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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의 문을 연 학교는 평양의 숭실대였습니다.
숭실학당에서 출발한 숭실대학교는 1908년 대한제국 학부의 인가를 받았지만 1925년 4년제 문과만으로 편성된 숭실전문학교로 바뀌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바뀌는 등 당시 많은 학교가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일제가 1915년에 공포한 ‘전문학교규칙’에 따라 고등교육기관이 모두 전문학교로 개편됐기 때문입니다. 전문학교의 학과목도 모두 강제됐습니다.
총독부가 펴낸 교과서만을 사용해야 했고 성경·조선지리·조선역사 등의 과목도 빠졌습니다.
이는 조선 식민통치를 위한 일제의 정책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인의 대학교육 기회를 제한해 저항의식을 키울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법정에서 법관들을 꾸짖은 '평양판 박열' 김창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법관들을 꾸짖어 2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한국의 간디' 고당 조만식은 23살의 늦은 나이에 숭실학교에 입학한 뒤 물산장려운동의 중심인물이 됐습니다.
그는 일제의 지원병제도가 실시된 1943년, 협조를 구하는 사령관을 돌려보내고 극력 반대하다 구금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50년 인민군에 의해 피살됐습니다.
저항시를 쓰다 생체실험을 당한 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시인 윤동주와 국문학자인 양주동도 알고 보면 모두 숭실 출신이었습니다.
이들 이외에도 수많은 숭실인들이 조선의 해방을 부르짖었습니다.
이처럼 일제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고등교육을 받을수록 저항의식이 커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따라서 '전문학교 규칙'을 만들어 이를 막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당시 대부분의 대학이 이를 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숭실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1938년 '자진폐교'라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숭실대는 1954년 서울 상도동에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한번 굽히고 말지'라는 안일한 사고보다는 민족적 자존심과 신앙적 절개를 지키려 했던 국가 1호 대학 숭실대의 기백을 한번 생각해볼 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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