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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년 전 (2018/9/08) 게시물이에요
1000년 안목
앙겔로스와 발칸 정책




1000년 안목: 앙겔로스와 발칸정책 | 인스티즈




  1180년 마누일의 사망은 콤니노스 왕조(1081-1180)의 번영을 마무리하고 빠른 패망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상징적 전기로 간주되곤 했다. 현대 비잔티움학에 큰 발자국을 남긴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Georg Ostrogorsky)는 앙겔로스 왕조의 통치기를 "붕괴"(Collapse)라고 규정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대해 일목요연한 교과서적 저술을 남긴 찰스 브랜드(Charles Brand) 역시 그러한 인식을 강화하였을 뿐이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찰스 브랜드의 호니아티스 해석론을 충실하게 따라 이 시기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은 더 이상 단순히 사론의 내용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학자들은 제한된 사서의 제약 속에서도 저자의 사상과 의도, 그 가운데서 곡해되거나 변형된 사람들의 행적을 놀랍게도 상당수 복원해내며 심지어 완전히 어둠에 묻혀졌고 수동적으로 남아버린 집단으로서의 '인간'이 갖는 심리와 변화무쌍한 원리를 되짚어나가고 있다. 가장 유력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위험하기도 한 호니아티스의 연대기조차 그 텍스트가 완전히 해체되어 심지어 특정 문구가 어느 시점에 씌어졌는지까지도 분석이 되는 시점에서야 오죽할까. 국가가 멸망하여 혼란의 한 가운데 버려진 호니아티스가 어째서 그런 비통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절절하고 유려한 문체로 쓴 연대기 그 자체도 역시나 고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능히 알 수 있고, 마땅히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부분은 호니아티스의 관점만이 아니라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다 넓은 관점에서,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야 하는 곳이다.
  사료를 오늘날 검토하고 과거를 되짚어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국가의 쇠퇴를 변호하거나 통렬히 질책할 이유가 없다. 망국 직전의 관료로서 해명할 일도 없으며, 망명정부의 빈객이 되어 과거의 군주와 현재의 군주 사이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할 일 또한 없다. 말 그대로 변화무쌍한 흐름에 휩싸여가면서 지탱하고자 하는 앙겔로스 정부의 이미지만이 남게된다.






1000년 안목: 앙겔로스와 발칸정책 | 인스티즈




신화의 붕괴: 현실각성


  서설이 길다. 좋지 않은 글이지만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십분 양해를 부탁드린다. 이는 앙겔로스 왕조시대의 비잔티움 공공경영(Governance)이 다름 아닌 콤니노스 왕조의 시대정신과 다르지 않고 오히려 이를 재건 및 강화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역설하기 위한 도입부이다. 이 부분은 오랫동안 인정을 받지 못했다. 앙겔로스 시대에 들어서 급격하게 일어난 지방세력들과 번국제후들의 이탈. 이것은 안드로니코스 1세 이후 일어난 국제정치에서의 현격한 위신추락과 더불어 비잔티움의 체제에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는 강한 암시를 주었다. 하지만 앙겔로스 시대의 여러 조치들은 비잔티움의 쇠퇴를 반증할 수 없다. 오히려 조치들은 발칸 반도를 로마교회와 서유럽의 영향으로부터 완강하게 봉쇄하고 넓은 의미에서의 비잔티움 연방 안으로 공고하게 결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영역에서도 동일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번에는 발칸 문제에 한정해서 살펴보자.
  신화의 붕괴. 이 주제는 사실 이미 콤니노스 체제를 취급하면서 다루었던 부분이다. [마누일 치세기 친라틴 정책의 검토] 여기에서는 11세기까지의 로마국가를 지탱해왔던 군주-신하의 관계를 설명하는 우주신화적인 탁시스(Taxix)의 관념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설명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현상을 더욱 냉철하게 인식하며 현실적인 측면을 갖추어갈수록 더 이상 천명(天命), '천상의 질서'(Celestial Order)라는 지극히 상징적인 관념으로는 그 체제를 운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보다 현실적이고(practical), 실용적인(pragmatic) 이익과 이를 지탱하고 보증할 수 있는 관계들이 필요했다. 콤니노스 체제가 참으로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결코 발전의 단계로서 기각될 수 없는 부분이다. 주요 이해관계에서 충돌 가능성이 있는 여러 대가문들이 있다면 결혼으로 그들을 포섭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일단 그렇게 한 발짝 떼고나면, 똑같은 원리를 국제관계로도 확산시키는 것은 아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위에서 링크한 마누일 1세의 친라틴 정책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 부분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되었다. 알렉시오스가 일련의 결혼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국내정쟁의 불안을 없애버렸으되, 또 한편에서는 국내에 황제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사적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콤니노스 체제는 국내정치의 극한대립이 일어날 가능성을 줄였으나 대신 그 체제 자체가 사적집단들 사이의 관계망으로 전락할 위험을 가졌던 셈이다. 마누일 1세는 중요 실무직을 중심으로 서유럽 인물들을 대폭 기용하면서 그들과의 계약관계를 국가 내에 전폭적으로 도입하는 실험에 들어갔다. 또한 위협적인 사적집단들을 제어하고 탄압하여 사영화의 가능성을 일축시켰다. 대신 콤니노스 왕실이 집단통치체제의 핵심을 차지하고 일련의 내각을 이루어 공공성을 대폭 강화하는 왕권의 제도화(Crown Institutionalization)까지 추진했다. 이후 1453년에 이르기까지 국가경영의 기본적인 틀은 이 마누일 1세의 '제도화된 왕권' 시스템에 의하여 가동될 것이다. 
  다만 마누일 1세가 미완으로 마무리한 부분이 있다면 그런 상호교섭과 이해관계의 '네트워크'를 최소한 발칸지역 그리고 국내 지방세력에 대해서까지는 확산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헝가리 왕 벨라 3세는 마누일의 딸과 결혼했으나 알렉시오스 2세가 탄생한 이후에는 계승권 등의 문제로 인해 헝가리 왕이 되었을 뿐 비잔티움 중앙 엘리트 층에서 든든한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다. 세르비아의 대군주(Grand Zupan)인 스테판 네만쟈는 그저 황제의 신하에 불과했다. 지방의 호족들은 공공연하게 불만을 꿍얼거렸으나 마누일 시대에는 그나마 제법 유지되는 중앙-지방의 균형 그리고 중앙의 안정과 힘을 의식하여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안정'이 어느날 밤의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드로니코스 1세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허상은 깨졌다. 혼란에 빠진 콘스탄티노플과 중앙 엘리트 세계는 더 이상 상징적이든 현실적이든 지방 실력자들의 권위를 보증하지도, 이득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곧바로 전쟁을 일으키고 적극적으로 서유럽, 로마교황과 외교를 전개한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 현실은 냉혹해보였다.









예상 외의 견실함


  이사키오스 2세는 발칸에서의 난국 수습에 있어 적지 않은 몫을 했다. 가장 큰 위난이었던 불가리아 독립전쟁을 격파하지도 심지어 적절하게 저지하는데도 실패하면서 결국 자신의 몰락을 부추겼다는 한계가 역력했지만, 최소한 헝가리와 세르비아에 있어서는 실책 이상의 무엇인가를 남겼다. 이 시기 비잔티움 정부는 독일(신성로마제국)이 중부 이탈리아를 지나 남부 이탈리아까지 손을 뻗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 절박함은 불과 직전까지 혈투를 벌였던 시칠리아 노르만 왕국과의 결혼동맹 체결로 이어졌다.
  또한 이사키오스 본인은 헝가리 국왕 벨라 3세의 딸과 정략결혼을 추진, 기꺼이 헝가리와의 부마관계에 들어갔다. 이는 비잔티움의 오랜 전통으로 보건대 그 사례가 없는 경우였다. 하지만 유용한 관계가 될 국가원수에게 제국의 장인이라는 명예와 이익의 보증이 어디 있을까. 이 새로운 전통은 미래 비잔티움 군주들에게 많은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최초의 돌파구를 만들었다. (알렉시오스 2세가 최초의 사례지만 첫 경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일찍 비참하게 끝나버렸기에 제외한다) 이전까지 국가의 군주가 맞아들였던 신부는 국내정치를 고려하거나 혹은 동부의 아르메니아 번국에서 맞아들이는 정도가 전부였다. 비잔티움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유럽과의 외교정상화와 혈연결속이 절실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또한 세르비아 대군주인 네만쟈의 둘째 아들은 이사키오스의 형인 알렉시오스의 딸과 결혼했다. 중앙정치계의 친족집단 내부의 서열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지역군주들로서도 저버릴 수 없는 제안이다. 급기야 둘째 아들인 슈테판은 장남인 부칸(Vukan)을 제치고 세르비아 대권의 후보로까지 뛰어올랐다. 네만쟈는 결국 1196년 초, 아들의 장인인 알렉시오스 3세가 대권을 장악한 지 11개월 만에 대공의 자리를 차남 슈테판에게 물려주고 퇴임한다. 불가리아가 연일 비잔티움 각지를 불바다로 만들며 위신을 잿더미로 만들고 있었어도 실용적인 이해관계는 굳건했다.
  국내의 호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연구에 따르면 알렉시오스 3세가 군주(Sebastokrator)의 품계를 닥치는 대로 저렴한 값에 지방호족이나 외국 군주들을 대상으로 제공했던 조치 역시, 콤니노스 체제가 중앙 엘리트집단이나 소수 강대국 왕실에 그쳤던 그 네트워크의 외연을 한층 더 광대한 범주로 확대시키는, 앙겔로스 정부의 의도에서 이루어졌다고 판단된다. 심지어 이들은 원로원에도 참가할 수 있는 상징적 힘을 받았을 터이니 더욱 더 남침하는 불가리아를 상대로 저항할 동기를 얻은 셈이다. 이 모든 조치들은 오직 반비잔티움의 기치를 불태우는 불가리아-쿠만족을 상대로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이를 통해 내부결속을 다진 비잔티움 사회는 불가리아의 군사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전혀 물러설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알렉시오스 3세가 최후의 한 수로 갈리치아의 러시아 군대를 포섭하여 쿠만족을 치게 하고, 자신은 대규모 군세로 불가리아와 내통하는 반란군을 진압하여 불가리아-쿠만의 손발을 묶어버린다. 마침내 군사적 수단이 부족함에도 평화조약을 먼저 내밀도록 강자를 옭아매는데 성공하였다. 누가 이런 모습을 보고도 앙겔로스 국가경영의 어리석음을 논할 수 있는가?






1000년 안목: 앙겔로스와 발칸정책 | 인스티즈



현실로 내려온 상상의 군주


  이사키오스 2세의 단계에서 본격화되는 현실주의적 비잔티움 경영은 알렉시오스 3세의 단계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알렉시오스는 이전의 황제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스스럼없음을 한층 더 강하게 보유했다. 위기를 넘길 수 있다면 수용 가능한 내에서 굴욕을 충분히 받아들였다. 하인리히 6세의 독일이 즉위 직후의 자신을 위협하자 그는 기꺼이 배상금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의 불협화음을 자신이 고스란히 받아냈다. 지방의 불안한 민심을 위무하기 위해 직접 순행을 나갔고 반란을 일으킨 도시와 촌락에 자신이 직접 나아가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호족들은 진압되거나 회유되었고 외국과의 계속되는 교섭을 추진했다.
  안드로니코스가 가속화시킨 탁시스 세계질서의 붕괴는 이 시기에 이르러 완벽한 네트워크 정치로 결실을 낳았다.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3세는 그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가톨릭화를 저지했다. 1202년에 슈테판 대공은 형 부칸에 의해 패배하고 쫓겨났으나 곧 가톨릭에 대한 의심을 품은 세르비아 시민들에 의해 1204년, 자리로 복귀한다. 불가리아는 한동안 가톨릭 귀의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했지만 결국 1235년, 니케아 교회와 다시 화해하고 로마교회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발칸의 정치생태계는 비잔티움의 광범위한 엘리트 네트워크 울타리 속에서 유지되었고 그 원리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것도 군사적인 실력도 거의 없는 최후의 200년 시기에!


  앙겔로스 왕조의 발칸정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이전과 달리 비잔티움의 무능력과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개편의 완수과정을 상징하는 결정적인 조각이다. 그리고 이는 앙겔로스 정권이 다른 방면에서 행동으로 옮긴 조치들과도 하나의 통일된 맥락을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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