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없는 향수병처럼 내일을 위한 향기가 새어 나간다
그는 흔들의자처럼 흔들린다
불안한 저녁의 시간들을
감잣국 같은 음악으로 마음을 덥혀도 혼자서는 힘들다
흰 도화지를 바람 속에 날리며 그는 힘들어 한다
괴로움은 밖에서만 오는 줄 알지만
괴로움은 대부분 스스로 만드는 것
만족할 수 없는 마음에서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데서
갈 곳이 있고 부를 친구가 있고
어딘가에 묶여야 안정되는 사람이라
수시로 찾아드는 쓸쓸함에 그는 헐거운 가스레버처럼 위험하다
그의 몸은 거칠게 넘실댄다
빨간 해를 넘어 파도가 덮친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을 바꾸기 위해 파도를 감고
온 하루를 뛰어넘는다
피천득, 후회
산길이 호젓다고
바래다 준 달
세워 놓고
문 닫기 어렵다거늘
나비같이 비에 젖어
찾아온 그를
잘 가라 한 마디로 보내었느니
이정하, 이쯤에서 다시 만나게 하소서
그대에게 가는 길이 멀고 멀어
늘 내 발은 부르터 있기 일쑤였네
한시라도 내 눈과 귀가
그대 향해 열려 있지 않은 적 없었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사람
생각지 않으려 애쓰면 더욱 생각나는 사람
그 흔한 약속 하나없이 우린 헤어졌지만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슬픔으로 저무는 사람
내가 그대를 보내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나의 사랑이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찬이슬에 젖은 잎새가 더욱 붉듯
우리 사랑도 그처럼 오랜 고난 후에
마알갛게 우러나오는 고운 빛깔이려니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김춘경, 가끔은 나도
가끔은 나도
이름 모를 일몰의 바다 한켠에서
짧은 시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긴 말들을
줄줄이 매달린 해초의 이파리들처럼
흐르는 물에 풀어 놓고 싶다
가슴 저린 사랑이야기가 아니라도 좋다
살아가는 이야기들 중에
작은 그림하나 그리고 싶은 얘기라면
수평선이 보이는 너른 바다에 풀어 놓고
출렁일 때마다 행복한 소리로 웃고 싶다
가끔은 나도
가본 적 없는 조그만 항구에서
바윗돌에 널브러진 멍게, 해삼을 바라보며
통통배 소리에 가슴이 들뜬 시인처럼
일탈의 일기에 느낌표를 찍고 싶다
오래 기억될 이야기가 아니라도 좋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귀를 기울여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눈을 감아줄 수 있다면
파도소리 철썩이며 달려오는 부둣가에서
하루를 마감해도 행복할 것이다
가끔은, 가끔씩 나도
건조하고 지루한 삶과 동떨어진 곳에서
대책 없이 웃으며 마냥 행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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