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원짜리 커플링.
노래를 작사하게 된 계기와 작사가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잘 알겠다. 정말 사랑하는 연인이 정말 돈이 없어서 만원짜리 커플링을 주고받으며 눈물을 훔치는 장면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나도 스무살 초반에 애인과 내 수중의 돈을 다 합쳐도 이천원이 안되는데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야겠어서 이디야에 가서 가장 싼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몇 시간을 손 붙잡고 속닥거린 기억이 있다. 그 시간에 나는 정말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그 아름답던 기억이 뒤틀린 것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 때부터였다. 나를 만나면 이게 전재산이라며 천원을 꺼내보여주지만 함께 있지 않을 땐 게임 스킨을 몇개씩 사고 밤새 친구들과 술을 먹고 다니던 그 사람. 일주일 간 여행을 가자고 조르더니 여행 첫 날 서로 가져오기로 한 돈은 온데간데 없이 10만원을 꺼내 보여주던 그 사람. 나 혼자 가져온 돈으로 일주일을 버티느라 부산까지 가서 김밥천국에 들어가 표정을 굳히고 있었더니 본인이 더 기분나빠하던 그 사람. 이 사람은 사실 나한테 돈을 못 쓰는게 아니라 안 쓰는거 아닐까. 그게 맞다면 그 사실에 기분나빠하면 나는 속물이 되는걸까.
속물? 돈 문제로 기분 나빠하면 속물인가. 돈 문제로 사랑이 식으면 속물인가. 어쨌든 저 사람이 날 좋아하는 마음만 진심이면 나보다 다른 곳에 돈을 더 쓰고 싶어하는 걸로 내가 기분상하면 안 되는거 아닐까... 물론 지금은 그게 그 마음조차 진심이 아니라는 지표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걸 안다. 돈이 없어서 연애하는 데에 드는 돈이 부담스럽다는 것과 돈이 아까워서 얘한테 드는 돈을 한푼이라도 아껴보려는 것의 간극은 매우 크다. 후자가 바로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는 '연애에 있어서 가성비를 따지는 행태'라고 생각한다. 그걸 몰랐던 나는 결국 다른 문제로 헤어지게 될 때까지 이런 생각을 애써 피하려 했고 이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 미안하게 생각했다.
또 한 번은 이런 연애를 한 적이 있었다. 상대는 돈을 전혀 벌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런데 우리는 만나야 했으니까 만나면 내가 돈을 대부분 써야 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돈을 아끼느라 돈이 없는 척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사람은 나를 정말 소중히 여겼고 자신의 상황때문에 내가 돈을 쓰는걸 항상 너무 미안해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상황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 나를 위해주고 성의를 보인건 사실이다. 그 마음을 알아서 나도 우리가 함께 있을 때에 쓰는 돈을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나도 얼마 안 되는 알바비를 모아 생활비를 써야했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담스러운건 사실이었다. 놀이동산이라도 한번 가고 싶으면 자연스럽게 2명 치의 입장료가 얼마인지 계산해야 하는 상황에 슬그머니 짜증이 치솟았고 주5일 8시간씩 알바를 하느라 힘들어진 몸은 마음까지 식게 만들었다. 애틋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만나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사람이 머쓱하게 웃으며 문구점에서 사온 커플링을 내밀었던 날 나는 결국 서러움에 펑펑 울면서 이별을 말했다.
그보다 나이를 조금 더 먹은 지금 내가 원하는 연애의 상은 그 때와 많이 다르다. 나는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있고 최고의 선물만 주고 싶은 만큼 상대에게 받길 기대하는 정도가 있다. 내가 상대가 원하는 연애 상대가 아니면 그 사람이 굳이 나와 연애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연애의 그림을 함께 그리기 힘든 사람과 내가 연애를 해야 할 의무는 없다. 미안하지만 상대가 내가 원하는 연애를 할 금전적 상황이 안 되고, 다른 매력이 그걸 상쇄하지 못하면 나는 마음을 빠르게 정리한다. 내가 결국 돈으로 사랑을 판단하는 속물이라고 해도 얼굴에 큰 뾰루지 하나만 나도, 살이 쪄도, 맞춤법 하나만 틀려도 어질 수 있는게 사람 마음이라는데 그 기준이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잖아. 내 기준을 욕할거면 외모로 남에게 쉽게 반하는 사람들도 욕해야 하는거잖아. 물질적인것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는게 외모를 기준으로 삼는 것보다 더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뭐지.
십 여 년간 한국에는 신화가 유령처럼 떠다녔다. 어떤 선물을 받건 감동하며 감사해야 참사랑을 하는 개념녀고 선물이 마음에 안 든다고 기분나빠하면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 남자의 진심을 몰라주는 년. 모두가 원하는 연애의 상은 다르고 상대가 함께 그런 연애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이면 그건 충분히 이별 사유가 될 수 있다. '내가 만원짜리 커플링에 감동받아 울어야 개념녀가 되는 걸까?'라는 질문은 이런 맥락에서 가능하다. 당신은 만원짜리 커플링에 감동할 수도 있지만 정이 떨어질 수도 있다. 당신은 상대가 나를 이 정도 선물로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여자로 취급했다고 여기면 기분나빠할 수도 있다. 어떤 선물에건 감동받는 것은 당신의 의무가 아니다. 당신은 만원짜리 커플링에 감동받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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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개잘생김 이번에도 개잘생기게 나오나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