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에게 있어서 환도는 어디까지나 보조무기였고, 이는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이어지는 경향이었음. 기병용과 보병용이 달랐고, 기병용은 보통 칼날 길이가 1척 6촌, 보병용은 1척 7촌 3푼이었다고. 기병용이 보병용보다 짧았고 이는 문종 대에 제식화된 규격이었음. 다만 저 제식화된 규격이 제대로 지켜졌는 지는 사실 미지수.
일단 초기 조선군이 짧은 길이의 환도를 선호한 것은 아무래도 전술적인 기능 때문이었다고. 보통 조선군은 환도로 적을 공격할 때, 특히 기병들의 경우 적을 찔러서 사살하기 보다는 직접 내리쳐서 사살하는 것을 선호하였고 이 때문에 중종 실록에서는 '요새 공물로 바치는 환도가 너무 긴데? 길이 좀 줄여라.' 라고 언급할 정도.
기병이라는 병종에 상당한 자원을 쏟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주력 기병들이 사용하는 환도는 짧아야한다는 전술적 이점을 채택한 셈이고, 어차피 교전에서 바로 칼 뽑고 싸울 것도 아니라서 이러한 경향은 임진왜란에도 이어졌음.
여진족이나 왜구들이나 원거리에서 화살을 난사하고 화약장비를 다루는 보병들이 화기를 발사하면서 적의 전열을 깨버린 다음에 기마 돌격을 해서 와해시켰으니, 이 때만 해도 짧은 기병용 환도라도 적에게 상당한 피해를 강요할 수 있는 환경이 됨.
보병의 경우 기병용 환도보다 조금 긴 데, 이건 보병들이 찌르는 용도로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칼날 길이와 칼자루 길이가 길도록 했음. 환도 자체가 작다보니 휴대성이 좋았고, 급하게 백병전을 벌일 때 빠르게 뽑아서 대응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으나, 문제는 실제 백병전에서 이것이 얼마나 효과를 가질 지에 대한 의문점이었음.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종군했던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 신부는 조선군의 칼이 너무 짧고 가늘었다고 평가했고, 실제 전투에서도 짧은 검으로 무장한 조명 연합군이 3~4척 길이의 장검을 들고 공세를 가하는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은 사례도 적잖이 보일 지경이었음.
경상 감사 김수 예하에서 전투를 벌이던 이탁영도 1592년 7월 교전에서, 조선군이 일본군 5~600명을 사살하여 승전을 하기는 했으나 일본군의 조총과 칼로 인한 사상자를 많이 냈다고 보고하면서 이러한 근접 백병전에 있어서 기존 환도로는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다는 이야기를 했을 지경임.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점차 조선의 환도는 대형화 추세로 이어졌고, 항왜들을 통한 왜검술의 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함. 대형화된 검은 확실하게 기병들에게도 위협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창검병이 점차 사라지고 조총병들이 대두되기 시작한 시점에서도 대형화된 검의 지급은 필수적이었음.
따라서 조선군 조총병들은 대체적으로 개인화기 이외에 백병전을 대비한 부무장, 즉 환도들을 지급받았고 이는 일본의 장검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형태로 된 것이었음. 벽제관 전투나, 남원성 전투에서 명군 기병에게 타격을 입혔던 사례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주적인 청이 기병이 주력이었으니 이러한 상성 문제도 조선에서 검토를 했을 것임.
물론 그렇다고 대보병전에서 일본식 장검이 나쁜 것도 아님. 아니 오히려 치명적이지. 다용도성에서 워낙 좋았기 때문에 대형화된 검들이 서서히 도입됨. 19세기 초 훈련도감을 보면 근접장비로서 환도가 절대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주력 장비는 아니어도, 보편적인 부무장으로서의 환도는 상당한 위치를 갖추고 있었다고 이해하면 편할 것임.
다만 환도라는 범주가 너무 넓은 데다가, 국내 연구에 있어서 환도는 잘 진행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 정확하게 조선 초기-임진왜란-병자호란-조선 후기로 진행되면서 어떠한 방식으로 변환이 되어갔는 지에 대한 분석은 여전히 부족함.
오죽하면 일본도도 환도고, 이양선에서 발견한 영국제 검도 환도라고 했을 지경이니.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한 사안이 아닐까 생각 중.
조선군 환도에 대한 이야기들|작성자 오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