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왕조가 농민반란에 의해 멸망당했을 무렵, 만주 새외민족이 산해관을 돌파했다. 그들은 농민군을 분쇄하고 잇달아 한족 관민의 남명(南明) 정권을 진압하여 두번째로 전국적인 이민족 정복왕조를 수립했는데, 이는 한족 사대부에게 비할 바 없는 대재난으로 인식되었다. 명말청초의 저항사인(抵抗士人)으로서 이 재난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뚜렷한 정치개혁 사상가가 되었던 황종희는 이 시대의 비극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것으로 표현했을 정도였다.
청대 경세학 또는 실학의 개념과 고증 방법을 정립하는데 가장 유력했던 학자는 고염무였다. 그는 이 명말청초의 대재난에 대하여 '망국'보다는 '망천하'가 더 중대한 것으로 이해하고 "보국은 군신의 책임이지만 '보천하(保天下)'는 천한 필부라도 함께 책임이있다."고 말하였다.
당시의 경세실용 사상가들은 전제군주제를 제약, 수정하기 위한 제도개혁론을 제시하고 있었는데, 가장 민본적 색채가 선명한 것이 황종희의 『명이대방록』 이란 책이었다. 황종희에 의하면 "천하가 주主이고 군주는 객客이며, 천하는 일가一家의 법이 아니라 천하의 법으로 다스려야 하고, 관료는 군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천하만민을 위해 벼슬하는 것"인데
"그런데도 현실의 명, 청조 군주는 천하사람들이 감히 스스로 사私와 이利를 이루지 못하게 해놓고, 군주 자신의 대사大事를 천하의 대공大公이라 하고, 천하를 마치 자기 재산처럼 여긴다."고 평하였다. 전형적인 가산국가의 전제군주상이었다.
이리하여 황종희는 군주와 공치共治해야 할 재상권을 가로챈 궁노宮奴(환관을 뜻함)를 제어하여 재상권을 강화하고 학교를 신사紳士(옮긴이 주: 명청대의 전현직 관리 및 관리지망 학위소지자 계층을 일컫는 말로 중소지주-관료-지식인의 삼위일체 계급이자 당대의 지배계층, 잘 이해가 가지 않으면 조선후기 사족을 생각할 것)의 청의淸議기관으로 하여 정치를 공론으로 감독하고자 하였다.
1. 이 사상이 제시될 무렵이 무려 17세기 중반이었으니 명-청의 크고 강려크한 관료제가 지배하던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사상이었습니다.
3. 이들은 유가적 인치人治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법치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기존 유가 사대부들이 지니고 있던 법 관념, 즉, 진시황이래 전제왕가의 패도, 폭력적인 사법私法을 부정하고 도덕적인 공법公法 관념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도 선진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2. 그렇다고 해도 주의해서 봐야할 점들이 있는데, 어디까지나 군주권의 폐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황제권을 제약하는 주체를 시민적 민권이 아니라 신사층의 민권(신사민권)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지식인, 지주적 성격을 탈피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