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 색슨사 (7세기)
오랜만에 글을를 들고 복귀한 헤센입니다. 이번에 보여드릴 역사는 앵글로 색슨사 중에서도 7세기를 요약한 내용이며 대략 3부작이 될거 같네요.
* [옥스퍼드 영국사]를 참고 했습니다
0. 베어울프와 같은 초기 영문학을 살펴보면 상당히 영웅주의적인 서사시들이 많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선 이 문학이 쓰여진 시대를 알 필요가 있다. 베어울프는 7~8세기 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내용의 배경은 더 앞시대인 6세기 쯤으로 보인다. 베어울프는 당시의 궁정이 어떤 분위기였는지 잘 묘사해주고 있다. 군주와 가신이 존재하는 궁정은 군주의 개인적인 힘에 의해서 가신에게 충성을 받아내며 그들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며 승리의 영광을 쟁취해나가며 그 영광을 분배하므로써 다시 충성을 받아내는 그런 곳이었다. 표면에서 들어나듯이 전형적인 '건달 조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1. 위에서 서술한 궁정은 상당히 유치하거나 미개할 수 있다고 보이는 충성행위와 위세 등의 영웅주의적인 모습이 강한 곳이었다. 궁정은 무력 혹은 권위 같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강력하면서도 오래가지 못하는 힘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이 힘은 제도나 법률에 의한 것은 거의 없었고 대체로 개인의 능력이나 가문의 능력에 의존했다. 만약 이 힘을 공급하던 이가 죽거나 능력을 상실한다면 그의 궁정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이러한 확립되지 않은 충성과 권력을 얻기 위한 이들의 난립으로 앵글로 색슨 사회는 거진 2세기간 오래동안 지속되는 통일된 왕국을 가지지 못했다.
2. 위에서 언급한 점들과 로마의 유산을 타 서유럽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점에도 불구하고 앵글로 색슨 사회는 상당히 조직되고 효율적이었다. 당시 앵글로 색슨 사회는 헌드레드(Hundred)라고 불리는 거대한 행정단위로 이뤄져 있었는데 아마도 통치자들이 그들의 행정, 법적인 목적을 위해서 조직한 것임에 틀림 없다. 다만 이것이 무엇에서 기원되었고 누가 창립했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일부 학자는 로마의 제도에서 기원됬다고 하는 반면 최근에는 로마노 브리티쉬나 켈트인들에게서 기원된 것이라고 하는 학론도 존재한다.
3. 그럼 헌드레드라는 행정 단위는 과연 무엇일까. 쉽게 생각하면 주(Country)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추측하자면 헌드레드는 크기가 대략 50~100평방마일 정도로 행정단위로썬 상당히 큰 편이었다. 만약 이것이 인구가 밀집된 곳의 행정구역단위라면 상당히 비효율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앵글로 색슨 치하의 브리튼의 인구는 200만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앵글로 색슨인들의 특성상 그들은 가구가 밀집된 농촌을 형성하기 보다는 거대한 한지나 농지를 경계로 이웃간의 거리가 멀리 떨어진 분산된 농촌을 선호했다. 즉 인구는 적은데 농촌은 분산되있었기에 그들을 모두 관리하려면 거대하고 느쓴한 행정단위가 필요했을 것이다.
4. 이런 행정구역의 중심지는 군주의 장원(Tun) 혹은 공인된 교회였다. 특히나 군주의 장원이 중요한데, 이곳이 사실상 지금으로 치면 동사무소처럼 행정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법원처럼 법률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즉 이 군주의 장원은 광활한 헌드레드의 구심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원은 헌드레드마다 여러개가 있었다고 한다. 군주의 장원은 대체로 지방관리에 의해서 관리 되지만 때때로 군주의 가신 혹은 군주가 직접 그곳을 방문하여 관리하기도 했다. 그밖에 공인된 교회 같은 경우 7세기 중반부터 사실상 앵글로 색슨 사회의 공인 종교로 자리잡은 크리스트교의 교회에게 군주가 자신의 장원을 수여한 것으로 그 수여를 통해서 헌드레드 관리 및 여러가지의 이익을 얻으려 했다. 이는 좀더 자세히 서술할 필요가 있으므로 후술하도록 하겠다.
5. 헌드레드는 하이드(Hides)라는 세부단위로 구성된다. 하이드란 한 가구 정도가 먹고 살 수 있는 일종의 토지규격인데 통치자들은 이 하이드 단위로 세금이나 공물을 수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하이드 단위는 상당히 유용했다. 하이드를 20개에서 그 이상으로 묶어서 각각 집단에 공납물을 정하게 했는데 아직 인프라, 노동집약적인 농지 같은 것이 없던 분산되고 목축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던 농촌에겐 알맞은 제도였다.
6. 이런 장원들을 다스리던 통치자들은 따로 내부구조의 변형을 유도하거나 시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을(Vills)과 도읍(townships)이 장원 중심에 복합적으로 연결되있는 복합영지(Multiple Estate)가 다수로 존재했다.
7. 이런 복합영지, 분산된 농촌 같은 형태들은 상위 군주가 가신들에게 장원을 양도할때도 변하지 않았다. 가신들 또한 각종 세금이나 공물을 수취할때 이런 내부조직을 변화 시킬려는 의도는 없던 것으로 보인다.
8. 대중적으로 중세시대는 '봉건제'라는, 군주가 가신에게 분봉하므로써 가신에게서 충성과 의무를 받는 제도가 자리잡은 시대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10세기 이후부터 점차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고 이후 5~6세기 동안 강렬하게 빛나다가 최후는 희미하게 잔존한 제도이긴 하다. 하지만 중세 초에, 앵글로 색슨 사회에서도 이러한 제도가 존재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중세라는 시대는 넓고 지역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중적인 시각을 버리고 세부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앵글로 색슨 사회는 그다지 계서제적인 사회는 아니였다. 물론 종주가 나눠져 있고 군주가 가신에게 분봉을 통해서 충성을 얻으려 한 것은 사실임에 틀림 없지만, 봉건제에서 보여지는 계서제적인 제도나 작위는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초기 가신들은 토지, 장원에 묶인 귀족들이 아니라 궁정에서 군주의 하사품에 묶인 자들이었다. 학계에서는 그들을 셰인(Thegns) 귀족들이라고 부른다. 이후 점차 크리스트교가 궁정과 사회에 자리잡고 왕국들이 점차 조직적이고 견고해져가면서 셰인 귀족들도 토지와 장원을 분봉 받으므로써 충성을 받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러한 제도는 앵글로 색슨의 고유의 방식이며 1066년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에 의해서 소멸되었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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