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질때 쯤 생각나는 책 우동한그릇

어렸을때 이 책을 보면서 겨울마다 우동을 먹곤했음
하지만
사실 이 책의 일본판
그러니까 오리지널판은 소바 한그릇임
일단 줄거리 ㄲ
1972년부터 매년 북해정이라는 한 음식점에, 섣달 그믐달 밤에 한 어머니와 두 아들이 찾아와 소바 1그릇을 시켜 먹는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찾아와 소바 1그릇을 시켜 셋이서 나누어 먹는다. 매년마다 찾아오는 가족이 좀 안쓰러워서인지 사장(겸 주방장)의 부인이 "한 그릇은 서비스로 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사장은 "그런 거 없다"고 하면서도, 면을 삶을 때 1그릇 반 분량의 면[3]을 삶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소바 2그릇을 시키면서 세 모자의 사정이 드러났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일으킨 사고로 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던 것.[5] 세 모자는 고생고생하며 돈을 갚았고 소바 2그릇을 시킨 그날이 돈을 다 갚은 날이라는 것. 이때 동생 쪽은 나중에 일본 제일의 소바 가게 주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결국 자라서 은행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다음 해부터 세 모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십수 년이 지나 가게를 리모델링할 때도, 그때 세 모자가 앉았던 테이블만은 바꾸지 않고 놔두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북해정은 번창하게 되었다. 어느 날 섣달 그믐날, 이번에도 "예약석"은 자리를 비워두게 될 거라 생각한 주인 부부였지만, 그날 밤에는 양복을 입고 청년이 된 아들들과 어머니가 다시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인생 가운데서 최고의 사치스러운 음식인 소바 3그릇을 시켰다.
줄거리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나무위키에서 가져옴
한국에서는 "우동"을 먹은 것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 일본 사람들이 연말에 먹는 건 우동이 아니라 '토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8]라는 메밀국수다. 그런데 토시코시소바에 해당하는 단어가 우리나라에는 없고 그나마 잘 알려진 요리 중 따뜻한 국물과 함께 먹는 일본식 면요리가 우동이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다.[9] 면이면 다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본디 굵고 뚝뚝 끊어지는 우동 면이 아니라 가늘고 긴 메밀온면을 포기하지 않고 가늘고 길게 가는 삶의 내러티브로 삼은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10]
원래 소바였는데 우리나라 로컬라이징으로 우동으로 번역되어서 나옴.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무렵인 1988년엔 일본에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라며 대인기였음.
그러나 1989년, 이 글이 시대적 배경에 맞지않는 모순점이 발견됨
아마 우리나라에선 생략되었지만, 소바한그릇이 150엔이라고 나왔는데, 일본 유명 연예인이 '와랏테 이이토모'에 나와서 한 말에 따르면, 이 글의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는 150엔으로 인스턴트소바 3개는 살수 있을것이라고 함.
ブーム終焉のきっかけとなるのは5月19日放送のフジテレビ『笑っていいとも』で、司会のタモリが「その当時、150円あったらインスタントのそばが3個買えたはず」「涙のファシズム」と作品を批判したことである
또한 만담가인 카미오카 류타로는, "이미 우동집은 마감시간이라, 팔다 남은 우동이 있었을거고 사정을 생각하면 3인분은 내오지않을까하고 생각한다"
上岡龍太郎は「閉店間際なら売れ残った麺がある。店主は事情を察したなら、3人分出すべきだった」と指摘した
이런 의혹들로 조금씩 인기가 사그라들때
작가의 사생활 문제가 터짐
1. 훗카이도 대학 의학부 출신이라고 했는데 학력위조였다는게 드러남
2. 동네 주민대상으로 사기침 (소아과 의사행세를 하며 주민들에게 약값명목으로 돈 갈취)
3. 세들어 살던 집 주인에게 돈 10만엔 빌리고 자취 감추기
4. 다른사람의 아내와 간통
5. 작품이 영화화되자 이것을 걸고 여러가지 사기침
6. 종교를 가로채려하다가 (쇼호지라는 종교 절의 주지의 차녀와 사귄뒤 절의 소속을 바꾸려고함) 재판 패소
이런 문제들 때문에 작가는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우동한그릇붐은 완전히 사라짐
1999년 7월엔 '전 애인이 밝히는 '우동 한 그릇' 구리 료헤이의 거짓말 인생'이라는 르포까지 나옴..
이러한 문제들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이 책을 잘 안 읽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런 문제들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신기해서 가져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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