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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에 대한 제목+내용 검색 결과
♡김태형♡ll조회 591l 2
이 글은 6년 전 (2018/4/27) 게시물이에요




 


혼자 세계사 공부하다가

여시들도 함께 알면 좋을 것 같아서 써봐!

부족한 지식

아돌프 히틀러는 다들 알다시피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인물이야.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어.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북동부의 산간지방에서 사생아로 태어나서 숙부 집에서 자랐는데

아돌프 히틀러의 할아버지가 유태인이라는 설이 있긴 하나 확실한 건 아냐.


세관 관리였던 알로이스는 아내와 두번 사별한 후 24살이나 어린 클라라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맏이가 아돌프 히틀러야.

아돌프는 초딩때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는데,

아버지의 강요로 린츠의 실업학교로 진학 후 학업과 품행 모두 불량하다며 퇴학을 당해.

그리고 죽은 아버지 연금으로 엄마 옆에서 빈둥거리며 살다가

1907년 빈에 있는 미대에 응시했지만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 떨어졌어


그리고 같은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고아 연금으로 3년간 빈의 무료 숙박소에서 그림 엽서나 풍경화를 그리고 팔면서 먹고 살아.

이때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열강으로 암투를 벌이던 시기였고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고조되고 있던 때였어.




히틀러가 빈에서 본 것은 어둡고 가난하며 추잡한 하층민들의 세계였어.

그리고 이 속에서 그는 대중조작의 기술 기초를 터득했지.

히틀러가 쓴<나의 투쟁>에 나오는


"거짓말을 하려면 굉장한 거짓말을 해라" "대중은 이해력이부족하고 잘 잊어버린다" "대중은 지배자를 기다릴 뿐 자유를 주어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 >


등의 유명한 문장들은 이곳에서 본 히틀러의 대중관이었지.

대중을 자각시키려고 수많은 혁명가들이 심혈을 기울일 때 히틀러는 하층민들의 가장 타락적이고 낙후한 면을 꿰뚫게 된거야.




히틀러는 1913년 5월, 오스트리아 당국의 징병 검사를 피해 평소 동경해왔던 독일 제국 뮌헨으로 도망쳐.

그리고 그곳에서 세계 제 1차대전을 맞지.

그는 지원병으로 입대해 독일제국의 병사가 돼.

명령과 복종과 의무만이 지배하는 병영에서 히틀러는 안식을 찾아.

그는 참호에서 나누는 전우애야 말로 고귀하고 거룩한 인간정신이라고 정의하고,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선으로 달려갈 정도로 투철한 군인 정신을 갖게 되지.




1918년 11월, 패전과 더불어 혁명이 일어나 독일 제정은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돼.

바로 바이마르 공화국이야.

하지만 정권을 잡은 이들의 무능함으로 여러모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어.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갚을 능력도 없었고 말이야.




그래서 정권을 잡은 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 주의를 저버리고 독일 제국의 옛 지배세력과 타협해.

그래서 독일 혁명은 독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지는 못했어.

독일제국의 지배계급이었던 독점 자본가와 지주들은 여전히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유지했으며

관리와 재판관, 군부는 마찬가지로 행정과 치안, 군대를 권위주의적으로 지배했지.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정과 학교도 그대로였어. 상부에 대한 비판도 마음대로 늘어놓을 수 없었고.

때문에 이 사회민주당은 국민들의 민심을 얻지 못했지.




뿐만 아니라 같은 좌익끼리 공산당, 사회민주당으로 나뉘어 서로 격렬하게 비난하기까지 했어.

제정의 잔당이나 우익 보수 진영에 대한 투정이 아니라 좌익 내 다른 정파를 궤멸시키려 한 거야.

이런 상황에서 옛 왕당파들은 공화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반동의 칼날을 갈고 있었지.




패전 후에는 군복을 벗고 다시 도시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과 제대 군인들이 실업자가 되어 거리를 배회했어.

수공업자와 소상인, 중소기업가 관리들도 불만족스러운 생활에 울분을 터뜨렸지.

그때 조그만 우익 단체가 반혁명의 구심점으로 성장할 기회를 갖추는데,

바로 1919년에 결성된 독일노동자당이야.




이 단체는 1920년에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국가사회주의를 가리키는 내셔널 소스트의 앞뒤에서 글자를 따와 나치라고 부르기도 했어.




나치당은 군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어.

평소 뛰어난 웅변술을 인정받던 히틀러 상병이 여기에 파견되었어.

중앙정부는 사회민주당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바이에른 지방은 지독히 반동적인 왕당파와 군부가 지배하고 있었어.

그래서 나치당은 여기서 큰 성공을 거뒀지.




히틀러는 나치당의 정치집회에 야유를 퍼붓는 반대자들을 몰아내려고 테러조직 SA(돌격대)를 만들었어.

주로 퇴역군인과 어린 직공, 학생, 노동자로 구성된 돌격대는

1921년 11월 당의 집회에 몰려든 사회주의 노동자들과 권총을 난사하며 격투를 벌인 후 그 이름을 얻었지.

SA는 10명씩 분대를 지어 폭력을 휘둘렀고 채찍, 권총, 곤봉, 단검등의 무기를 소지했어.

그리고 군부대에 들어가 군사훈련까지 받았어

(나중에 점점 커지는 SA에 위협을 느낀 히틀러는 SA를 해체시켜버려.)




히틀러는 다른 유명인사들처럼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어가지 않고 청중들 반응을 보면서 자유로이 선동 연설을 구사했어.

사회주의나 공화정에 대한 비난만을 외쳐대지 않고

독일 민족의 단결과 외국의 위협으로부터의 해방, 가난한 이들을 구원해야한다 등 고귀한 목표를 제시하며 청중을 사로잡았어.

그리하여 사회주의혁명에 위협을 느낀 중산층과 사회주의 운동에서 소외된 노동자들 실업자,

옛 부활을 꿈꾸는 왕당파, 군부, 독점자본가들의 지지를 받았지.




나치당은 남부독일을 점령하고 북부를 점령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었어.

1923년 11월 8일, 군부지도자들이 뮌헨의 맥주홀에서 연 왕정복고 연설회에 돌격대를 이끌고 가서

이른바 맥주홀 폭동을 일으켰는데, 군부의 반대로 실패로 끝났어.

그리고 히틀러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던 루덴도르프와 함께 체포되었어.

히틀러가 루덴도르프 및 군부 지도자들에게 자신과 함께할 것을 협박했거든.




정부는 나치당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어.

히틀러에게는 5년 형을 내리고 란츠베르크의 감옥에 수감시켰는데,

여기서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담은 <나의 투쟁>을 출간했지.

루덴도르프는 무죄로 풀려났어.




1924년 11월 석방된 히틀러는 다음 해 2월에 당을 재건했어.

그리고 친위대(SS)라는 비밀조직을 결사했지.

폭동 탓에 왕당파와 군부의 후원을 잃은 나치당은 합법 대중당으로 변신하여 독자적 활동을 벌였어.

그리고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하여 권력을 획득할 기회를 잡았지.




1930년 쯤엔 대공황(이따 설명)때문에 온 나라가 혼란이었어.

모든 나라의 물가가 치솟고 폭락하고 아주 혼돈의 시기였지.

원래 독일은 "사회주의 혁명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았는데

대공황으로 인해 더이상 도움을 받지 못하가 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렸어.

때문에 독일의 국내정세는 혁명과 반혁명의 일대 격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지.




노동자 계급은 사회민주당을 외면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해 온 공산당 진영으로 돌아섰어.

나치당은 주춤했고 공산당 세력이 계속 확대됐어.

하지만 중산층과 농민들은 중도파 정당을 버리고 나치를 지지했어.

소련의 스탈린 독재체제가 강화되면서 중산층, 자본가, 지주 등등이 숙청되는 것을 보며 공포를 느낀

독일의 보수주의자와 지주 계급, 왕당파들도 나치를 지지했지.




그리하여 히틀러는 보수진영의 모든 정파와 손을 잡고 1933년 1월, 내각을 장악해.

하지만 정세가 불투명한 건 여전했어.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은 대공황을 일으킨 자본주의체제를 타파하고 러시아 혁명의 뒤를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나치당은 막대한 사회정책 비용이 필요하고 혁명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며 민주주의를 폐지하고 독재정부를 수립하자고 말했어.




이 상황 속에서 1933년 3월 5일의 총 선거를 앞두고 나치는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른 뒤 이것이 좌익의 소행이라고 조작했어.

일반 국민 사이에선 사회불안에 대한 공포와 반공 분위기가 번져나갔고, 결국 나치당은 총선에서 승리했지.




여기서 잠깐 설명하고 가자면 대공황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즉,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은 활성화되어간다는 주장에 의해 일어난 거야.

아담 스미스는 개인이 각각의 이익을 추구하면 경제는 알아서 살아날 것이며 여기서 정부가 개입하면 안된다는 이론을 펼쳤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의 절대적 신앙처럼 여겨졌어.


하지만 결국은 모든 주가가 폭락하고 개인 파산을 하게 되는 대공황이 일어났고,

여기서 케인즈라는 상류층 출신의 부자가 이른 바 "케인즈 혁명"을 주장해.

정부가 적당히 경제에 개입해서, 일반 기업들이 하기 힘든 공 일들,

예를 들면 공공시설 건설이나 댐 건설 등을 대신 나서서 맡으며

그곳에 써야 할 노동자본을 구함으로써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어.


하지만 이론을 내놓은 초반에는 아담 스미스의 이론 신봉자들에게 무시를 당했지.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제일 먼저 공산당을 폭력으로 해산시켰어.

공산당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반대자가 너무 많았으므로 결국 해산되었지.

그리고 히틀러는 사회민주당에 무자비한 테러를 가하고 관공서와 기업체, 조합에서 당원들을 축출해 뿌리를 뽑았지.

또한 노동조합을 전면 금지시키고 정당 결성과 활동의 자유 봉쇄, 신문이나 방송에 대해 철저한 검열,

고용주 협회나 농민과 상인의 이익단체까지 모조리 해산 시켰어.

대학 자치권을 박탈하고 각급 학교의 교육 내용을 나치 정신을 선전하는 것으로 바꿨어.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을 전부 반역자로 몰아 처단했지.




나치는 역사 이래로 가장 강력한 계급 독재였으며 노골적인 전체주의 국가였지.

히틀러는 각계각층을 철저히 하향식으로 조직했어.

모든 계급 계층이 나치당과 그 보조 조직으로 전락했어.

사회 전체가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군사 조직으로 바뀐 거야.




나치는 정치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성장했어.

히틀러가 케인즈 정책을 알고서 실행한 건지 아닌진 모르겠는데,

도로 건설과 토지 개량 사업, 대규모의 병영과 비행자건설 사업을 일으켜 기계 대신 실직자들을 고용해

케인즈의 가르침을 가장 먼저 실행했지.


그러므로 독일은 가장 먼저 대공황을 탈출했어.

이러니 많은 국민들이 나치당을 응원했지.




나치하면 유태인을 빼놓을 수 없지.

유태인은 예로부터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후 로마 기독교 교회로부터 예루살렘 입성을 금지당한 후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았어.


"신을 부정하고 예수를 살해한 음험하고 타락한 민족"이라는 죄였지.


유태인은 천민으로서, 게토라는 유태인 빈민 거주지역에 살며 특별한 옷을 입도록 강요받았어.

정상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어서 기독교도에게 금지된 고리대금이나 전당포를 주로 했고

자본주의가 자리잡은 후에는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 되었지.




유태인은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많은 나라에서 법적 평등을 얻어

언론, 출판, 변호사, 의사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었어.

하지만 전통적으로 유태인을 멸시해 온 귀족이나 지주, 소상인, 농민 등 자본주의의 여러 현상에 불만을 가진

낡은 계급에 속한 이들은 유태인을 향해 그 불만을 터뜨렸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로 인해 중세적 공동체가 해체됨으로써 고립된 개인으로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야.


이 유럽인들은,

자기네 울법과 생활, 공동체 문화를 꿋꿋이 지키는 유태인들을 부러우면서도 무서워하게 됐지.

그리고 이러한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 인종이론이야.

프랑스의 듣보 학자 고비노는 "유태인은 열등하고 비열하고 기독교 문화를 더럽히는 기생충이므로 박멸해야한다"

고 인종이론을 주장했어.




하나 알고있자면 전체주의(모든 사람이 같은 사상을 갖도록 강요하는 체제)에 대해 연구했던 한나 아렌트는

민중은 고립화가 진행될 수록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사상의 경향)를 공유하고 싶어한다고 말하기도 했어.




암튼 이런 인종이론을 직접 실현한 것이 바로 히틀러였지.

나치는 처음엔 유태인을 때리거나 가게를 습격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독일인의 통일과 독일민족의 우월성, 국가 의식을 높이기 위해

유전학과 우생학 연구를 대폭 지원하고 일부일처제 폐지에 나섰어.


그래서 유태인을 추방하거나 공장과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시켜 노동력을 착취하고 재산을 몰수해 전부 독일인이 차지하게 했지.

관료기구 꼭대기는 점점 인종이론 광신자로 가득차서 유태인을 절멸하는 정책을 실시했어.




나치가 온 유럽을 점령함에 따라 유태인은

노인, 어린 아이,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수용소에서 학대와 인체실험 등을 당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어.

독일 국민들은 이 참상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기 때문에, 나치 만행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어.

연합국 정부조차 실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소문을 믿지 않았지.




전세계 유태인들은 이에 치를 떨면서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의 나라를 세우려는 시오니즘 운동에 더 열을 가했고,

훗날 자신들을 박해한 적도 없던 아랍인들을 되려 박해하는 역사의 악순환을 낳았지.




히틀러는 제 1차 세계대전 때 빼앗긴 식민지들도 회복하려 했어.

독일 영토 안에선 더이상 살 수 없게 된 독점자본의 활로찾기가 목적이었지.

자본가들은 값싼 원료와 넓은 시장, 수지맞는 투자 대상을 제공해 줄 식민지가 필요했거든.




나치는 국제 비난에도 아랑곳 않지 않고 무장을 마친 뒤


1936년 라인란트를 침공해. 라인란트는 라인강 주변의 비무장 지대야.

이로써 1차 세계대전 때 맺었던 베르사유조약을 파기한 셈이지.


193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10월에는 체코 영토인 주데텐 지방을 집어삼켜.

1939년에는 체코를 합병하고 리투아니아의 메메르 지방을 또 합병했지. 곧바로 폴란드 단치히도 점령.

그리고 그 해 8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마자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했어.




참을 수 없게 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그 유명한 세계 제2차대전이 터져

게르만족이 청동기 시대부터 행운의 상징으로 사용해 온 갈고랑이 십자가 켄크로이츠는 이제 재앙과 살육의 상징이 되었지.




독일은 전쟁 시작 반년 만에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해.

또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1941년 6월 소련으로 진격했어.


독일과 3국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와 일본도 마찬가지야.

일본은 동남아에 진출 후 예고도 없이 다음 해 12월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했지.

일본 개나대네.




이리하여 3국의 파시즘 진영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반 파시즘 연합국 진영 사이의 전쟁이 아주 불꽃튀게 되었지.




시간이 지날 수록 독일은 열세해졌고 결국 1945년 5월 7일 항복을 선언해.

히틀러는 그간 동거해왔던 에바 브라운과 4월 29일 황급히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 날 함께 동반 자살해.

그리고 소련군에 의해 불탄 시체 두개가 발견되는데, 치아 검사 결과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과 치아가 일치했어.

그런데 항간에는 히틀러가 죽은 것이 아니며 어딘가 숨어있다는 설도 돌았지만 어디까지나 설일 뿐. 어쨌든 지금은 죽었겠지.




점령군 나치에 목숨걸고 저항한 유럽 각국은 해방을 맞았고 전쟁은 끝이 났지.

나치즘은 제국주의의 본질을 남김없이 보여주었어.

약소국 침략과 군사적 점령, 식민 통치가 독점자본주의 체제의 대외정책이라면

민주주의 말살이 그 내적 표현이지.




누구나 동등한 투표권을 갖는 평등한 정치제도인 민주주의와

소수 자본가가 금융, 생산, 유통을 지배하는 불평등 경제체제인 자본주의는 저절로 조화를 이룰 수 없어.


민주주의 전통이 강하고 민중 의식이 높았던 미국이나 영국은 국가 권력이 개입하여 자본주의체제를 수정함으로

적어도 나라 안에서는 민주주의를 유지했지만, 그렇지 못한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강력한 독재체제를 수립했지.

이게 바로 "파시즘"이며 나치즘이 그 극단적인 형태였어.




하지만 결코 나치즘만의 특징은 아니야.


나라 안에서 민주주의를 지킨 이른바 자유세계 열강들도

제 3세계 국가들에 대해서는 결코 침략적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버리지 않았잖아. 백인 우월주의도 마찬가지.


베트남과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지 전쟁도,

미국이 벌인 베트남 전쟁과 남아공화국의 가혹한 인종 차별, 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에 대한 탄압,

이라크와 니카라과나 칠레, 아르헨티나, 한국 등등 이미 무너졌거나 지금도 엄존하고 있는

제 3세계 파쇼체제에 대한 미국의 지원과 배후 조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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