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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651 출처
이 글은 7년 전 (2018/9/25) 게시물이에요






 참을 수 없는 슬픔 | 인스티즈

황수아, 한 그릇

 

 

 

한 사람을 등지고 돌아온 날

노곤한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놓는다

부엌에 그림자처럼 스며들어 뒤주를 연다

오래 묵은 글자들을 한 바가지 퍼올리고

꼬들꼬들 헹궈내어 밥을 안친다

행간은 따로 잘라 칼집을 내고

뜯어 온 문장에 또르르 말아

김 오른 찜통에 넣어놓는다

 

작별의 시간이 저무는 시간

오래도록 닫혀 있던 밤의 창문을 연다

안개의 분말을 눈물과 섞어

오래도록 찰지게 반죽을 하고

지나온 시간만큼 발효시킨 뒤

예열한 달빛 아래 얹어놓는다

 

엉겨 있는 별빛을 한 숟갈 넣어

조물조물 손맛 더해 무쳐 내놓고

한때의 웃음을 얇게 저미어

탁탁탁 날선 칼 가는 채 썰어

종지그릇에 보기 좋게 담아놓는다

 

한 사람을 등지고 먼 꿈길 걸어온 날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마음에

시 한 그릇 푸짐하게 지어 올린다






 참을 수 없는 슬픔 | 인스티즈


송계헌, 푸른 눈썹

 

 

 

눈썹 아래 푸른 숲을 가꾸면 어떨까

산사나무 둥근 열매와

보랏빛 현호색 향기 가득 채운다면

내 안의 얼룩들로 자주 꿈틀거리는 눈썹

바람만 스쳐도 붉히고 마는 눈시울

우레처럼 놀라 꼬리가 지워지고

눈썹도 하 세월을 견디기 어려웠을 테니

세상의 흙먼지를, 빗 낱을

받아내기 힘들었을 테니

바람 불 때마다 신음소리 새어나고

조각달에 한 올씩 눈썹 빠뜨리는

저문 날들 속에서

 

눈썹 아래

푸른 하늘과 바다를 글썽이면 어떨까

순한 새들, 물고기들 출렁인다면

 

세상의 등짐 실은 화물선 한 척

눈물바다로 넌즈시 통과할 터이니






 참을 수 없는 슬픔 | 인스티즈


이성복,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힌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참을 수 없는 슬픔 | 인스티즈


정호승, 나무에 대하여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슬픔 | 인스티즈

박남준, 참을 수 없는 슬픔

 

 

 

눈물처럼 등꽃이 매달려 있다

모든 생애를 통하여 온몸을 비틀어 죄고

칭칭 휘어 감어 오르지 않으면

몸부림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슬픔의 무게로

다만, 등나무는 등꽃을 내다는 게다

그것이 절망이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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