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실록 47권, 정조 21년 10월 4일 기해 1번째기사 1797년 청 가경(嘉慶) 2년
차대를 하여 아란타에서 표류한 배, 영호남의 감소하는 곡부를 논의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동래(東萊)에 표류해 온 배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아마도 아란타(阿蘭沱) 사람인 듯하다.’ 하였는데, 아란타는 어느 지방 오랑캐 이름인가?" 하니, 비변사 당상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효종조(孝宗朝)에도 일찍이 아란타의 배가 와서 정박한 일이 있었는데, 신이 어렴풋이 일찍이 동평위(東平尉)204) 의 문견록(聞見錄)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아란타는 곧 서남 지방 번이(蕃夷)의 무리로 중국의 판도(版圖)에 소속된 지가 또한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명사(明史)》에서는 하란(賀蘭)이라고 하였는데 요즘 이른바 대만(臺灣)이 바로 그곳입니다." 하자,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주달한 바가 두루 흡족하니 참으로 재상은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서구에게 이르기를....... (후략)
정조

"전에 동래에 표류한 배가 듣기로는 아란타(阿蘭沱) 사람의 배라는데, 아란타는 대체 어디에 있는 오랑캐인가?"
비변사 당상 이서구: "효종 임금 때(재위 1649~1659) 아란타 사람이 정박한 적이 있지요. 아란타란 바로 요즘 이른바 대만(臺灣)이 바로 그곳입니다."
우의정 이병모: "참 똑똑하시군요! 역시 재상은 이런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이서구는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중 한명인데, 이서구는 아란타(네덜란드)가 대만 섬에 있는 나라라고 설명하고 있고, 이것을 들은 우의정 이병모는 이서구의 박학한 지식에 극찬을 아끼지 않는 모습
왜 이서구는 네덜란드가 대만에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네덜란드가 17세기부터 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했을 때, 그중에 하나가 바로 중국과 일본 시장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대만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17세기부터 이미 해외에 많은 상업/무역 네트워크를 건설해놓고 있었고, 대만은 그중에 하나였습니다.

1624년의 대만은 다두 왕국이라고 하는 원주민들의 왕국(주황색)과 스페인령(초록색)과 네덜란드령(보라색)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나머지 흰색 영역은 사실상 무인 지대였습니다. 그러나 1642년에 네덜란드가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고 섬 전역을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다가 중국 대륙에서 청나라가 명나라를 밀어내고 중원의 주인이 되었고, 남은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이끌던 정성공은 1662년에 대만으로 넘어와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다시 이 섬을 차지하지요.
아마 이서구는 이거와 관련된 글을 보고, 네덜란드가 대만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병모는 그런 이서구를 보고 감탄합니다. 실록에 나오는 정조와 이서구의 대화는 18세기 후반의 일이고, 네덜란드가 대만에서 축출된 것은 17세기 중반의 일이니, 이서구가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에 대한 지식은 이미 백 년 전의 사건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이것이 조선인들이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에 대한 정보의 모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란타(阿蘭陀, 네덜란드를 의미함)는 서역의 가장 먼 곳에 있어 몇 만 리가 되는 지 알 수 없다. 중간에 섬이 없어 항상 먹을 물이 모자랄 것을 염려하여 매번 여름 장마철에 나온다고 한다. 아란타 사람들은 키가 크고 얼굴이 희고 훤하며, 머리털이 앞으로 이마를 덮고 뒤로는 옷깃까지 내려온다. 전립(氈笠, 털로 짠 모자) 비슷한 것을 썼는데, 왼쪽 오른쪽 앞쪽 세 군데를 말아 올려 위로 붙였다. 옷은 앞깃이 없고, 동정으로부터 밑으로 합쳐 묶는 데가 수십 군데이다. 바지는 너무 좁아 다리를 펼 수는 있지만 굽힐 수는 없다고 한다. 왜인의 값비싼 비단과 기이한 물자를 그 나라에서 많이 수입하기 때문에 해마다 몇 척의 배가 나온다. 아란타 사람들은 몸이 건장하고 잘 싸우는 편이라 바다에서 왜선을 만나면 사람 숫자는 상대가 되지 않아도 반드시 겁탈을 한다. 이 때문에 왜인은 항상 배 한 척을 볼모로 잡은 다음에 보내고, 그들 선원도 매양 교체하여 돌아간다고 한다. 아란타 배는 나가사키를 통과할 때 물이 얕아 들어올 수 없으므로 왜선(倭船)을 사서 들어온다고 한다. 기교가 남다른데, 배 양쪽에 맷돌(石磨)을 설치해 두었다.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기관으로 물을 격동하면, 10,000곡(斛)을 실은 무거운 배라도 날아가는 것처럼 빠르다. 도르래를 돛대의 각 폭에 달아서 당기면 비록 100폭이라도 빠짐없이 모두 한 군데로 몰린다. 그 배가 나가사키(長崎)에 와서 쇠닻을 내리고 포성을 울리면 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집 판자나 시렁에 얹어 둔 그릇이 흔들리어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고 한다.
- 임수간, 『동사일기(東槎日記)』, 坤, 「해외기문(海外奇聞)」, 1711, 김문식, 『조선 후기의 대외인식』, 새문사, 2009, pp.205~206에서 재인용.
하지만, 18세기 초반에 일본으로 통신사를 다녀온 임수간은 좀 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1711년 신묘 통신사 중에 사복시정(司僕寺正) 자격으로 동행한 임수간(任守幹, 1665~1721)은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모습, 복식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정확하지만 그 외의 정보들은 일본인에게 전해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18세기 초에 조선인이 네덜란드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를 자아내지만, 이후의 사행록에 기재된 오류가 많은 네덜란드 기록을 고려해보면 안타깝게도 이후의 사절단들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나 자신들이 들은 정보를 더 정확하다고 여긴 것으로 파악됩니다.
어찌됐든 통신사 일행이 나가사키를 경유하면서 본의 아니게 네덜란드 인들을 볼 수 있었고, 거기서 촉발되어 유럽 지역에 대해 정보를 수집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18세기에 축적된 네덜란드의 정보들은 이덕무가 네덜란드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지식을 기반으로 상당히 정확한 내용을 담은 『청령국지(蜻蛉國志)』 「異國」편을 작성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니, 꼭 의미 없는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맨 위에 소개한 18세기 후반의 이서구는 완전히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던게 맞습니다. 아무튼 조선인들이 네덜란드에게 감탄했던 부분은, 배에 달린 함포였는지, 네덜란드제 화포에 대한 기록은 꾸준히 등장합니다.
사실 17세기 중반부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과 해군 경쟁을 할 정도로 막강한 함대 전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650년부터 1670년까지는 프랑스와 영국과도 얼추 대등하게 맞섭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슬슬 사이즈의 한계로 인해 힘이 부치기 시작하지요.

이서구와 정조가 대화를 나누었던 18세기 중후반에는 러시아에게도 밀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5위로 밀려나게 됩니다. 19세기로 넘어오면 더 추락하구요.
만약 18세기에 이미 네덜란드보다 3~4배나 많은 함대에 질좋은 대포와 전열함을 갖춘 영국, 프랑스 해군이 동아시아에 등장했다면, 조선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네덜란드 이상의 함대를 갖춘 그 나라는 1793년이 되어서야 청나라와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영국 정부가 최초로 동아시아에 외교관을 파견한게 이때지요.

당시 청나라의 통치자는 삼현제 중에 마지막이었던 건륭제였고, 매카트니 대사는 무릎을 꿇고 알현하라는 건륭제의 요구에 굴복합니다.
물론 50년이 지난 1842년에 그 유명한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청나라는 그야말로 뭐 해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고, 중국 역사상 가장 빠른 항복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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