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크나큰 잠 한 자리 본 것처럼깜빡 한 여기를 놓으며신호등 앞에 선 목이 꽃대궁처럼 꺾일 때사르르 눈꺼풀이 읽던 행간을 다시 읽을 때봄을 놓고 가을을 놓고 저녁마저 놓은 채갓 구운 빵의 벼랑으로 뛰어들곤 해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사과 냄새 따스한소파의 속살 혹은 호밀빵의 향기출구처럼 다른 계절과 다른 바람과 노래매일 아침 길에서 길을 들어설 때매일 저녁 사랑에서 사랑을 떠나보낼 때하품도 없이 썰물 지듯깜빡깜빡 빠져나가는 늘 오늘깜빡 한 소식처럼한 지금을 깜빡 놓을 때마다한입씩 베어먹는 저 큰 잠을 향해얼마나 자주 둥근 입술을 벌리고만 싶은가벼락치듯 덮치는 잠이 삶을 살게 하나니부드러워라 두 입술이 불고 있는 아침의 기적영혼의 발끝까지 들어올리는 달콤한 숨결내겐 늘 한밤이 있으니한밤에는 저리 푹신한 늘 오늘이 있으니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곽재구,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숨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권혁웅, 파문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나희덕, 뿌리에게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나를 뚫고 오르렴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 접고 더 넓게 뻗으면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