멜의 전술은 그가 부임한 후에 두번째로 겪게 된 영국군의 공격도 이렇게 막아내고 다시 한번 적을 이집트 국경 너머로 내몰아 버리게 됩니다. 이때가 1941년 5월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연이은 승리후에 그에게 참담한 패배의 아픔을 안겨줄 숙명의 라이벌 몽고메리 장군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깡마른 고집불통의 영국에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1887~1976)은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서 거둔 최고의 승리의 주역이 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노르만디 상륙 작전 후에 최악의 실패작으로
평가받는 "마켓가든 작전" 입안의 주역으로 자신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글을 마쳐야 하겠네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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