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자의(697~781)는 곽영공이라고도 불리는 당나라의 명장입니다. 구당서에 기록되기를 6척의 키에(신당서에서는 7척) 체모가 빼어났다고 합니다.
곽자의는 처음에는 별로 눈에 뜨이지는 않았지만, 안사의 난이라는 커다란 변이 일어나게 되자 상황이 달라집니다.
안록산의 난을 일으킬당시, 안록산은 3개의 절도사직을 겸하며, 10개 절도사의 총병력인 44만 6900명 중 약 38%인 18만 3900명을 통솔할 수 있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돌궐과 거란, 발해에서 항복한 병사등 여러 이민족 병사들까지 손아귀에 두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방해물이라면 압도적인 정치력과 카리스마로 정국을 주도하던 그야말로 스페셜한 간신 이임보의 공포스러움 때문이었는데, 이임보가 죽자 능력은 그에게 미치지 못하면서 욕심만 많은 양국충이 전권을 잡자 안록산이 두려워할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755년 겨울, 거란과 발해 항복병들의 기마군을 앞세운 안록산의 15만대군은 남하를 개시, 태수 안진경이 지키는 평원을 제외하고 하북 전지역이 동시에 안록산에게 항복합니다.
이임보가 얼마나 완벽하게 지배를 했는지, 난이 발발헀다는 급보는 계속 전해 졌지만 당나라의 현종은 전혀 믿질 않습니다. 기껏해야 안록산이 정신이 나간것이니 부하들이 알아서 진압할 수 있으리라 여겼죠. 안록산의 난이 벌어진건 11월 10일이지만 정확한 소식이 온건 5일이나 지난 11월 15일이었고 이때서야 조정에선 비상이 납니다.
이미 그 시기 안록산은 하북은 물론이고 진류, 형양 등 중원까지 모조리 휩쓸고 있었습니다. 이때 안록산 본인은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진군하고, 부하 사사명은 태원, 즉 북경 방면으로 군대를 이끌고 양동작전을 벌입니다. 낙양과 태원의 두 대도시를 함락시키면, 황제가 있는 장안을 함락시키는건 간단하다 여긴것이죠.
당나라 조정에서 동원할수 있는 병력은 5만명 남짓밖에 안됬습니다. 그나마도 마구 불러모았기에 최정예인 안록산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차이의 전력차이었죠. 장군 봉상청은 이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달려가고, 고선지는 환관 변령성등과 함께 뒤를 이어 동쪽으로 진군합니다.

고선지
봉상청은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데, 긁어모은 5만과 국경에서 구르던 최정예병 15만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싸우고 패배하면 다시 모아서 싸우고, 패배하면 다시 모아서 싸우고, 성이 함락당하자 시가전을 벌이며 싸우는등 버티다가 결국 후퇴하고 고선지와 합류합니다.
봉상청과 고선지는 이미 상황이 글렀다는걸 깨닫고, 일단 물러나서 동관에 집결하고 동관을 요새화합니다. 이곳을 지키면 장안이 안전하기 때문이죠. 실제로 안록산군이 동관을 공격하지만 고선지는 이를 격퇴해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실책이 벌어지니, 같이 온 환관 변령성이 이를 시기해 조정에 고선지와 봉상청이 낙양을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고 자기들 독단으로 물러났다고 말합니다. 조정에선 고선지와 봉상청을 처형하라고 하고, 봉상청은 죽기 직전까지도 "적의 세력이 강하니 주의해야 한다" 고 충심으로 진언하고, 고선지는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억울하다고 외쳐달라" 고 말하자 모든 병사들이 주저 앉아 억울하다! 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에 후임으로 가서한이 와서 방어하게 됩니다. 가서한은 동관을 잘 지켰으나, 간신 양국충은 가서한과 사이가 좋지 않아 두려워해 그에게 동관을 나서서 적과 회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미 고선지등이 숙청당하는걸 가서한은 어쩔수없이 나가 싸우고, 말 그대로 대망하며 동관은 함락당합니다. 변령성은 이때 안록산에게 항복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장안은 함락당하고 황제 일행은 도망가게 되죠.

이런 느낌?(죄송합니다...)
이때 다른 문제는 태원 방면으로 간 사사명의 군대였는데, 구원태수이던 곽자의가 삭방절도사가 되어 상대하게 됩니다. 이때 사사명의 병력은 결코 적지가 않았는데, 동관은 핵심적인 지역이긴 하나 함락시키기는 어렵고, 반면에 태원 방면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뚫을 수 있으니 재빨리 뚫는다면 안록산 입장에서도 나쁠것이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사사명의 부담을 덜어줄겸 대동군사 고수암을 진무군 부근까지 진군시키는데, 이때 곽자의는 순식간에 이를 격파하여 드디어 당나라쪽은 제대로 된 승리를 거두어 봅니다. 오히려 곽자의는 정변군까지 진격하게 되는데, 대동병마사 설충의가 이를 탈환하러 싸움을 걸자 말 그대로 대파하고 기병 7천을 땅에 뭍어버립니다.
이렇게 되자 여유가 생긴 당나라는 태원을 재확보하게 되고 거기에 호응해 하북의 17개군이 안록산에 대항해 들고 일어나 사사명은 태원으로 공격할 루트가 사라져버립니다. 이 태원은 전란이 끝날때까지 결코 함락당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곽자의가 거둔 서전에서의 승리가 의미가 있었다는 이야기겠죠. 그 공으로 곽자의는 조정에서 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됩니다.
이때 17개군의 반란(은 아니네요. 안록산에게 대항한것이니)주도한 안고경은 태원윤 왕승엽이 흐물흐물하며 협조를 하지 않자 결국 사사명에게 진압당해 낙양으로 잡혀가 안록산에게 처형당합니다. 이때쯤 조정에선 황당한 요구를 곽자의에게 하게 되는데, 두개를 둘로 나눠서 동경, 즉 낙양을 다시 재탈환하고 좋은 장군 하나를 뽑아 하북을 재탈환하라는 요구를 합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하북에는 안록산과 사사명의 대군을 비롯한 안록산군이 우글우글 하고 있고 (-_-)
이때 곽자의가 선택한 사람이 이광필입니다. 곽자의를 광영공이라 존칭한다면, 이광필은 이사공이라 존칭하는 명장이었죠.

이광필
곽자의는 이광필을 믿고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 1만명의 군사를 때어주었고, 이광필은 과연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사사명의 군대를 격파합니다. 그후 곽자의와 다시 합류해 사사명군과 구문성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여 격파하였고, 이어 사하에서 전투를 벌여 사사명을 또다시 무너뜨립니다.
안록산은 이쯤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곽자의를 막아내기 위해 2만이나 되는군을 사사명에게 지원합니다. 다시 한번 제대로 싸워보려는 것이었는데, 가산에서 양군은 전투를 벌여 사사명은 또다시 무너집니다. 야전에서 곽자의는 거의 무적이었습니다. 이제 안록산군이 태원을 함락시키는 건 꿈같은 이야기가 되었죠.
이때쯤 항복하지 않았던 평원태수 안진경은 곽자의가 하북을 나온것을 신호로 하북 수복에 나섰고, 애시당초 가지고 있는 병력은 죄다 끌어모아 동관 등에 보냈던 지라 쉽게쉽게 승리할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안록산군은 낙양 일대에 고립되어있는 상황이라 반란의 진압은 어렵지가 않았죠.
그런데 이 타이밍에 위에서 말한 사건이 생겨 가서한이 군대를 끌고 나서서 안록산에게 대패합니다....이후 장안은 순식간에 함락당합니다.
황제는 당연히 도망을 쳤지만 애초에 준비도 전혀 안되었기에 행군도 느렸고, 먹을것도 없고 해서 병사들의 불만이 극에 달합니다. 결국 "이게 다 양국충 때문이다" 라는 여론에 양국충은 살해당했고, 양씨 일가는 전부 때려잡아야지 하여 양귀비 역시 참살당합니다.

죽는 양귀비와 슬퍼하는 당현종
이때쯤 당나라 조정은 거의 모든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기껏 다시 당나라에 되돌아가려고 마음 먹었던 세력들이 죄다 다시 안록산에게 붙어 먹습니다. 안록산이 재빨리 이를 추격하고 황제를 잡고, 조정을 장악했다면 게임이 끝날을 수도 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안록산은 한참동안 뭉그적 거리다가 장안에 도착해서는 '주색잡기' 에 빠져 정신줄을 놓습니다 -_- 하북은 말할것도 없고 어렵게 손에 넣은 관중마저도 완전히 장악이 안되 군심과 민심이 어수선하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때 당현종은 이대로 험한 촉지방에 들어가면 안전할수 있을지는 몰라도 당나라는 끝이라고 생각하고, 태자에게 분조, 즉 임시 정부를 구성하게 해 보내고 자신은 촉으로 들어갑니다. 예. 임진왜란 떄 광해군이 헀던 그거죠. 이에 이광필과 곽자의가 합류해서 태자의 권위를 세워줍니다.
이후 태자는 숙종으로 즉위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대립할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현종은 양귀비도 죽고 사는 맛이 없어진지라 무덤덤하게 받아들입니다. 태상황이 된것을 인정하였고, 이때 숙종과 현종은 남아있는 양씨 세력을 정리합니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던 명분은 "악신 양국충을 제거해서 당나라가 잘살아보세" 같은 식이었지만 이제 양씨 세력은 전부 없어졌고, 안록산은 좋다고 황제까지 되어버린 지라 아무런 대의명분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나라에 상황이 낙관적인것은 아니어서, 새로 새워진 조정은 분위기도 뒤숭숭했고, 곽자의와 이광필이 돌아갈수밖에 없어서 사사명군은 궤멸 위기에서 살아남습니다. 두명의 명장이 물러나가면서 숨통이 트은 사사명은 다시 한번 태원을 함락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평원태수 안진경과 싸워 다시 하북을 손에 넣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숙종은 일단 이광필에게 5천의 병력을 주어 이를 막게 합니다.
그 후 방관이라는 자가 자기는 두개의 대도시를 수복할 수 있다고 하자 총사령관을 방관으로 삼고 양희문, 유귀철, 이광진에게 군사를 주어 반격을 하게 하나.....이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유세객으로 말은 잘하지만 군사적인 능력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간단하게 무너집니다.
이광필은 사사명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었고, 또 이시기에 곽자의는 안록산 휘하 돌궐군을 이끄는 아사나종례를 물리치는 공을 세우나 대반격을 위해서는 병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쓰여진게 된것이 황제천가한, 즉 천하의 칸 중의 칸의 이름입니다.

일찍이 당태종 이세민이 돌궐과 토욕혼을 정벌하고 난뒤, 그들로부터 천가한의 이름을 받습니다. 유목민족이 아닌 중국 왕조로 이 정도의 유목민족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나라도 없었지요. 이 천가한의 이름에 거기에 전부터 이뤄진 협상등으로, 수 많은 이민족 군대들을 끌어모읍니다.
삭방, 안서, 회흘, 남만, 대식 등이 바로 그들인데, 이 중에서 회흘은 당나라의 골치거리였던 위구르 제국을 말함인데 이들관련에서는 복고회은이라는 인물이 크게 활약합니다. 대식은...아랍 국가들입니다. 이렇게 된 병력이 15만에서 20만이고 거기에 당 조정에서도 거리에 늙은이들밖에 없을 정도로 병력을 다닥다닥 긁어모읍니다. 이렇게 되자 당 조정의 군대는 수많은 인종과 수십개의 나라의 사람들이 섞인 재미있는 모양새가 됩니다.
물론 이는 돌궐, 거란, 항복한 발해인, 당나라인들이 섞인 안록산 군 여기 마찬가지였구요. 이때 발해 성왕의 천도가 안사의 난 때문이라는 추측을 좀 더 깊게 받아들여 보면 안사의 난이 거의 아시아의 세계대전 급의 일이었다는 생각도 드네요.
문제는 이렇게 하면 국방의 위협이 약해진다는 것이고, 가장 큰 적은 토번, 즉 티베트 였습니다. 일찍이 토번의 대명장 가르친링이 당나라 군대를 완전히 굴복시킨 이후로, "서융이 세력이 그토록 강성했던 적이 없다' 라는 기록도 있듯이 정말 위험한 상대였는데 숙종은 결단을 내립니다. 바로 토번에 조공을 바치는 것입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자손심을 챙길수가 있으니, 조공을 받침으로서 국경의 위협은 줄어듭니다. 이제 싸우는 일만 남았는데, 당연히 이 군대를 이끄는 자는 곽자의였구요.
이때 안록산은 시력도 안 좋고 몸도 이상해서 반쯤 정신이 나갔는데, 거기에 또 난리가 터져 장남 안경서에게 살해당합니다. 완전히 개판인 상황인데 안록산도 유능하다고 보긴 힘들었지만 안경서는 더욱더 무능했습니다. 더구나 하북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사명에게는 안록산이면 몰라도 안경서에게 충성을 바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죠. 곽자의는 대군을 이끌고 안경서와 회전을 벌이고 10만의 대군을 격파합니다. 거기에 민심까지 당나라 쪽으로 완전히 돌아선 상황이었고, 안경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15만 대군을 바락바락 모아서 대들어보지만 곽자의는 이또한 격파하고 낙양을 수복해는 일대 전환을 맡이하게 됩니다.
안경서는 그러자 사사명에게 도망을 치지만, 분수를 모르고 사사명을 죽이고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다가 사사명은 이에 대항합니다. 이제 난의 주체가 안록산이 아닌 사사명이 된것이죠. 이광필은 이때까지 끝까지 태원을 넘겨주지 않으면서 철저 항전하고 있었습니다.
사사명은 상황이 이쯤되자 난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10만의 군사와 함께 당나라에 귀순합니다. 사실상 여기서 안사의 난은 종결된 셈인데, 조정에선 그러자 마음이 풀어져 안경서를 완전히 끝장내는대신 논공행상이나 하면서 한가롭게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귀순한 사사명은 여러차례의 암살 시도를 받게 되고, 분개한 사사명은 이에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킵니다.

곽자의, 이광필등에 의해 업성까지 쫒긴 안경서는 멸망 직전이었지만, 바로 이 사사명이 이끈 15만 대군에 의해서 극적으로 구조가 되고 분노의 힘인지 당나라 군대를 격파합니다. 이광필이 패배하자 곽자의가 금방 달려오지만 사사명은 곽자의까지 밀어붙칩니다.
이 과정에서 당나라군의 병력은 또다시 먼지로 사라지고, 사사명은 안록산과 난을 일으키면서 얻은 깨달음으로 후방의 세력을 남겨두지 않고 모든 곳의 군대를 전부 격파하는 동시에 자신은 황제 자리에 오릅니다. 얼마나 그 기세가 막강했는지 이광필은 아예 낙양을 지키는것을 포기하고 물러나고 낙양은 다시 사사명 손에 떨어집니다. 종결 직전까지 되었던 반란이 이렇게.....
이제 다시 한번 천하는 개판이 되고, 사사명 외에도 여기저기 봉기하는 다른 세력들까지 있고, 숙종과 현종은 알듯 모를듯 눈치 싸움을 벌이고, 이전에 벌어진 논공행상에서 상을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반란에 가담하고....토번? 처음에는 조공을 먹고 가만히 있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 슬슬 움직여도 되겠다 싶어 군사적인 행동까지 취합니다.
이 난장판 속에 당나라는 정말 남은 군사를 싹싹 긁어모아서 이광필에게 낙양 탈환을 요구합니다. 이광필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말헀지만 복고회은과 마찰끝에 결국 싸우러 나서고, 전쟁터에서도 복고회은과 마찰을 빚는틈을 타 사사명군은 이를 격파해버립니다.
사사명군은 이제 완전히 기세를 타서 장안을 함락시키려고 나서지만 장안에서는 필사적으로 방어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사명의 (또)장남인 사조의가 아버지를 죽이는(....) 일이 발생하면서 다시 사태는 또 이상야릇하게....
안록산이 죽은 뒤의 사사명도 그랬지만, 사사명에 가담한 여러 사람들은 사사명엔 충성하지만 애송이에 불과한 사조의에 충성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력들은 급속도로 떨어져 나가고, ...그런데 이때 당나라 역시 상황이 좋지 못헀던게 난국속에서도 그래도 꿋꿋하게 구심점이 되어주던 태상황 당현종과 당숙종이 동시에 급살맞듯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당대종이 황제가 되나 양측 모두 몹시 난감한 상황이었죠.
이때 천청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지는데, 회흘, 즉 위구르 제국이 무려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로 공격해오는 것입니다.

서기 820년경의 위구르 제국의 영토
이 군대는 바로 사조의의 집요한 선동에 이끌린 군대였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당나라는 어쩔줄을 몰랐고, 이때 황제인 대종은 복고회은을 불러 상황에 따라 무슨 수를 써도 되는 철권을 주고 위구르 제국을 막으라고 합니다. 위구르 제국의 군대와 마주한 복고회은은 영웅적인 용기와 설득으로, 자기 딸까지 바치면서 회흘을 설득하는데 성공합니다. 이제 10만의 대군은 오히려 당나라의 편이 됩니다.
거기에 당나라가 회흘에 내놓은 조건도 파격적이었는데, 낙양 일대에서의 약탈을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입니다. 곽자의가 이끄는 삭방군과 합류한 회흘군은 곧바로 몰려들어가 낙양을 함락시키고 그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고 즐겁게 놀았으며, 사조의는 도망치는데 성공했으나 이미 대세는 글렀다고 생각하여 급속도로 이탈하는 세력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 자결합니다. 드디어 이 대전이 끝이 난것입니다.
이 대전을 제압하는데 공을 세운 세명 중에 한명인 이광필은 난이 끝난 후 조정을 장악한 환관 정원진에게 집요한 견제를 받다 병사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공신인 복고회은은 자기 친족이 50명이 죽어나갈 정도의 아픔속에도 온갖 영웅적인 일을 해왔지만, 난이 종료된후 암살 위협을 받자 너무나 분개하여 토번군 10만과 연합하여 당나라에 쳐들어왔지만 곽자의에게 진압당합니다.
곽자의는 안사의 난에서 나라를 구해낸 것이 이어서, 토번 20만이 쳐들어오자 지켜내지 못하고 장안성을 내줬지만 당시 장안성의 병력은 고작 4천으로 고금의 어느 명장이 있어도 지켜낼수가 없었습니다. 후에 토번이 10만 대군으로 다시 공격해오자 6만명을 몰살시키는 대공을 세웠으며, 복고회은 10만 대군으로 공격해왔을떄도 이를 물리쳐서 나라를 구해냈습니다.
이렇게 곽자의의 권세는 그 공으로 분양왕에 임명되고 엄청나게 높아졌지만 그는 공을 자랑하진 않았습니다.
당나라의 대종은 자신의 딸인 승평공주(昇平公主)를 곽자의의 아들 곽애(郭曖)에게 시집 보내게 됩니다. 숭평공주는 황족으로 왈가닥이 심해서, 어느날 곽자의의 집에 잔치가 있어 모든 사람들이 모였는데 오직 숭평공주만 놀러가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곽애는 몹시 기분이 상했죠.
결국 둘은 그날밤 부부 싸움을 심하게 했는데 여기서 숭평공주가 "당신 내 아버지가 대당제국의 황제인데 이렇게 굴거야" 라는 식의 말을 하자 대노한 곽애가 "아버지가 천자라고 해서 너무 우쭐대지 마시오! 우리 아버님은 마음만 먹었으면 천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깟 천자자리, 줘도 안가지시는 분이오!'라고 말하였습니다. 홧김에 말한것이긴 하지만 대역죄에 해당해도 할말 없을 실언이었죠.
숭평공주는 대종에게 이를 일러바쳤는데 대종은 그저 "네 남편 말이 맞다" 하고 돌려보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곽자의는 기겁해서 아들을 데리고 황제에게 가 사죄했는데 이때 대종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속담에 '바보가 아니고 귀머거리가 아니면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소(諺之, 癡聾, 作翁). 아녀자들이 규방에서 하는 말에 신경 쓸 것 있겠소!" >
용서을 받은 곽자의는 이번엔 아들을 요절을 내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으나 이번에는 숭평공주가 놀라서 빌고 사죄하여 그것은 그만두었습니다. 여기서 비롯된 말이 '귀머거리인 척, 벙어리인 척하다'라는 장롱작아 [裝聾作啞]의 고사이죠. 아무튼 그만큼 곽자의의 공훈은 막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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