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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형ll조회 275l
이 글은 6년 전 (2018/1/20) 게시물이에요


해가 지기엔 아직 이른 모양이다.
오후 7시를 훌쩍 지났지만 대낮인듯 훤한 동네 운동장에 사람들이 제법 거닐고 있었다.
운동장 트랙을 따라 설치된 스피커에선 어느 대륙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에 대한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너무도 무탈한 일상 속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선 어떤 불안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끄럼틀 타는 아이들, 장기 두는 노인들, 이제 보름달과 교대할 준비를 하며 저무는 태양,
많은 이들의 하루 시작과 하루 끝을 매어두는 저마다의 보금자리들.
이 평화로운 마을에 관여할 수 있는 부정적인 일이란 없을 터였다.
그나마 분주한 사람이라면 지금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달리기에 몰두하는 한 청년일까.

" 헉, 헉! " >

휴학을 내놓고 집과 도서관만 오가는 일상이 지겨워 시작한 저녁 운동.
이렇게 자신을 체력의 끝에 몰아세워가며 기진맥진할 때까지 내달릴 필요가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도
여태껏 달리는 이유도, 멈춰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한지 오래.
대훈은 그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남들은 이 마을의 장점으로 뽑는 '한결같은 나날'을 왠지 참을 수 없었다.
휴학을 내기 전까진 알 수 없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 밤까지 치열한 삶을 살다 겨우 침대에 눕고자 찾아오는 곳이 마을이었으니까.
하지만 여유를 찾아보고자 휴학을 한 지 오래 되지않아 알 수 없는 권태감이 대훈을 죄어왔다.
혈관에 기름기가 진득하게 낀 것같은 이물감, 몹시 답답한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도서관만 다닌 탓일까 싶어 시작한 달리기를 통해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은 욕구는 어느 정도 해소하고 있었지만
어떤 행위로도 해갈되지 않는 원인 불명의 갈증이 자신 속에서 말라붙어가고 있는 걸 느꼈다.

' 이 마을은 도대체가 변하질 않아. 모든 게 똑같아. '

늘 평화로운 사람들의 표정도, 저 낡은 구식 아파트도, 가로등 불빛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아무런 혼란없는 일상이 흔들림없이 지속된다는 건 대단한 축복이겠지만, 그 달콤한 침묵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려버린 대훈에겐 숨구멍을 틀어막아버린 양 괴로운 느낌만을 가져다주었다.
불변,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신경과민.
스스로도 정신병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그걸 앎으로써 대훈은 더욱 괴로워했다.
이 마을 너무 변하지 않아서 미칠 것 같다고, 어디에 얘기한들 공감해주겠냐는 것이 속내였다.
SNS? 카카오톡? 확성기를 들고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질러볼까?
이 마을은 왜 변하질 않습니까, 제가 미쳐버려야만 조금이라도 변해주시겠습니까?
뭔가 좀 새롭게 고쳐볼 생각 없으십니까, 저 아파트 뭉개버리죠, 저 애기 울려버리죠,
불 한 번 안 나나요? 불구경이라도 합시다, 홍수가 나면 좀 잠겨도 재밌을텐데요!
그런 망상을 해봤자 결국 현실과의 괴리만 커질 뿐.

" 꿀꺽, 꿀꺽 "

몇 바퀴를 더 연달아 달리고나서야 대훈은 터질 듯한 심장과 가빠오는 숨 덕에 망상을 떨칠 수 있었다.
음수대 앞에서 물 한 바가지를 들이키면서 대훈은 멀찍이 떨어진 아파트를 응시했다.

' ... '

바가지를 잘 씻어 엎어놓고, 땀을 훔치면서도 대훈의 시선은 오늘따라 아파트를 집요하게 쳐다봤다.
자메뷰, 즉.. 데자뷰와는 반대되는 개념의 '미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 저 아파트 뭔가 이상한데.. 창문이 왜 저렇게 없지? 원래부터 저렇게 창문이 적었나.
내가 무신경했던건가, 아예 창문이 없는 집도 있어보이는데.. '

보통 다닥다닥 붙어있어야 정상인 창문이 드문드문, 어쩌다 하나씩 달려있는 것이 이상했다.
더욱 인정할 수 없는 건 이 운동장을 몇 번이고 달려왔는데 그 점을 지금에서야 발견했다는게 더더욱.

' 이상하다. 내 정신병이 환각이나 건망증으로까지 이어진게 아니라면 분명 저건 유리창 갯수가 변한거야.
물 마시면서 몇 번이고 저 아파트를 쳐다봤는데 지금까지 모를 이유가 없어. '

어느덧 해는 자취를 감추고, 달빛 아래 가로등이 환히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땀이 말라붙고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도록 대훈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불변에 대한 노이로제가 심해진 이후 가장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고 버틴 시간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해준 건 아파트의 이해할 수 없는 유리창 덕분이었다.

' 보통은 좌우로 8개가 넘어야 할 구조다. 평소에 봐두지 않아서 변한 것인지, 변하지 않은 것인지
명확히 말할 수 없는게 아쉽긴한데.. 일단 아쉬운대로 유리창 갯수를 세어두자. 하나.. 둘.. '

유리창은 좌우를 합쳐도 채 4개가 있는 층이 드물었다.
딴 눈을 팔면 아파트가 땅으로 꺼지기라도 할 듯이 대훈은 아파트로부터 눈을 떼지 못 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변한 것'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대훈은 집으로 향하는 길에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나야. 너 주민운동장 음수대 알지? 우리 맨날 농구하던 운동장. 그래.
그 앞에 아파트 있잖냐. 흥아아파트. 오, 그래 그래! 알지? 어? 아~ 오늘 있잖아, 음수대에서
물 마시다가 그냥 흥아아파트 쳐다보는데 그 아파트 희한하더라? 유리창이 몇 개 없어,
너 알고 있었냐? 아니면 기억나냐? 잘 몰라? 하긴 나도 그래서 전화해봤어. 내가 몰랐나 싶어서.
그래. 그래. 잘 지내지 그럼. 그래 조만간 연락할게, 어 그래. 끊을게~ " >

한결같다고만 여긴 마을, 과연 흥아아파트가 변한 것인지, 변하지 않은 것인지는 다시 모호해졌지만
무언가 몰두할 대상이 생긴 것만으로도 대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네 아파트 유리창 갯수에 이렇게 집착하는 자신이 미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금 미친들 어떠냐고.

이튿날 대훈은 일어나자마자 도서관 가는 척 가방을 챙겨나와 일정과는 전혀 반대로 운동장을 먼저 찾았다.
아침운동으로 일과를 바꾼 것도 아니고, 전혀 자신과 연관없는 흥아아파트 창문 갯수를 세러 아침부터 운동장에
찾아온 자신에 대해 대훈은 다시금 입장을 고쳤다. 그냥 미친 게 맞다고 인정하자며.

' 하나.. 둘.. 셋.. '

이게 뭐라고 하나 둘 세어갈 때마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지 스스로도 기가 찼다.

" 허.. "

하지만 막상 셈이 끝나자 말을 잇지 못하고 대훈은 그저 숨을 꺽꺽 삼켰다.

' 달라! 확실히 변했어, 어제보다 윗쪽으론 한 개, 밑으론 두 개 없어,
창문 배치가 달라보였던 건 착시나 망각 때문이 아니라 정말 미묘하게 바뀐 게 맞았어. '

대훈은 가방에서 허겁지겁 공책과 볼펜을 꺼내 흥아아파트의 구조를 따라그리고
그 밖에 파악할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적기 시작했다.

흥아아파트
15층
창문
OXXOXXXO
XXOXOOXX
OXXOXOXX
XXOOXOOX
...

' 철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어젯밤에 달려있었던 창문을 새벽에 떼어낼리도 없고,
무엇보다 있을만한 위치에도 없는 유리창을 더 만들지는 못할 망정 줄인다는 것도 이상하고.
이런 저런 사유 채울 필요없이 그냥 유리창을 뗀 것만 봐도 말끔한 콘크리트로 하루만에 저렇게
보수가 될 수 있단말야? 세워진 건물에 유리창 넣고 빼는게 그렇게 쉬운 거라고? '

대훈은 공책과 아파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문득 음수대 너머 벤치에 앉은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으쓱, 대훈이 고개를 까딱대며 인사하자 노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 일단 없던 유리창이 생긴 건 아니고. 있는게 줄었다.. 사라지는 것, 잘 알겠어. 왜일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거지?
아무 변화 없다고만 생각했던 우리 마을이 이렇게 미스테리한 곳일 줄이야, 아.. 이제 저녁 운동은 줄여도 되겠어. '

오늘은 이정도로 된거라고 여기며 대훈이 늦게나마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직 노인은 벤치에 앉아있었다.

다시금 시침과 분침이 돌고 돌아 저녁이 되자 운동복 차림의 대훈이 운동장을 찾아왔다.
여전히 노인은 벤치에 앉아있었다.

" 안녕하세요. "

아까는 인사가 무성의했다고 여긴 대훈이 허리를 제대로 숙여 인사하자,
노인은 으레와 마찬가지로 끄덕였다.
마음이 홀가분해진 대훈은 다시 돌아서서 물 한 바가지를 마신 후 흥아아파트를 향해 돌아섰다.
하나, 둘, 셋, 넷.. 다시금 창문 세기가 시작되었다.

' 이번엔 아까와 차이가 없는데. 내일은 창문이 사라져있으려나? '

몇몇 집에 켜진 불이 사람 사는 건물이란 걸 말해주고 있었다.
흥아아파트 사는 친구라도 알면 물어라도 볼텐데, 불쑥 들어가서 이것 저것 정보를 캐고 다니자니
아무리 평화로운 마을이라지만 괜한 오해사기 쉽다고 생각해 대훈은 그럴 용기까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한 집에서 불이 꺼졌다.

' 뭐야. '

놀래서 커진 눈을 깜빡이며 대훈이 한발짝 아파트 앞으로 다가섰다.

' 하나, 둘, 셋, 넷.. '

이럴수가, 불이 꺼진 게 아니라 켜져있던 창문 중 하나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 사실을 안 대훈은 지금껏 창문이 사라진다는 가정을 미리 하고 움직여왔으면서도
눈으로 현장을 목격하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모순을 느끼곤 어안이 벙벙해졌다.

' 그럴리가, 내가 숫자를 잘못 세거나.. 착시였겠지. '

착시야, 착시가 아니야, 자신의 마음 속에서 불꽃 튀는 언쟁이 벌어졌으나
어느 한 쪽도 틀린 말이 없었기에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흥아아파트의 창문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경찰에 말해야 할지, 119에 말해야 할지,
어쩌면 먼저 도착하는 건 자신을 태우러 온 정신병원행 앰뷸런스일지도 모르겠다고 대훈은 생각했다.

" ... "

' 신경과민이야. 이정도면 진짜 병이야. 차라리 내가 병원에 갈까.
감각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뇌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뻔하잖아. '

대훈은 약속을 어긴 아이처럼 불안해하며 노인이 앉은 벤치 옆자리에 앉아 손톱을 잘근잘근 뜯었다.
오래도록 두 사람 사이엔 침묵만이 이어졌다.

" ..혹시 자네 흥아아파트 쳐다보고 있는거면 말이야.. "

그 말에 대훈이 흠칫 놀라며 노인 쪽을 쳐다봤지만,
분명 옆자리에서 소리가 들렸음에도 사방 어디에도 노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 할아버지? "

혼란에 기댈 곳을 잃은 대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 창문은 착각이라고 치자, 아침에도 저녁에도 마주치고 인사까지 받아준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사라진 건 뭐야?
방금 나에게 정확한 문장으로 말까지 걸어왔는데 설마 그 찰나에? '

창문이 사라진 게 착각이 아니라는 쪽이 마음 속에서 좀 더 우세해졌다.
그쯤에 이르자 대훈은 더 이상 그 벤치에 앉아있기조차 두려워져서 그만 집으로 향해버렸다.
그 날 밤 대훈은 잠에 겨우 들 때까지 비몽사몽하는 와중 속에서도 불 켜진 창문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점멸의 환상에 시달려야 했다.



" 정말이야, 유리창이 사라졌다니까, 미아, 만우절도 아닌데 거짓말을 왜 해,
그래 임마, 뭐? 내기? 해! 하자고! 얼마 걸까? 만원? 걸어, 그래 주민운동장으로 나와. 전화 끊는다. "



" 야! 동운아! "

" 장대훈~ 구라쟁이 씨 안녕하세요? "

" 내 만원 잘 가져왔냐? 구겨진 거 안 받어! "

" 뭐래. 흥아아파트랬지? 음수대 쪽으로 가자. "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제대로 반겨주기도 전에 두 사람은 내기 승부부터 내고자 음수대 앞으로 향했다.

일단 사실만 확인시키고 나면 만원이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여기며 대훈이 동운과 함께 음수대 앞에 도착했지만
그와 동시에 날아온 건 동운의 헤드락이었다.

" 야이 사기꾼 놈아, 유리창이 뭐? 아주 호그와트세요? 해리포터 읽어라, 응? "

" 야, 뭐야, 왜! "

" 봐라! 유리창! "

대훈이 얼얼한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드니 유리창이 다닥다닥 아주 가지런하게 달려있는 아파트가 서있었다.
언제 유리창이 사라졌냐는듯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 만원 내놔! "

" 야, 잠깐.. 야이 자비없는 놈아! "

" 저번에도 전화로 유리창 얘기하더니 밑밥 까느라 수고했다? 야 억울하면 뺏어가봐! 농구장에 있을게! "

동운은 잽싸게 대훈의 만원을 채가더니 농구장 쪽으로 달려가버렸다.
간만에 만난 친구를 따라가야 맞겠지만 대훈은 차마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어

동운의 떠난 자리와 아파트만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언제 유리창이 없었냐는듯 빼곡히 붙어있는 창문들이 야속했다.

" 자네 흥아아파트 쳐다보는 거지? "

" ...! " >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 반사적으로 대훈이 뒤를 돌아보자 아까까지만 해도 벤치에 없었던 노인이
벤치에 옷매무새 하나 구겨지지 앉은 채로 사뿐히 앉아있었다.

' 다가오는 인기척은 없었는데. '

" 유리창 갯수라도 세고 있었던 모양이지. 젊은이. "

" ... 어떻게 아시죠? "

" 난 자네가 나한테 한 번이라도 물어볼 줄 알았어. 저 아파트 아시냐고. 나 저 아파트 주민이야. "

" 아.. "

대훈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미치광이처럼 보일까봐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긴 꺼려왔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실마리가 있었다니.

" 흥아아파트만 그런건지, 만약 그렇든 아니든 왜 무엇이든 사라지는건지, 궁금한가? "

" 알고 계시면 좀 말씀해주세요. 무엇부터 말씀드려야 할 지 모르겠네요. 전 이 마을이 지루해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무엇하나 바뀌는 것 없고, 아무런 일도 없는 이 곳에 싫증이 나던 참이었죠. 그런데 어르신 말씀대로 흥아아파트의 수상한 점을
알게 된겁니다. 왜 유리창은 사라졌다가 나타난거죠? 그리고.. 어르신도 사라졌다가 나타나신거죠? "

" 너무 서둘러서 물어보지말게. 나도 생각을 좀 정리해야하기도 하고..
음.. 아니, 내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최대한 서두르는 그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주겠네. 사라지는 것. 그것에 대해 많이 알수록, 사라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걸세. "

" 예? "

" 자네가 틀리게 보지 않았어. 이 마을에서 사라지는 곳은 흥아아파트가 유일하지.
그 사실을 아는 건 흥아아파트의 몇 남지 않은 주민들 뿐이야. 몇 명 남았는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 없네.
가장 최근에 흥아아파트 주민을 만난지도 1년이 넘었어. 내가 최후라곤 생각하진 않지만..
앞으로 내가 그들을 만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야. "

" 무슨 말씀이세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

노인이 이야기를 풀어낼수록 대훈은 더욱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진 농구장에서 농구공 튀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대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노인만을 노려봤다.
눈에 힘을 주어 쳐다보지 않으면 노인이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기에 놓칠 수 없었다.

"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네. 왜냐면 언제부터였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도 할 수 없네.
그 사람이 사라진 것인지, 혹은 잠시 사라져있을 뿐인 것인지 모르니까.
다만 선구자들에 의해 몇 가지 알려진 사실이 있네. 우선 그 시작은 흥아아파트에서 시작된 것이 맞아.
그리고 급속도로 전파되었지. 전염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을까? "

" 이 현상이 전처럼 퍼졌단 말씀이군요, 그럼 사라진다는 건
그런 사람으로부터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퍼져나가는 것인가요? "

" 맞아. 또 병과 비슷한 점이라면 저마다 짊어진 무게가 틀리단 점이지.
누군가는 감기로 앓을 걸 누군가는 결핵으로 앓는단 말일세. "

" 아까 말씀하신대로 아예 사라지거나, 혹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거나의 차이겠군요. "

" 그 역시 맞다네. 내가 좀 더 쉽게 설명해줄 수 없는 것을 이해해주게.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해질걸세.
누구는 사라지고, 누구는 사라졌다가 나타나는가.. "

" 네, 주민들도, 창문도, 왜 사라지는 거고 왜 나타나는 겁니까? 그들은 어디로 간거죠? "

" 거기까진 대답해줄 수 없네. 미안하네. 정말로 내가 모르는 세상의 일이야. 내가 만약 그 정도까지 알았다면
난 영원히 사라져버렸겠지. 여기에 내가 해주려던 답이 있네. 누구는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지.
그건 어디까지 아는지에 따라 결정되는거야. "

" 제발요, 좀 쉽게 말해주세요. "

" 말 그대로야. 이 사건들을 보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뿐이지.
그 '왜?'에 어디까지 대답할 수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돌아오지 못 할수도 있고, 혹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지.
그게 흥아아파트 주민들의 대다수가 사라져버린 이유야. "

" 그들은 '왜'인지를 알고 있었던 건가요? "

" 맞아. 최초의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 그 '왜'에 대한 질문들은 그 사람들을 이은 선구자들에 의해 퍼졌네.
그때까진 이 사건을 주위에 알려서 더 이상 사라지는 것들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지. "

" 실패했나요? "

" 사라지는 것 자체를 막진 못 했어. 다만 모두가 사라지는 건 막은 셈이지. "

" 흥아아파트만 저주에 씌였기 때문에요? "

" 마치 나처럼 말일세. 결국 '왜'를 아는 사람들은 전달하기를 그만 두었고, 모두 돌아오지 못 했네.
사라진 이후 영영.. 그러나 흥아아파트에 남은 사람들은 '왜'에 대해 모두 답하진 못 하기 때문에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네. 다만 사라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어. "

" 이유를 결국 모르신단 말씀이세요? "

"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건 모른단 얘기지.
우리가 아는 수준의 이야기에선 그저 수 일에서 짧게는 수 시간 동안을 사라졌다가 나타날 뿐이야.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년, 몇 십년을 사라졌다가 나타날지 모른다네. " >

" 이 사건에 대해 전부 이해하는 순간 영원히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지만 언젠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결론인가요.. 그럼 창문은 왜 사라지는 건데요? "

" 나도 알고 싶네. 난 가족과 이웃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어.
그럼에도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 때문에 수 일에서 수 시간을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다네.
나는 찾고 있네.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생존자를 말일세.
그래서 흥아아파트에서 가까운 이 곳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거야.
혹시라도 생존자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좀 더 진실에 접근할걸세. 그럴수록 나는 더 오래 사라져야하겠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게 최선이야.
원래라면 흥아아파트 사람들끼리의 약속이 있기에 외부인인 자네에게 흥아아파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금기일세..
미안하네. 하지만 난 혹시나 자네가 흥아아파트의 생존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저 아파트를 주의깊게 쳐다본다는 건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 시작되었군.. "

길어진 이야기에 깊은 숨을 들이마쉰 노인이 고개를 치켜들자, 주위에 사람은 없고 노인 혼자만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 ...? "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대훈이 나타났다.
주위에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훈이 갑작스레 나타났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 했다.
다만 노인은 다행히도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다.

" 기다렸네. "

" 이런거군요.. 사라졌다가 나타난 건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어요. 지금 시간이.. "

대훈이 시계를 쳐다보니 4시간이 흘러있었다.
아차 싶어 핸드폰을 보니 동운으로부터 부재 중 전화가 열 통이 넘게 와있었다.

" 4시간의 부재가 아쉬운가? 나는 수 일을 사라져본 적도 있지. 이래서 내가 병이라고 표현한 것일세.
미안하네. 만약 나를 해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

" ... 아뇨. 오히려 조금이나마 알게 되서 좋습니다. "

" 이제 그만 파고드는 게 어떤가? 나야 살 때가지 살아봤으니 앞으로 더 이 일에 대해 알아봐도
미련이 없지만 자네는 한창 꽃 피울 나이에 계속 시간의 공백이 생기면 인생 진로를 장담할 수 없어. "

" 아뇨.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완전히 알고 싶어요. "

" 내가 자네에게 알려주긴 했지만 자넨 흥아아파트 사람이 아니야.
흥아아파트 사람들 중엔 나처럼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이 아직 있어.
그 사람들이 책임을 짊어지고 모두를 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아야하네.
그렇지 않고서 이 일이 더 알려지면 결국 외부로의 전염만큼은 차단시킨 선구자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거야. "

" 왜 흥아아파트의 저주가 시작되었는지, 알면 알수록 더 오래 사라지는 비밀은 무엇인지,
그렇다면 창문은 왜 사라지는 것인지, 아파트는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완벽히 알아버린 사람은 어디로 가는지,
모두가 알아버린다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 자네가 날 가르치려고 하는 것 같군! 고작 몇 시간 사라지는 주제에! "

" 이 마을이 몹시 지루했습니다. 이젠 아니에요.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마을입니다.
변화무쌍하죠.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매일 매일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건 전이 아닙니다.
제 불치병을 치료해줄 묘약이죠. 전 더 알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사라진다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

" 그만두게, 너무 위험해, '왜'인지 모두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나! "

" 한 가지 궁금한데요, 왜 뉴스에 안 나왔죠? 실종신고야 못 했다고 쳐도.. 엇! "

대훈을 만류하던 노인이 순간 사라져버렸다.

" ... 사라지는 것이라. "

조용히 읆조리던 대훈은 노인이 사라진 벤치에 눈깜짝할 새에 앉아있는 한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이 살짝 당황한 듯 대훈을 쳐다보자 대훈은 싱긋 웃었다.

" 안녕하세요. 혹시 흥아아파트 사시나요? "

" 아.. 그런데요. "

" 지금은 2014년 6월 16일입니다. "

" ...3년만이네요. "

"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

....

...



해가 지기엔 아직 이른 모양이다.
오후 7시를 훌쩍 지났지만 대낮인듯 훤한 동네 운동장에 사람들이 제법 거닐고 있었다.
운동장 트랙을 따라 설치된 스피커에선 어느 공항에서 일어난 인질극 사건에 대한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너무도 무탈한 일상 속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선 어떤 불안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끄럼틀 타는 아이들, 장기 두는 노인들, 이제 보름달과 교대할 준비를 하며 저무는 태양,
많은 이들의 하루 시작과 하루 끝을 매어두는 저마다의 보금자리들.
이 평화로운 마을에 관여할 수 있는 부정적인 일이란 없을 터였다.
그나마 분주한 사람이라면 지금 사람을 찾는 벽보를 붙이고 다니는 한 아르바이트생 정도일까.



[ 사 람 을 찾 습 니 다 ]

성 명 : 장 대 훈
나 이 : 26세
용 모 : 179cm , 75kg 안경 씀

2014년 6월 친구와 주민운동장에서 만남 중 행방이 점차 묘연해져
가출이 잦아지더니 집에 들어오지 않은지 6년째입니다.
혹시 위 실종인의 행방을 아는 분께서는 다음 번호로 연락해주시면
사례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 010-oooo-oooo
- 02-xxx-xxxx

2020.06.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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