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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7/12/25) 게시물이에요










 나는 순수한가 | 인스티즈

나호열, 강물에 대한 예의

 

 

 

아무도 저 문장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이야기인지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비의를 굳이 알아서 무엇 하리

한 어둠이 다른 어둠에 손을 얹듯이

어느 쪽을 열어도 깊이 묻혀버리는

이 미끌거리는 영혼을 위하여 다만 신발을 벗을 뿐

추억을 버릴 때도

그리움을 씻어낼 때도 여기 서 있었으나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구나

팽팽하게 잡아당긴 물살이 잠시 풀릴 때

언뜻언뜻 비치는 눈물이 고요하다

강물에 돌을 던지지 말 것

그 속의 어느 영혼이 아파할지 모르므로

성급하게 건너가려고 발을 담그지 말 것

우리는 이미 흘러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완성되는 순간 허물어져 버리는

완벽한 죽음이 강물로 현현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순수한가 | 인스티즈


박노해, 나는 순수한가

 

 

 

찬 새벽

고요한 시간

나직이 내 마음 살피니

 

나의 분노는 순수한가

나의 슬픔은 깨끗한가

나의 열정은 은은한가

나의 기쁨은 떳떳한가

오 나의 강함은 참된 강함인가

 

우주의 고른 숨

소스라쳐 이슬 털며

나팔꽃 피어나는 소리

어둠의 껍질 깨고

동터오는 소리






 나는 순수한가 | 인스티즈


나혜경, 모과의 낙법

 

 

 

내 앞에서 모과가 떨어졌다

한 그루 모과나무에 딱 한 개

그것으로 진짜 모과나무였음을 알린

모과 한 알

천둥 번개에도 끄떡없더니 노랗게 익자

다 이루었다며

나무 한 그루의 짐을

저리도 단호하게 부린다

 

잠시 멈춰서 목례를 한다

 

어이쿠,

세상 짐을 다 내려놓기 전, 아버님은

고요하게 아랫목을 지키셨다

식구들이 물들기를 기다린 걸까

세찬 바람이 꼭지를 흔들어도 흔들림 없더니

한 잎 두 잎 식구들이 익어가자 유언도 없이

안심한 듯 가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흙처럼 아버님을 다 받아 안지도 못한

식구들의 곡소리만 숲처럼 울창했다

 

집 앞 은행나무는 이듬해 봄까지 목례를 했다 한다






 나는 순수한가 | 인스티즈


안도현, 마늘밭 가에서

 

 

 

비가 뚝 그치자

마늘밭에 햇볕이 내려옵니다

마늘순이 한 뼘씩 쑥쑥 자랍니다

나는 밭 가에 쪼그리고 앉아

땅 속 깊은 곳에서

마늘이 얼마나 통통하게 여물었는지 생각합니다

때가 오면

혀 끝을 알알하게 쏘고 말

삼겹살에도 쌈 싸서 먹고

장아찌도 될 마늘들이

세상을 꽉 껴안고 굵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나는 순수한가 | 인스티즈

박재희, 조약돌

 

 

 

돌은 큰물이 내려올 때마다

도랑바닥을 온뭄으로 흔든다

물살에 구르고 깎이며

돌은 속으로 자란다

 

점점 작아질수록

연륜이 쌓이는 돌

 

화창한 봄날

엄마와 시냇가에 놀러 나온

아가의 손에

잡혀 있는 조약돌

 

천 년 굴러온 세월이

움찔 멈춰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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