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스코틀랜드의 형성
2. 잉글랜드의 선제 공격, 던바 전투
봉기
에드워드 1세가 잉글랜드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정복의 성과는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정복한 과정은 빠르고 신속했다. 전투다운 전투도 얼마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철저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왕이 이끄는 봉건적 군대를 패배시키기는 했지만, 스코틀랜드의 모든 불만 세력을 제압한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의 지배를 부당하게 느낀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스코틀랜드 교회가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1세는 정복 이후 잉글랜드 사제들을 스코틀랜드 교회의 성직에 앉혔고, 이것이 스코틀랜드 출신 사제들의 불만을 불러왔던 것이다. 중세 시대에 최고의 조직력과 행정력을 가진 집단은 역시 교회였다. 여기에 사제들의 권위까지 더해지니,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을 선동하기가 매우 편리했다.
둘째로는 에드워드가 재무관으로 임명한 휴 드 크레싱험(Hugh de Cressingham)이 원인이 되었다. 이 사람은 스코틀랜드에서 세금을 거두는 임무는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당연히 스코틀랜드인들은 세금을 내야 하는 이유를 통 납득할 수 없었다. 크레싱험이 프랑스에서 에드워드 1세가 치르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양모를 징발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리자 분노는 더욱 치솟았다.
결국 1297년 초부터 스코틀랜드 각지에서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해 5월, 클라이즈데일(Clydesdale)의 잉글랜드 장관 윌리엄 헤즐릭(William Heselrig)이 밤중에 래너크(Lanark)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대적인 봉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헤즐릭을 살해한 무리의 지휘관의 이름은 윌리엄 월리스였다.
나라의 영웅으로서 현재 그가 누리는 명성이 무색하게, 윌리엄 월리스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리고 온갖 전설과 민간 전승이 뒤섞여서 혼란스러운 편이다. 그러나 역사적 월리스의 복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그의 가문은 잉글랜드 데이비드 1세 시대에 웨일스에서 스코틀랜드로 이주해 왔으며, 데이비드 1세의 궁내 장관의 봉신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월리스는 어린 시절 사제였던 숙부에 의해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며, 봉기군의 지휘관으로 돌변하게 된 것은, '장님 해리'의 서사시에 따르면, 아내 혹은 애인이 윌리엄 헤즐릭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단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영향으로 윌리엄 월리스 하면...

이런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역사상의 윌리엄 월리스는 저러고 돌아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13세기 기사의 전형적인 모습이 실제 윌리엄 월리스의 모습에 더 근접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1297년의 봉기 이전까지 그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이후의 활약상에서 볼 때 그 이전에도 군사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땅도 있고 그런대로 기반이 잡힌 집안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1세가 충성 서약을 받았던 스코틀랜드인들의 명단에서는 월리스를 찾아볼 수 없다. 즉 한 번도 에드워드 1세를 주군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드 1세와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었던 스코틀랜드 귀족들보다는 입장이 좀 더 자유로운 편이었다.
헤즐릭을 살해한 뒤, 월리스의 부대는 대담하게도 스콘을 습격했다. 목표는 대법관인 윌리엄 드 옴스비(William de Ormesby). 옴스비는 탈출에 성공했으나, 이 사건은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의 지배 체제가 깨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러나 남서부에서 봉기한 귀족들은 어빈(Irvine)에서 에드워드 1세의 군대 앞에 쉽게 항복하면서 무력함을 드러냈다. 이로써 월리스는 봉기군의 확고한 지도자로 떠오르게 된다.
잉글랜드에 대항한 것은 월리스 혼자가 아니었다. 같은 해 월리스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인 윌리엄 머레이가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반란의 깃발을 올렸다. 그는 이전에 던바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바 있었던 고위 기사였는데, 체스터 성에서 탈출하여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머레이의 병력은 남진하여 9월 초에 던디에서 월리스의 병력과 합류했다. 그들은 국경을 넘은 잉글랜드군의 목표가 스털링 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스털링(Stirling) 외곽에 자리를 잡기 위해 출발했다.
잉글랜드군의 진격
반란 소식이 들려왔을 때, 휴 크레싱험은 록스버러(Roxburgh)에 있었다. 록스버러는 북 스코틀랜드로 향하는 키 포인트인 스털링 성(Stirling Castle)에서 불과 5일 거리였다. 그러나 그는 서리 백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서리 백작은 느릿느릿 도착했다.
던바 전투의 승장이었던 서리 백작은 에드워드 1세의 오랜 전우이자 웨일스 전쟁의 베테랑이었다. 그러나 사실 던바 전투는 서리 백작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기보다는, 그냥 스코틀랜드군의 무능으로 자멸한 것에 가까웠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부사령관격인 크레싱험은 스코틀랜드인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고 있던 인물로, 그때까지 실질적인 스코틀랜드의 통치자였다.(에드워드 1세는 서리 백작에게 스코틀랜드를 맡겼지만, 백작은 스코틀랜드에 거의 머물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그도 웨일스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다.
크레싱험은 7월에 국왕에게 300기의 기병과 1만의 보병을 모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출격하는 9월에 이르면 그 수가 상당 부분 감소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잉글랜드의 주 전선은 플랑드르였기 때문에 정예 기사들의 상당수는 그곳에 있었고, 스코틀랜드 전선에 투입할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보병의 주력을 구성한 웨일스 병사들은 강력했고, 무엇보다도 이후 잉글랜드군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될 장궁병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전쟁을 치러 온 잉글랜드에 비해, 스코틀랜드는 지난 30년간 평화를 누려 왔다. 지휘관도, 병사도 경험이 부족했다. 던바에서 당한 무기력한 패배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비록 스코틀랜드의 봉건 기병은 잉글랜드군에게 패배했지만, 스코틀랜드 최고의 병사들은 12-14피트 길이의 창으로 무장한 보병대였다. 역시 <브레이브 하트>의 영향으로 당시 스코틀랜드군을 허술한 무장을 한 농민 군대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스코틀랜드 보병들은 비교적 잘 무장되어 있었고, 실전에서 이들은 긴 창을 이용해서 거대한 고슴도치와 같은 대형을 이루었다. 이것이 '쉴트론(Schiltron)'이라고 불리는 스코틀랜드 특유의 보병 팔랑크스였다.

('쉴트론' 대형을 갖춘 스코틀랜드 창병대)
스코틀랜드군의 숫자도 기록마다 다르지만, 잉글랜드군보다 기병이 적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적은 수는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투 전야
잉글랜드군이 스털링 성에 도착했을 때,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하는 스코틀랜드 귀족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레녹스(Lennox) 백작이 합류했다. 이들은 서리 백작에게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스코틀랜드군의 지도자들과 이야기해 보겠다고 제안했으나, 월리스도 머레이도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상황)
또한 이들은 서리 백작에게 다음날까지 40명의 중기병을 데려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서리 백작이 허락하자, 이들은 저녁에 떠나갔다. 그때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이 잉글랜드군 진영을 떠날 때, 마침 약탈을 마치고 돌아오던 병사들과 마주친 것이었다. 다툼이 발생했고, 레녹스 백작은 칼을 휘둘러 보병 한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부상당한 자의 동료들은 분노하여 서리 백작에게 복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서리 백작은 그들의 지원병이 더 필요했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스코틀랜드 영주들이 약속을 지키는지 여부를 아침까지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아침에 다리를 건널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군대는 명령대로 다리를 건넜다. 스털링 다리는 매우 좁았기 때문에 전위대가 다리를 건너는 데만 해도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명령이 떨어졌다.
"너무 빨리 건넜으니, 다시 돌아오도록. 아직 백작님께서 일어나지 않으셨다."
전위대는 애써 건넌 다리를 다시 건너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서리 백작은 느긋하게 일어나서 관례에 따라 기사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나서 부대는 다시 다리를 건너기 위해 출발했다. 그런데 한참 건너가는 와중에 또 명령이 내려왔다.
"스코틀랜드 영주들이 왔으니, 다시 돌아오라."
지난밤에 떠났던 스튜어트와 레녹스 백작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스코틀랜드군의 항복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이라고 생각한 서리 백작이 또다시 부대를 되돌린 것이었다. 병사들은 기껏 건넌 다리를 두 번째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스튜어트와 레녹스 백작이 가져온 소식은 "스코틀랜드군을 설득하지 못했고, 중기병 40명도 데려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서리 백작은 2명의 도미니코회 수도사를 보내, 스코틀랜드 지휘관들과 협상하도록 했다.

(수도사 2명과 이야기하는 윌리엄 월리스)
월리스는 결연하게 답했다.
"가서 전하시오. 우리는 평화를 맺으러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지키고 우리 왕국을 해방하기 위해 싸우러 온 것이라고. 그러니 그들더러 오라고 하시오. 그러면 우리가 이를 그들에게 직접 증명해 보일 테니."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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