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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년 전 (2018/2/16) 게시물이에요
1차 세계대전 목록
1)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마른 전투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1차 이프르 전투 당시 독일군의 포격으로 불타고 있는 벨기에 이프르의 클로스 홀(Cloth Hall))


전쟁 도중 격전이 벌어지는 곳은 대부분이 정치적, 군사적인 요충지여서 그곳을 차지하려고 애쓰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런데 전선이 수시로 변하면 같은 곳을 두고 여러번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만일 그러한 곳이 서로가 반드시 차지하려는 요충지라면 격전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4년 동안 전선이 고정되다시피 하였고 변동도 적었지만 1차 세계대전의 서부 전선이 어느 전쟁보다 치열하였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른(Marne), 베르됭(Verdun), 솜므(Somme)는 피바다 그 자체였다. 이러한 지옥 중에서 단지 프랑스로 가기 위한 침공로에 놓였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쟁에 휘말려 들어간 벨기에의 이프르(Ypres)에서는 4년 동안 무려 5차례나 격전이 벌어졌다. 그 중 1914년 가을에 있었던 1차 이프르 전투(First Battle of Ypres)는 1차 대전의 상징인 참호전을 고착화시킨 역사적인 전투였다.






독일의 실책


1914년 9월 12일, 마른 전투(Battle of the Marne)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1차 대전은 커다란 격변을 맞게 되었다. 전투 자체만 놓고 본다면 연합군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전황이 극적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 이유는 어려운 와중에도 기회를 노리던 프랑스군 참모총장 조프르(Joseph Joffre)의 일격보다 독일군 스스로 내린 오판 때문이었다. 분명히 계속 공격을 가해도 되는데 그들은 제풀에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독일군 지휘부 대부분이 소심하게 행동하였다. 2군 사령관 뵐로브(Karl von Bulow)가 내린 후퇴 결정에 반대하였던 이들이 거의 없었다. 참모본부에서 파견 나온 헨취(Richard Hentsch)는 철수에 적극적이었고 우익에서 진격 경쟁을 벌이던 1군 사령관 클루크(Alexander von Kluck)도 묵시적으로 이런 결정에 동의하였다. 여기에 더해 참모총장 몰트케(Helmuth J. L. von Moltke)는 수수방관하다시피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동부의 탄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he Tannenberg)에서 있었던 8군 참모들의 신념 어린 조언이나 예하 부대장들의 소신 있는 항명 같은 훌륭한 반대 의견들은 없다시피 했다. 소심과 조심은 전혀 다른 의미지만 조심이 너무 지나쳐 소심하게 굴었던 것이다. 물론 앞뒤 가리지 않고 진격만 외치는 행위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소심하게 굴었던 이유 또한 한마디로 능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엔 강 일대에 구축한 참호에서 잠시 망중한을 즐기는 독일군 장교들)


사전 정찰 등을 통해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였거나 인근 부대와의 연결 상태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다면 올바른 결정을 하였겠지만 그렇지 못하여 지레 겁먹고 오판하였던 것이다. 고무된 연합군이 즉시 추격을 개시하였지만 방어에 유리한 엔(Aisne) 강에서 독일군이 위치를 선점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자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덕분에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결국 자신만만하게 전쟁을 개시한 독일은 4년 후 패했다.






암중모색


이미 오래 전 수립 된 치밀한 계획에 따라 6주 내에 전쟁을 끝내기로 예정된 서부 전선에서 진격이 멈추게 되면서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1914년 9월, 당시에 이러한 마른 전투의 전쟁사적 의의를 깨닫고 있던 이들은 없었다. 헨취 중령이 자신의 오판을 자책하다가 자살한 것도 전쟁 말기인 1918년 2월이었으니, 그때는 대부분이 이러한 대치를 그저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을 뿐이었다.


전쟁 개시 이후 양측 모두 너무 지쳐있었다. 독일군은 폭염에 먼거리를 진군하여 오느라 맥이 빠졌고 그 동안 밀려나면서 많은 피해를 입은 연합군도 부대 재편이 시급하였다. 따라서 휴식이 필요하였고 원기를 회복하면 전쟁 초기처럼 상대 진영으로 파고들어가 공세를 계속하기로 모두가 마음먹고 있었다. 어차피 벼르고 벼르다 시작된 이 전쟁은 상대를 굴복시키기 전까지 끝날 것으로 예상되지도 않았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새롭게 독일군을 지휘하게 된 팔켄하인. 그는 전선을 돌파하여 결정적으로 연합군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전선은 독-프 국경 남단에서부터 엔 강까지 느슨하게 연결된 상태였다. 이제 막 전쟁 초기의 기동이 멈추며 한숨 쉬던 순간이어서 곳곳에 군사적 행동을 가할 수 있는 구멍들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직 전략적 공세의 고삐를 쥐고 있던 독일이나 겨우 한숨을 돌린 연합군 모두 이러한 구멍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였다. 옳은 생각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양측 모두 당장 움직이기는 곤란한 상태였다.


독일군의 지휘권을 인계 받은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파리로 향한 가장 가까운 관문인 랭스(Reims) 일대의 방어선이 단단하다고 판단되자, 10월 초에 수아송(Soissons)과 베르됭(Verdun)을 동시에 돌파하여 전선 중앙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동안 프랑스군의 방어선도 강화되면서 틈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엔 강 일대에서는 간헐적인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바다를 향한 경주


바로 그때 서로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양측 모두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아송부터 북해(North Sea)까지 전선이 구축되지 않아 텅 빈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주력 부대를 우회시켜 상대의 뒤로 치고 들어가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똑같이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팔켄하인은 전선 중앙부에서의 돌파도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이곳은 그대로 놔두고, 새롭게 돌파를 시도할 우익을 강화하기 위해 앤트워프(Antwerp) 공략에 투입이 예정 된 제9예비군단을 차출하였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마른 전투 직후 독일군 우익(연합군 좌익)은 텅 빈 상태였고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앤트워프에서도 계속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증원군을 기다리며 힘들게 앤트워프를 공략 중이던 베젤러(Hans von Beseler)는 팔켄하인의 조치에 경악하였고 덕분에 앤트워프 함락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형편으로 본다면 수아송이나 베르덩에 있던 병력을 차출하여 우익으로 이동시키고 후방의 앤트워프는 최대한 빨리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이 맞았다. 이처럼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의 예정 시나리오가 무산되자 전쟁은 순식간 임기응변적으로 변하였다.


반면 연합군은 독일보다 우세하다고 판단한 기병대를 앞세워 벨기에로 진격하여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엔 강과 플랑드르(Flandre) 사이에 부대를 집중 배치시켰다. 이처럼 양측 모두 동시에 같은 곳에 전력을 강화하다 보니 정작 공세를 가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결국 빈 곳을 찾아 독일군은 우측으로, 연합군은 좌측으로(즉 서로 같은 곳으로) 우회하여 돌파하려 하였다. 9월 17일, 프랑스 6군이 먼저 움직였지만 누아용(Noyon) 부근에서 격퇴 당했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우회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엔 강에서 시작된 바다로의 경주는 10월 초까지 북해를 향해 계속되면서 전선을 한없이 연장시켰다.)


9월 24일, 이번에는 독일이 누아용 서북쪽의 뻬혼느(Peronne)로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프랑스군에 막혔다. 그런데 한번 돌파가 저지된 곳은 참호가 깊게 파지면서 기존에 구축된 진지들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다. 결국 10월 초까지 알베르(Albert), 아라스(Arras), 릴(Lille) 등을 거쳐 북해까지 계속 돌파와 저지가 이어지면서 전선이 엔 강에서부터 단단하게 연장되어 나갔다. 흔히 이를 ‘바다를 향한 경주(Race to the Sea)’라고 한다.


1차 대전, 특히 서부 전선의 상징물이 바로 참호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세를 지향하던 독일이 먼저 방어선을 구축하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사실 전쟁 초기에 밀려나기 바빴던 연합군은 땅을 파고 숨고 자시고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전술 사상과 평소 훈련의 차이였다. 독일은 공격이든 후퇴든 일단 부대가 멈추면 진지를 구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평소에도 훈련을 그렇게 하였다.






멈추어 버린 전선


반면 연합군, 특히 나폴레옹 시대의 돌격 제일주의 사상을 신봉하던 프랑스군은 이를 무시하였다. 그래서 마른에서 퇴각한 독일군이 엔 강 일대의 고지들을 점령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자 연합군은 더 이상 추격할 수 없었다. 진지 속에 틀어 박혀 기관총을 난사하는 독일군의 방어전에 오히려 노출되어 있던 연합군의 피해만 늘어났다. 결국 연합군도 맞은편에 땅을 파기 시작하면서 전선은 서서히 참호 지대로 변해갔다.


이처럼 시간이 갈수록 전선이 공고해지자 조프르와 팔켄하인 모두가 엔 강과 바다 사이에 이르던 160여 km의 무주공산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던 것은 너무 당연하였던 것이다. 결국 북서 방향의 북해를 향해 전선이 계속 확대되었고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전선도 점차 단단한 참호 지대로 변하였다. 마침내 앤트워프 전투가 끝난 10월 중순 경 해변의 뉴포르(Nieuport)에 이르러서야 바다를 향한 경주는 막을 내렸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바다로 향한 경주의 종착지인 뉴포르 해변)


하지만 양측 모두 전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전쟁을 시작한 이상 당연히 승리하여야 했으므로 곧바로 상대의 방어선을 돌파하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이런 대치를 그저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비록 700 km에 이르는 서부 전선이 갈수록 깊게 파여지고 있었지만 앞으로 4년 동안 계속 이곳에서 머무를 것이고 그리고 엄청난 살육과 파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눈엣가시


이처럼 전방에서 독일과 연합국이 차례차례 전선을 확장하여 나갈 무렵 독일에게 한가지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벨기에 북쪽 스헬데(Scheldt) 강 하구 우안에 위치한 앤트워프 때문이었다. 지금도 유럽의 4대 무역항으로 꼽힐 만큼 중요한 항구 도시인 이곳은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후방에 고립된 상태였지만 벨기에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아직 독일이 점령하지 못했다. 이처럼 전선 배후에 연합군의 거점이 남아있다는 것은 독일에게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1차 대전이 개시되었을 때, 독일은 벨기에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프랑스로 향하는 통로로 생각하였을 뿐이었고 군사적으로도 쉽게 제압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많이 지체하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벨기에의 저항이 격렬하여 상당히 곤혹을 치렀다. 프랑스로의 진입이 시급하였던 독일은 일단 길목에 위치한 벨기에 남부의 리에주(Liege)와 몽스(Mons)를 개전 초에 신속히 점령하였지만 다른 곳을 신경 쓸 수 없었다.


더불어 비록 오래되었지만 48개에 이르는 요새와 보루를 이용한 벨기에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프랑스가 목적이었던 독일은 앤트워프의 정리는 천천히 하여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공인 제1군 예하의 제3예비군단으로 하여금 일단 견제만하도록 조치하고 나머지 주력 부대들은 도시 외곽을 지나 프랑스로 몰려갔다. 사실 이때만 해도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만 예비역으로 이루어진 1개 군단만으로 충분히 앤트워프의 점령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앤트워프는 2달 가까이 난공불락의 상태로 남아 있었고 프랑스 북부에 전선이 고착화되자 순식간 뒤편에 남겨진 고립된 섬이 되어 버렸다. 이제 형편이 바뀐 독일은 눈에 가시인 이곳을 정리하여야 했고 연합국은 어떻게든 이를 살려서 적 후방에 난공불락의 교두보로 만들고자 하였다. 마침내 9월 28일, 준비를 마친 독일이 집중 포격과 함께 공세를 개시하였고 장장 5일간에 계속된 포격으로 인하여 앤트워프 외곽의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르 강의 혈투


벨기에가 앤트워프 포기를 심각하게 고려하자 영국 해군장관 처칠(Winston Churchill)이 10월 3일, 이 도시를 직접 방문하여 곧바로 지원군을 보내 줄 테니 계속 저항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벨기에가 저항하면 할수록 전선의 압박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4개 사단의 증원군을 약속하였지만 정작 10월 6일까지 실제로 현지에 도착한 부대는 영국 해군사단(Royal Naval Division)뿐이었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피격으로 파괴 된 딕스뮈드의 교회. 앤트워프를 포기한 연합군은 뉴포르-딕스뮈드에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이것은 서부 전선의 최종 완결판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벨기에군을 이끌고 수공을 펼치는 초강수까지 두며 독일에 저항한 벨기에의 알베르 1세 국왕)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한 벨기에군은 이제르(Yser) 강을 따라 형성된 뉴포르-딕스뮈드(Mixmude) 방어선 뒤로 철수하였고 앤트워프는 10월 10일 마침내 함락되었다. 그 동안 앤트워프를 공략한 독일군도 최정예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벨기에군을 압도하고 있었고 화력은 절대 우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군은 무려 6주 동안 처절하게 앤트워프를 사수하여 나갔고 그만큼 프랑스와 영국은 방어에 혜택을 보았다.


앤트워프의 함락으로 벨기에는 국토의 90퍼센트 이상을 점령당했다. 이것은 국력의 90퍼센트를 빼앗긴 것과 같은 의미인데 이 정도라면 패망을 하였다고 보아도 된다. 하지만 약소국 벨기에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르 강가에 방어진을 펼친 6만의 벨기에군은 알베르(Albert I) 국왕의 지휘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0월 22일, 독일이 테르바트(Tervaete)를 점령하자 다시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 전투에서 벨기에는 무려 2만의 병력을 상실하였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알베르 국왕은 놀라운 결단을 내렸다. 10월 27일, 이제르강 하구의 퓌르네(Furnes) 수문을 열어 뉴포르-딕스뮈드 가도 동쪽의 저지대를 침수시키는 초강수를 둔 것이었다. 수위가 상승하자 이곳까지 진격한 독일 제3예비군단과 제22예비군단은 서둘러 철군하여야 했다. 이제 남은 공간은 딕스뮈드와 라 바세(La Bassee) 사이에 놓인 이프르(Ypres)였다.






운명의 장소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이프르에서 독일군이 노획한 영국군 대포)


리(Lys) 강 북쪽에 위치한 이프르는 중세에 직물 제조로 영화를 누리기도 했던 유서 깊은 도시로 프랑스와 벨기에를 거쳐 네덜란드와 독일을 동서남북으로 연결하는 교통 요지다. 14세기 백년전쟁 당시에는 영국에 의해, 17세기에는 프랑스에 의해 처절히 파괴되었을 만큼 부근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항상 많은 피해를 입고는 했다. 서부 전선이 고착화되고 공교롭게도 전선이 이곳을 지나게 되자 또 다시 전쟁의 화마를 입을 운명이 되었다.


이곳을 16만의 영국 원정군이 담당하였는데, 여기에는 조금 사연이 있다. 9월 말까지 영국 원정군은 엔 강 일대의 프랑스 5군과 6군 사이에 있었다. 그런데 영국 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John French) 경이 본국으로부터의 보급과 기병대의 활동 편이를 내세워 좌익으로 원정군을 이동하겠다고 주장하였고 이것이 타당하다고 인정되어 10월 1일 프랑스 6군과 지역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곳이 전쟁 끝까지 가장 격렬한 무서운 싸움터가 될 줄은 몰랐다.


돌파를 노리는 독일은 알브레히트 공작(Albrecht, Duke of Württemberg)이 지휘하는 20만명의 제4군이었다. 전쟁 발발 당시 4군은 아르덴느(Ardennes) 일대에 배치되어 전선 중앙을 담담하였는데, 전선이 바다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며 확장되어 나가자 이곳으로 이동 전개하여 늘어난 전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두 부대는 애당초 전혀 예정하지 않았던 새로운 곳에서 거대한 일전을 벌일 운명이었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독일 4군을 지휘한 알브레히트 공작. 그의 부대는 1914년 독일군 중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모두 상황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바다를 건너와 벨기에에서부터 독일군을 저지하여 프랑스까지 밀렸다가 다시 반격하고 이후 주둔지를 바꾼 영국군의 피로는 실로 극심하였다. 독일군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미 개전과 동시에 동원 예비군을 대량 투입하였기에 이후에 충원된 병력의 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상태에서 10월 19일 이프르 전투가 개시되었다.






비참한 전투 환경


영국 1군단이 빈 공간이라 생각되던 이프르 북부의 랑에마르크(Langemarck)로 진격을 시도하다가 공교롭게도 같은 통로를 이용하여 영국군을 공격하려던 독일 제23, 26예비군단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곧바로 교전이 벌어졌는데 서로 공격에 나서다가 조우한 상황이라서 순식간 뒤엉켜 버렸다. 전력이 던 영국군은 병력을 축차 투입하는 초강수까지 두면서까지 밀리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격전 직후 랑에마르크의 초토화 된 모습)


이때 독일은 엔 강에서 북해에 이르는 약 200킬로미터의 전선에 4군 외에도 좌익의 6군과 예비대를 포함하여 모두 22개 군단을 투입하였다. 반면 연합국은 와해 직전이던 벨기에군을 포함한 14개 군단만 동원이 가능하여 공세로 나가기가 사실 버거웠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영국군은 급하게 대륙으로 이동하느라 중장비의 전개가 늦어져 포병 같은 경우는 5:1 정도로 완전히 열세였다.


애당초 벨기에로의 진격을 염두에 두고 이곳으로 주둔지를 옮겼지만 결국 영국군은 공격은 커녕 그 동안 차지한 곳이라도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참호를 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국군이 원해서 새로 담당한 플랑드르는 해수면보다 낮아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솟아나는 지역이었고 거기에다가 강수량도 많았다. 전쟁이 쾌적한 조건에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영국군의 전투 환경은 상당히 문제가 많았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영국군이 담당하였던 플랑드르 지역은 저지대 습지라서 참호를 구축하여 전투하기에는 환경이 상당히 열악하였다. 때문에 많은 비전투 손실이 있었다.)


물과 진흙 그리고 각종 오염 물질로 뒤범벅된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말미암아 참호족(塹壕足Trench Foot)과 폐렴 등의 질병에 의한 비전투 손실이 어마어마했다. 1차 대전 내내 서부 전선의 참호전은 끔찍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프르를 정점으로 하는 플랑드르 일대의 전선은 자연 여건이 나빠 가장 비참하였다. 독일도 비슷한 환경이었지만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던 관계로 영국군 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었다.






학살극


랑에마르크에서의 격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독일은 이프르 남부의 아르망티에(Armentières)에서도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다. 독일은 우세한 포병으로 영국군 진지를 맹타한 후 진격을 개시하였으나 순식간 거대한 진흙 웅덩이로 바뀐 피탄 지역은 전진하는 보병이나 기병대의 발목을 잡기 일쑤였다. 물이 가득 찬 참호에서 고개를 박고 간신히 포격을 피한 영국군은 다가오는 독일군을 차례차례 처단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격전의 장소였던 아르망티에. 수많은 민간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아르망티에 공격이 난항을 겪자 독일은 좀 더 남쪽인 게루벨트(Gheluvelt)에서 돌파구를 열기로 결심하였다. 한마디로 뚫릴 것 같아 보이는 곳이면 무조건 파상 공세를 펼친 것이었다. 10월 31일, 독일군에 의해 영국군 전초들이 피탈되며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이번에도 독일군은 돌파구만 열어 놓고는 지쳐서 진격이 멈추었다. 결국 영국군 제2우스터셔(Worcestershires) 연대의 반격으로 독일군은 게루벨트에서도 물러났다.


이처럼 곳곳에서 소모전이 극심해지자 양측 모두 예비대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필요한 곳에 얼마나 빨리 먼저 예비대를 투입하는가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 시작하면서 전선의 변동이 없이 오로지 혈과 철의 소모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1차 대전이 지옥으로 변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영국은 본토에서 후속 전개한 예비대와 갓 도착한 인도 식민지군까지 전선에 투입하였을 만큼 다급하였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프르 전투에는 독일 대학생 자원병들이 대거 투입되었는데 부족한 훈련으로 말미암아 전투력이 형편없었다. 밀집 대형으로 돌격하다가 영국군의 포격 세례를 받고 한번에 수천명씩 학살당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는 전쟁 내내 독일 국민에게 애국심을 강조하는 사례로 소개되었고 종전 후에는 나치가 적개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프르에서 학살당한 어린양들(Kindermord von Ypern)’이라는 신화로 조작하였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랑에마르크 전투 당시 밀집 대형으로 전진하는 독일군. 이프르 일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많은 독일의 대학생 자원병들이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당했다.)





결과


아직까지는 전력의 우세를 보이고 있던 독일이 전선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쥐고 있던 시기여서 영국군은 근근이 공세를 막아내기에만 급급하였다. 11월 초에 프랑스군이 측면에 증강되면서 영국군의 부담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이었다. 게루벨트에서 밀려난 독일군이 11월 11일, 최정예 프로이센 근위사단을 앞세워 메넹(Menen)에서 이프르로 이어지는 가도를 따라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독일은 아직도 전술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군 못지않게 나폴레옹 시대의 돌격 제일주의 사상을 신봉하고 있던 독일군은 지난 10월 내내 엄청난 피해를 자초한 밀집 대형 돌격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선제 공격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전쟁 초기에는 이런 돌파가 효과적이었지만 강력하게 구축된 방어 진지 정면으로 빽빽이 몰려다니며 전진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도 같았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독일은 최정예 부대인 프로이센 근위사단까지 투입하여 이프르 공략에 나섰으나 점령에 실패하였다.)


보불전쟁 이후 유럽 대륙에서 40여년 간 강대국 간의 전면적인 전쟁이 없다 보니 전술 사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던데 비하여 그 동안 무기는 엄청나게 진보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아군의 우세함을 일부러 적에게 보이기 위해 예전처럼 몰려다녔지만, 정작 총포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좋은 표적이 되어버렸다. 특히 방어전의 총아인 기관총에게 이러한 밀집 대형은 더할 수 없는 전과 확대의 기회였다.


후방의 취사병, 행까지 모두 일선에 투입한 영국군의 격렬한 방어에 막혀 독일의 전진은 지체되었고 여기에 포격이 머리 위에 떨어지자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또 다시 독일은 돌파구만 열고 제풀에 주저앉으면서 결국 수녀의 숲(Nonne Bosschen) 뒤로 밀려나가야 했다. 이처럼 최강의 정예 부대까지 투입하였지만 독일은 참혹한 패배를 당하며 더 이상 이프르에서 공세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메넹 전투에서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를 치료하고 있는 모습. 영국은 후방의 비전투 요원들까지 나서서 독일군을 막아냈다.)




의의


11월 20일이 되자 전투는 막을 내렸다. 한달 동안 이프르 일대에서 벌어진 연이은 격전에서 독일군은 8만명을 잃었고 영국군은 5만 4천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1914년,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로써는 가장 참혹한 수준이었다. 이런 피해의 가장 큰 이유는 고루한 돌파 방법을 고수하였던 지휘부의 책임이 가장 컸는데, 문제는 그때까지도 이러한 잘못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독일이 전력이 앞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패하였던 가장 큰 이유는 참호전이 공자보다 방자에게 절대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기동전은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전사에는 이 일련의 전투들을 1차 이프르 전투라고 표기하는데 이후의 전투들에 비한다면 오히려 덜 잔인했다. 앞으로 더 많은 피를 흘리고 전선은 더욱 참혹하게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아무도 몰랐다.


이제 전쟁 전에 피아가 세워 놓았던 모든 시나리오는 무효가 되었다. 특히 마른 강에서 후퇴하였을 때는 물론, 엔 강에 진지를 구축하였을 때까지만 해도 전선의 정체를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던 독일의 전략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팔켄하인은 당장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서부 전선의 상황을 인정하고 4개 기병사단과 8개 보병사단을 차출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고전을 하고 있던 동부 전선으로 보냈다.


1차 세계대전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 1차 이프르 전투 | 인스티즈

(1차 이프르 전투(확대 부분)가 끝나면서 760킬로미터의 서부 전선은 거대한 참호 지대로 변하였다.)


많은 사상자를 낸데다 상당수의 군수품마저 소모한 상태로 11월 말에 첫 눈이 내리자 양측 모두 더 이상 공세 행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스위스에서 북해에 이르는 총 연장 760km의 참호선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완벽하게 연결되었고 점차 단단해져 갔다. 그리고 이때 형성된 참호 지대에서 앞으로 전쟁은 4년간 계속되었고 갈수록 더욱 격렬하게 바뀌었다. 그러한 앞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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