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은 자신이 스스로 믿고 있는 것처럼 위대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으니 골치아픈 일이다.
하물며 동정심이 결핍된 이 집주인 같은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사랑의 제일가는 의미라는 것마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하는 수 없다.
*
먹는다면 지금이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내년까진 떡이란 물건의 맛을 못 보고 그대로 지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찰나에 고양이이긴 하지만 한 가지 진리를 감득했다.
'얻기 힘든 기회에는 모든 동물로 하여금, 내키지 않는 일도 굳이 하게끔 하느니라.'
*
무릇 모든 안락은 곤고(困苦)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하늘과 땅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 인류가 얼마만큼의 힘을 기울였느냐 하면, 전혀 거든 게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지 않은 것을 자기 소유로 정하는 법은 없으리라.
···
이 넓디넓은 땅에다 약삭빠르게 울타리를 두르고 말뚝을 박아 누구누구의 소유지라고 명확히 구획 짓는 것은,
마치 저 창공에 새끼줄을 치고서 이 부분은 내 하늘이고 저 부분은 네 하늘이라고 등록하는 것과 같다.
가령 토지를 쪼개어 한 평당 얼마라는 식으로 소유권을 매매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를 한 자 입방으로 나누어잘라 팔아도 된다는 이치다.
···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견해에 따라서 이와 같은 법칙을 신봉하는 나는 어디든지 들어간다.
*
고양이의 슬픔은 용기를 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인간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력한 힘은 곧 권리'라는 격언까지 있는 이 속세에 존재하는 이상은,
아무리 이쪽에 도리가 있어도 고양이의 주장이 통하지 않는다.
*
가네다는 당당한 실업가니까 물론 구마사카 조한(헤이안 말기의 전설적 도둑)처럼
160센티미터나 되는 칼을 휘두를 염려는 없겠지만,
소문에 의하면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병이 있다고 하니,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라면 고양이를 고양이로도 여기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무엇이든 적극적인 자가 남들로 하여금 그들 흉내를 내게 하도록 되어 있다.
원래 사랑은 우주적인 활력이다.
위로는 하늘에 있는 주피터 신에서부터 아래로는 땅속에서 울어대는 지렁이나 땅강아지에 이르기가지
이 사랑 때문에 애태우는 것이 만물의 습성이므로,
우리 고양이들이 어스름한 달밤이 좋다고 불온한 풍류 기분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닌 이야기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치를 알게 된다.
이치를 아는 건 기쁘지만, 나날이 위험이 많아져서 나날이 방심할 수가 없게 된다.
교활해지는 것도 비열해지는 것도 겉과 속이 두 겹으로 된 호신복을 입는 것도 모두 세상사를 알게 된 결과이며,
이치를 안다는 것은 나이를 먹은 죄다.
대체로 사물의 현상에만 따라서 움직이는 속물은
오감의 자극 이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아무런 활동이 없기 때문에,
남을 평가하는 데에도 형체 이외에는 이르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우리의 평가는 때와 경우에 따라 나의 눈알처럼 변화한다.
내 눈알은 단지 작아지거나 커지거나 할 뿐이지만,
인간의 품평은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진다. 뒤집어져도 괜찮다.
사물에는 양면이 있고 양극단이 있다.
양극단을 두들겨서 같은 사물에 흑백의 변화를 일으키는 게 인간의 융통성 있는 점이다.
심중을 거꾸로 하면 중심이 되는데 거기에 귀염성이 있다.
*
(매미가) 날아오르는 순간에 오줌을 누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심리 상태가 생리기관에 미친 영향일까?
역시 하도 급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적의 허를 찔러 잠깐 도망칠 시간적 여유를 만들기 위한 방편인가.
그렇다면 오징어가 먹물을 토해내고, 멍청이들이 문신을 새기고, 주인이 라틴어를 는 것과 동일한 강목에 들어갈 사항이 된다.
아무리 자신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세상은 도저히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니거든.
지는 해를 되돌릴 수도, 가모 강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도 없다네.
단지 할 수 있는건 자기 마음뿐이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서운 악당이라는 사실을 골수에 사무치게 느껴본 사람이 아니면
참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산전수전 겪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해탈을 할 수가 없다.
*
대개 인간의 연구란 자신을 연구하는 것이다.
천지가 됐든, 산천이 됐든, 일월이 됐든, 성신이 됐든 모두 자기의 딴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제쳐두고 달리 연구할 만한 사항은 그 누구한테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만일 인간이 자신 밖으로 뛰쳐나갈 수가 있다면, 뛰쳐나가는 순간에 자기는 사라져버린다.
더군다나 자신의 연구는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해주는 자가 없다. 아무리 해주고 싶어도, 해주었으면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아침에 법을 듣고, 저녁에 도를 듣고, 서재에서 손에 책을 드는 것은 모두 스스로 자신을 깨닫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
거울은 자만심의 제조기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자만심의 소독기가 되기도 한다.
겉만 화려한 허영심으로 대할 때에는 거울처럼 어리석은 자를 선동하는 도구는 없다.
예로부터 오만함으로 인해 자신을 해치고 남을 상하게 한 사적의 3분의 2는 확실히 거울의 소행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호기심 많은 의사 선생이 개량 단두대를 발명해 엉뚱한 죄를 지은 것처럼,
맨 처음 거울을 만든 사람도 필시 뒷맛이 개운치 않았을 것이다.
*
세상에는 이런 엉뚱한 일이 종종 있다.
억지를 부려 이기면 좋을 것 같지만, 본인의 인물로서의 값어치는 훨씬 더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상한 것은 고집불통인 본인은 죽도록 자신이 면목을 세웠다고 으쓱댈 뿐,
그 때부터 남이 경멸하여 상대해주지 않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는 것이다.
행복한 얘기다. 이런 행복을 돼지 팔자같은 행복이라 부른다고 한다.
*
미치광이도 고립되어 있는 동안에는 어디까지나 미치광이 취급을 받지만,
단체를 이루어 세력을 가지면 온전한 인간이 되는지도 모른다.
큰 미치광이가 재력이나 위력을 남용하여 수많은 작은 미치광이를 부려먹고
난폭하게 굴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예가 적지 않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
인간의 정의를 말할 것 같으면 별다른 것이 없다.
그냥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 괴로워하는 자라고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유능하다고 하는 인간들을 보면,
거짓말을 해서 남을 낚고, 선수를 쳐서 남의 눈알을 빼고,
허세를 부려서 남을 위협하고, 함정을 파서 남을 빠뜨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중학생 소년들까지도 그대로 보고 흉내 내어 이렇게 안 하면 세력을 못미치는 걸로 잘못 알고,
본래 같으면 낯 붉혀야 할 일을 득의양양하게 해치우고는 미래의 신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을 유능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불량배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
그런 불량배에 비하면 주인 같은 사람은 훨씬 고급스런 인간이라고 해야겠다.
무기력한 점이 고급스런 것이다. 무능한 점이 고급스런 것이다. 약아빠지지 않은 점이 고급스런 것이다.
인간이란 광활한 세계를 스스로 축소시켜
자기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자리의 바깥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딛을 수 없도록
잔재주를 부려서 자기 영역에 새끼줄을 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인간이란 고통을 자초하는 존재라고 평해도 좋을 것이다.
요새 세상 사람들의 자각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와 타인 사이의 이해관계에 커다란 장벽이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을 말하는 것일세.
그리고 이 자각심이라고 하는 것은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하루하루 예민해져가니까
나중에는 일거수일투족도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는거야.
헨리란 사람이 스티븐슨에 대해 이렇게 평했지.
그는 거울이 달린 방 안에 들어가 거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자기 모습을 비춰보지 않고는
마음이 안 놓일 정도로 잠시도 자기를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이것은 오늘날의 추세를 잘 나타낸 말이라고 하겠네.
자나 깨나 '나', 이 '나'가 어디든 따라다니니까
인간의 언행이 인공적으로 사소한 것에 얽매이기만 하고, 스스로 궁색해지기만 하고,
세상 살기가 괴로워지기만 하니,
마치 맞선 보는 젊은 남녀같은 기분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긴장을 하고 지내야만 한다네.
느긋하다든가 침착하다든가 하는 글자는 획만 있지 의미가 없는 말이 되고 마는 거지.
옛날 사람들은 자신을 잊으라고 가르쳤는데, 지금 사람은 자신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니 전혀 달라.
하루 종일 '나'라는 의식으로 충만해 있거든.
그러니까 하루종일 평안할 때가 없지. 언제나 초열지옥이야.
세상에 아무리 약이 많다 해도, 자기 망각보다 더 좋은 약은 없네.
*
그러니까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평소 사악한 마음을 버려야 비로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는 뜻)이란 말을 명심해야한단 말일세.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인간은 괴로워서 못 견디지.
*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다.
뭐든지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 경험해둬야 한다.
죽고나서 '아아, 안타깝다'하고 무덤 속에서 억울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1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