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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296 출처
이 글은 7년 전 (2018/11/28) 게시물이에요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인스티즈

정끝별, 크나큰 잠

 

 

 

한 자리 본 것처럼

깜빡 한 여기를 놓으며

신호등 앞에 선 목이 꽃대궁처럼 꺾일 때

사르르 눈꺼풀이 읽던 행간을 다시 읽을 때

봄을 놓고 가을을 놓고 저녁마저 놓은 채

갓 구운 빵의 벼랑으로 뛰어들곤 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사과 냄새 따스한

소파의 속살 혹은 호밀빵의 향기

출구처럼 다른 계절과 다른 바람과 노래

매일 아침 길에서 길을 들어설 때

매일 저녁 사랑에서 사랑을 떠나보낼 때

하품도 없이 썰물 지듯

깜빡깜빡 빠져나가는 늘 오늘

깜빡 한 소식처럼

한 지금을 깜빡 놓을 때마다

한입씩 베어먹는 저 큰 잠을 향해

얼마나 자주 둥근 입술을 벌리고만 싶은가

벼락치듯 덮치는 잠이 삶을 살게 하나니

부드러워라 두 입술이 불고 있는 아침의 기적

영혼의 발끝까지 들어올리는 달콤한 숨결

내겐 늘 한밤이 있으니

한밤에는 저리 푹신한 늘 오늘이 있으니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인스티즈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인스티즈


곽재구,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숨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인스티즈


권혁웅, 파문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인스티즈

나희덕, 뿌리에게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 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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