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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323 출처
이 글은 7년 전 (2018/10/23) 게시물이에요







 예의를 지킬 때가 되었다 | 인스티즈


최재경, 무지 심심한 날

 

 

 

비 오는 날이고요

똑딱 벌레 한 마리가

방바닥을 기어가지요

뒤집어 놓으면

똑하고 튕겨 오르고

딱하고 떨어지지요

재미나서 자꾸 하지만

똑딱이는 환장하지요

무지 심심한 날

이 비

그칠 비는 아니고요







 예의를 지킬 때가 되었다 | 인스티즈


최영철, 흐르는 물

 

 

 

한여름 개울이 내는 시원한 물 소리

모난 돌 스치고 가느라 긁힌

물의 상처들이 내는 아우성이었네

아프다 아프다 내지르고 가는 물 소리

내 미지근한 속이 다 서늘해졌네

한차례 비 뿌린 뒤

더 맑고 시원해진 노래

그 가슴팍에 발 담궜네

 

확성기 달고 골목 누비는

행상 아주머니 외침

칼잠 깨 듣고 있자니

굽이굽이 막다른 골목

세파의 굴곡을 타고 흐르다 여기까지 와서

순하고 구성진 한 자락 노래가 되었네

 

너무 평탄해서 흐를 수 없는

나 썩은 물

당기고 밀어주는

울퉁불퉁한 굴곡을 만나러 가네







 예의를 지킬 때가 되었다 | 인스티즈


배한봉, 푸른 힘이 은유의 길을 만든다

 

 

 

바람 불고 잎들이

뒤척거린다

그 아래 잎들의 신음이 쌓여

그림자가 얼룩지고 있다

산책 나온 아침, 눈이 동그래진다

 

나뭇잎에 허공 길이 뚫리고

거기 헛발 디딘 햇빛

금싸라기를 쏟아 세상이 다 환해진다

아 나뭇잎 허공

벌레먹은 이 자리가

우화(羽化)를 기다리는 은유의 길이라니

허공에 빠진 내 생각 뜯어먹으며

또 살찐 벌레 한 마리 지나간다







 예의를 지킬 때가 되었다 | 인스티즈


권정일, 검정 구두

 

 

 

이제 너에 대한 예의를 지킬 때가 되었다

너는 나를 끌고

내 행선지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

수상한 데를 둘러볼 때나

깡통을 걷어찰 때나

음악을 맞춰 까닥까닥 흥겨울 때도

노련하게 내 표정에 밑줄을 그어주었다

까치발을 세우고 남자를 훔쳐 볼 때도

가지런히 뒤꿈치 모으고 내숭을 떨 때도

반짝반짝 나를 빛나게 해 주었다

철없는 발자국에도 눈이 있다고

너는 나보다 먼저 젖었고 먼저 똥을 밟았고

먼저 달려가 악수를 했고 먼저 집에 데려다 주었다

너는 나보다 나중에 밥을 먹었고 나중에 잠을 잤고

뜬 눈으로 밤을 새기도 했다

너는 표정 없는 나를 터벅터벅 읽어내기로 했고

그래, 살다보면 높은 벽도, 깊은 수렁도 만나는 거야

그렇다고 기죽지 말라고

내 과거를 편집해 아침마다 페이지를 넘겨주었다

나를 깁듯 너를 기워 노쇠한 너를 따라 다녔다

이제 나는 너에게 예의를 갖추려고 한다

무거웠던 나의 아픔을 털어내고

나를 내려놓으라고 이른 아침

평생 한 번 빛()나는 화장을 해 주었다

 

수거함 앞에 정중히 내다 놓았다







 예의를 지킬 때가 되었다 | 인스티즈


천상병, 갈대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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