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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265
이 글은 8년 전 (2018/2/01) 게시물이에요







 항상 저 쪽이 환하다 | 인스티즈


오규원, 나무가 있는 풍경

 

 

 

몹시 허리가 구부정한 한 그루 나무가

엉덩이를 불쑥 내밀고

 

다른 나무 사이에 생긴

그 초생달 같은 빈 틈에

파아란 하늘이 한 줌 박혀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간들간들 흔들리는

조그만 나뭇잎 하나가

그 하늘을 잘랐다 붙였다 하고 있다







 항상 저 쪽이 환하다 | 인스티즈


최승호, 붕괴되는 사과

 

 

 

사과를 깎다가

구멍에서 꼼지락거리며

머리를 내미는 애벌레와 마주쳤다

 

애벌레는 화난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이 소유한 별을

누가 건드렸냐는 듯 두리번거렸다

 

칼을 들고 나는 망설였다

사과는 애벌레의 부엌이자 방이요

뜯어먹을 한 세계였던 것이다

 

벌레구멍 주위를 천천히

나는 도려내기 시작했다

소유를 굳이 따지자면

사과는 사과나무의 소유라고 해야 하리라

 

사과를 한 입 물어뜯으며

입술의 물렁함을 나는 느꼈다

그리고 장님애벌레로 변신할 필요도 없이

나의 세계가 즙을 흘리며

붕괴되는 소리를 들었다







 항상 저 쪽이 환하다 | 인스티즈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항상 저 쪽이 환하다 | 인스티즈


이은심, 항상 저 쪽이 환하다

 

 

 

꽃 피는 것과는 관계도 없는 일이

꽃 지는 것과는 관계도 없는 일이

두 마디째를 우는 새와도 관계없는 일이

내 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수저통의 수저들이 죄다 등을 보이고

서먹하게 이파리들이 다 뒤집어져 있어도

산 채로 꺾이는 일만 없다면

나무 한 그루만큼만 꿋꿋하게 살자 했다

그대만 깊숙이 옮겨심고 들판처럼 멀리 나가자 했다

 

내 쪽을 헐어서

내일 모레 조금씩 아프면 그만이었다

 

문 밖에 세워두어도 슬픔의 주인은 변하지 않는 것

쓰라린 꽃에도 나비 날아드는 꿈이

내 사는 일의 치명적 낭비였다







 항상 저 쪽이 환하다 | 인스티즈


최범영, 알림

 

 

 

저 시방 병원에 있슈

꼭 오라는 얘기는 아니네유

주스나 과일 먹고 싶어서도 아니네유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네유

보름 지났다는 말 못 해유

알고 온 이 하나 없단 말 못 해유

이 사람 저 사람 알리도 마세유

저 시방 병원에 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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