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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년 전 (2018/1/01) 게시물이에요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전술 변화

 

조선전기의 전술에서 주된 공격을 담당하는 군사는 기병으로 이들은 주로 기사騎射를 통해 적을 공격하였다 때문에 조선 초기의 주된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무예 강습)는 구군驅軍(몰이꾼, 사냥을 할 때 짐승을 몰아 쫓거나 짐을 실어 나를 때 마소馬牛를 모는 사람)에 의한 포위망을 형성한 다음 기사를 통해 공격을 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때 기병들은 이미 어느 정도 숙련된 무사였기 때문에 이들의 군사적 기능은 집단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보다는 개인의 전투기량에 크게 좌우되었다 개인별로 이루어지는 말타기와 활쏘기가 군사력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였으며 잘 단련된 무사는 번상기番上期에 이루어지는 강무 혹은 열무閱武(임금이 친히 사열함) 등의 집단훈련만으로도 충분히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전투의 규모가 커지고 화약무기의 도입으로 농민과 같은 비전문적인 계층을 대거 군인으로 수용하여 전투를 수행할 필요성이 생겼다 따라서 조직적인 편성에 의한 집단적인 움직임을 위주로 하는 훈련이 이루어지고 군사훈련의 전문화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집단훈련인 습진習陣은 그 성격이 변화함에 따라 군사들이 장기간 함께 집단훈련을 시행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이 각 병종별로 담당하는 역할이 명확히 구분됨에 따라 합동훈련이 이루어져야만 전투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인이 특출한 무예기량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집단전술로 운용하지 못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게 되고 지속적인 집단훈련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일본의 보병전술에 대응하기 위한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북방에서는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한 만주족이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대여진 기병 인식 및 전략의 변화

 

여진의 성장으로 인한 조선과의 충돌은 임진왜란이 진행되고 있었던 선조 28(1595)부터 일어났다 당시 선조는 여진족이 활을 잘 쏘며 싸움에 익숙하고 돌격하는 것이 장기인데, 우리 군사는 단약하고 겁이 많아 평야나 평지의 성에서의 전투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며 산성에서의 방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선조 32(1599)에 노토老土 부락 정벌 계획을 세우면서, “호인胡人의 병기는 궁시弓矢 뿐인데, 일찍이 그 궁시를 보건대 활은 조잡하고 화살은 강하지 못하였으며 그에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궁시가 10배나 나았다 그들은 궁시 이외에 다른 기예를 갖고 있는가? 아군이 만약 진을 치고 일제히 진격하며 총포로 공격하면 적의 궁시도 소용없을 것이고, 철기鐵騎가 아무리 날래도 아군에게 사로잡히거나 도망치게 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꺼릴 것이 있겠는가?”라고 당시 함경도북병사 이일에게 하문하였다 선조는 전과 달리 기병에 총포로 대응하면 적의 장기인 철기의 돌격과 궁시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이일 역시 선조의 의견에 동의하며 여진 기병이 우수하나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선조 38(1605)에 일어난 여진족과의 군사적 충돌은 이 생각을 다시 바꾸어 놓았다 그 해 5월 여진족 일파를 공격하던 조선군이 10배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도 여진 기병의 돌격으로 큰 피해를 입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조선에서는 평지에서 기병 돌격을 당할 때 조총의 재장전이 불가능하여 현재의 전술로는 여진과의 전투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후 선조 말기에 해결책을 검토하였으나 일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대 여진 기병 전술에 대한 논의는 광해군대로 이어졌다 광해군 초기의 대여진 방어 전략은 야전을 통한 적극적 방어 전략과 국경지대의 요해지에서 수성守城하는 수세적 전략이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광해군 즉위 초부터 4(1612)까지는 주로 야전을 통한 적극적인 방어 전략이 추진되었으며, 이를 위해 기병 양성과 대기병 전술 및 훈련 마련이라는 두 가지 대비책이 추진되었다 기병 양성은 대체로 전마 관리로 이어졌으며, 폐지되거나 둔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목장을 복구하게 하고 함경도 지역의 기병강화를 위해 군마를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병을 증가시키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 말기부터 훈련도감에 기병을 양성하도록 하였으나, 광해군 8(1616)50명의 기병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기병 양성과 함께 대기병 전술 및 훈련의 마련은 연병실기의 수용으로 전개되었다 광해군 초기에 수용된 연병실기기효신서를 저술한 척계광이 북방의 계주薊州 지방에서 기마민족과의 전투를 위해 창안한 전술을 정리한 병서이다 이미 선조 후반기에 그 존재가 조선에 알려져, 여진 기병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 검토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병학전문가로 활약한 한교는 연병실기의 법식으로 남북방 모두 방어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할 정도였다 결국 광해군 4(1612)에는 한교가 연병실기의 저술을 번역하고 정리하여 연병지남을 편찬하였다 연병지남의 전술은 차병車兵, 기병, 보병의 합동전술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술에서 기병은 전차-보병-기병의 순서로 배치되었다(, 중국의 전차와 조선의 화차는 대규모 인원이 다루는 이동식 전투마차와 소수의 인원이 조작하는 이동식 벙커 겸 화포발사대라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https://namu.wiki/w/화차(무기)#s-2.3 참조) 전차는 기병돌격을 저지하는 방어선인 동시에 화포 등을 실어 공격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보병의 경우 원앙진의 형태를 갖추어 전투를 수행하였으며, 장창수 대신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도곤수刀棍手(협도를 든 병사)를 배치한 점만 기효신서와 차이가 있었다 기병의 운용은 적이 멀리 있을 때는 말에서 내려 삼혈총三穴銃을 쏘거나 화살을 쏘며, 적군이 근접하면 말에 올라타고 편곤이나 장도 등 근접무기를 사용하여 원앙진 대형으로 돌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4년부터 수성 전략이 채택됨에 따라 전차의 제작이나 훈련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 대신 수성에 필요한 화기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조정에서는 군액을 축소하고 정예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군은 1619년에 명의 요청에 의해서 파병하여 여진의 군대와 심하深河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때 기병위주로 구성된 여진의 군대에 조총 등의 화기와 궁시로 무장한 명·조선 연합군은 무참히 패배하였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사용한 전술은 연병지남의 전술과 유사하였다 참호를 파고 전차를 전방에 배치하여 진지를 구축한 뒤에 화기를 사용하여 응전하는 방어적인 화기전술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여진군은 절반의 병력은 말에서 내리도록 하고 그 중 일부는 중갑을 착용하고 전차 등의 장애물 파괴를 담당하였고, 나머지는 가벼운 복장으로 활을 사용하여 전방의 중보병을 엄호하였다 그리고 기마부대는 적군을 포위하면서 상황에 맞게 대처하고, 적의 전차 등이 파괴되어 돌파구가 형성되면 돌격하여 적을 섬멸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당시 조총은 유효사거리가 100미터 이내였으므로 기병이 유효사거리 내에 들어와서 근접전이 벌어질 때까지 2발 이상 쏘기 어려웠다 따라서 기병 돌격을 막을 수 있는 장애물이 없으면 기병을 방어하기 어려웠고 조선군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심하 전투에 대한 평안감사의 장계를 보면 조선군 역시 포수 및 사수의 방호를 위한 장애물인 거마목拒馬木(목책)을 설치하고 그 안에서 응사하는 방식으로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조선군의 응사 이후 거세게 불어온 모래먼지와 서북풍으로 화기가 무력화된 틈을 탄 여진 기병의 돌격으로 패배하였으며, 조총 위주의 편제로는 기병을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17세기 초 조선의 군사적 과제는 새롭게 부상한 후금 기병의 돌격을 방어하기 위한 전술을 마련하는 것이 되었다 인조대 새로운 군영이 창설되고 기병 확보에 노력을 기울이는 변화는 이러한 고민이 반영된 것이었지만 광해군대를 포함한 이후의 군사훈련의 변화는 임진왜란기와 같은 근본적인 성격 변화가 아니었다 고도로 조직적인 전술과 전문화된 군사훈련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병종별 운용방식의 변화와 전술을 보완하는 수준이었다

 

- 허대영,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전술 변화와 군사훈련의 전문화,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pp.59~69.

 

결론:

조선전기의 주력이었던 기병은 개인의 기량, 기예에 의존하는 바가 컸으나 임진왜란 이후 병종의 통일과 집단화, 유기적 연계가 강조되었다

임진왜란 기간의 소극적인 태도와 달리 임란 승리 이후 여진 기병에 대한 자신감을 내보였으나 보병, 화기, 집단전술 중심의 조선군이 여진 기병의 기습과 치돌馳突(거센 충격)에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선조 후반~광해군 초기 기병양성을 시도하였으나 현실적 여건의 부족으로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 인경궁, 경덕궁 짓느라 돈을 다 써서 전국 8도의 목장이 혼파망이었기도 하고 실패하였다

동시기 야전을 통한 공세적 방어와 수성을 통한 수세적 전략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야전을 위해 척계광의 연병실기가 도입되었다

광해군 4년 이후 수성 전략이 도입되어(http://cafe.daum.net/shogun/1Db/7145 참조) 야전군의 비중이 약화된 상황에서 명의 요청으로 심하 전투에 조선군을 파병하였으나 전차의 부재와 기후 악화, 후금군의 체계적인 대응으로 궤멸 당하였으며 이후 17세기 조선이 해결해야 할 군사적 과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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