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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 비니ll조회 263l 1
이 글은 5년 전 (2018/12/10) 게시물이에요

사관은 논한다.
쓰기 싫다.
- 김경진, 《임진왜란》 2권 中



 

임진왜란의 해전. 조선수군이 캐발린 굴욕의 전투로 당당히 그 수치스런 이름을 남기고 있는 전투다. 대한민국 국군에선 쌍령 전투, 현리 전투와 함께 한국사 3대 패전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약간의 이견이 있긴 있으나 일반적으로 3대 패전 중 가장 최악의 전투로 뽑힌다.
 

전투일자

선조 30년 정유년 7월 16일
그레고리오력상 일자

1597년 8월 28일
장소

경상남도 거제도, 칠천도 사이 칠천량
결과

조선 수군이 대패, 조선 수군이 사실상 와해

Contents
1 전투 이전 2 전투의 전개 3 패배의 원인? 4 전투의 결과


 

1 전투 이전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다시 진주한 가운데, 평소 가토 기요마사와 으르렁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눈엣가시를 남의 손 빌어 처리하자라는 심사에서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간첩질을 하던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 가토가 바다 건너서 온데염. 빨리 해치우삼이란 정보를 흘렸다.

김응서는 이게 웬떡이삼!하며 조정에 보고했고, 이 소식을 들은 권율은 조정에 이를 알림과 동시에 이순신에게 빨리 출전해서 바다 건너오는 가토 잡아라라고 명령했지만... 권율이 직접 달려와서 한산도에 명령을 내렸을 때 이순신은 마침 전라좌수영의 공무로 인해 여수로 가 있었고, 여기에 풍랑이 들어 바로 한산도로 돌아가지 못해 남해도에 있을 때 가토가 도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 당연히 조정에서 가토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이미 가토는 도착해 있는데요' 라는 대답을 할 수밖엔 없었고, 조정은 당연히 이를 이해했다. 물론, 이때까지는 큰 문제 없었다.

이후 조정은 다시 한번 공격명령을 내렸고, 여기에 이순신은 마찬가지로 충실히 복종해 부산포까지 가서 일대를 들쑤시고 왔다. 가토가 이미 상륙한 뒤지만 어쨌든 해상으로 압박을 주면 다른 부대는 함부로 못건너올 것이다... 는 이유에서였는데, 이순신은 여기에 복종했다.[2] 물론 이때까지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1월 21일에 원균의 장계(나라면 잡을 수 있었음이란 내용)을 받아보더니 1월 23일 갑자기 선조그때가 하늘이 준 기회였는데 가토를 왜 안잡은 것임? 니 지금 나를 무시하냐!라면서 뜬금없이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 결과 2월 4일 선조의 눈치를 본 사헌부 탄핵이 들어가고, 선조는 딱 이틀 뒤[3]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도성으로 압송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2 전투의 전개 원균 또한 이순신이 왜 가토를 치지 않냐라면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기분 상콤하다라고 하고 있었지만, 막상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보니 이순신이 처했던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거기다가 기껏 공적을 세우겠다고 했다가 망신까지 당하니[4] 겁이 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조정에선 부산을 치라고 득달같이 명했지만 원균은 이핑계 저핑계를 대면서 출전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닥달이 워낙에 심해 원균은 결국 출전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얻은 게 없었다.


원균을 비롯,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병사 최호, 경상 우수사 배설 등이 이끄는 169척의 조선 수군함대가 7월 4일 부산을 향해 출전했다.[5] 일단 전력적 측면에서는 일본 수군보다 확실히 강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느릿 느릿 전진해 7월 7일, 겨우 다대포 앞에 도착한 조선수군은 일본 수군의 빈 배 8척을 불사르는 것까진 좋았는데... 대마도에서 건너오던 일본 수송선을 추격하다가 물살에 휩쓸려 판옥선 12여 척이 실종[6]되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안습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7월 9일 서생포에서는 일본 수군이 공격하자 겁먹고 도망가다가 판옥선 20여 척 가까이 상실하는 패전도 겪는다. 이러자 잔뜩 뿔이 난 도원수 권율이 7월 11일 원균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는 희대의 사태가 발생했다(…).[7] 이래저래 녹초가 된 조선 수군은 겨우 가덕도에 이르렀지만, 나무하던 중에 가덕도의 일본군에게 습격을 받자 나무하러 내렸던 400명을 그냥 버리고 도망첬다.

결국 조선수군은 칠천량에 갔는데, 원균은 이미 그때까지의 경과로 인해 의욕상실 상태가 되어 술만 퍼마실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의 동태를 눈치 슬슬 봐가며 지켜보던 일본 수군은 기회를 눈치채고 칠천량으로 몰려갔다. 이순신에게 늘 캐발렸던 도도 다카토라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있는 배 다 긁어모아 칠천량으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육군도 칠천량으로 향했다.

7월 16일 새벽 4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 대한 포위를 했고 이후 대대적인 야습을 시작했다. 이때, 조선 수군은 경계조차 하지 않은듯 보인다.


밤중에 적이 가만히 비거도 10여척으로 우리 전선 사이를 뚫어 형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 5~6척으로 우리 진을 둘러 쌋는데, 우리 복병선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이미 복병선은 적에게 불태워 없어졌다. 균이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불화살을 쏘아 변을 알리는데 문득 각 배옆에서 적의 배가 충돌하여 총탄이 발사되니 군사들이 놀라서 실색하였다. - 조경남 저. 난중잡록

일본 군이 조선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도 아무도 몰랐다는 소리다...

7월 16일, 의욕상실된 원균과 지휘체계가 무너져 막장이 되어버린 조선 수군 앞에 소수의 일본군이 공격을 가해왔다. 아직 전력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8] 최고 지휘관이 워낙 막장이었던 탓에 일본군의 공격에 어찌할바를 모르고 허둥지둥 대면서 한산도 근처인 춘원포로 도망갔다가[9] 원균이 지상에 내려서 도망치자는 결정을 내려, 이순신이 힘들여 쌓아놓은 조선 수군을 제대로 된 교전한번 없이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차라리 원균 명령을 듣지 않고 각기 도망치거나 아예 지휘권이 붕괴된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다. 견내량은 막히지 않고 한산도로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춘원포로 다 꼴아 박아 버렸으니...

가토 기요아키는 약간 뒤에 도착했는데 전투는 이미 한참 전 이었다. 요시아키가 창과 포로 무장한 한 척의 거함에 뛰어 올라 몇사람을 참수하자 적[10]이 그를 공격하려고 했다. 요시아키의 조카 곤시치로 등이 분전하여 드디어 배를 뺏았았다. 요시아키는 또 적의 별선에 뛰어오르려 하다 발을 헛디뎌 바다로 떨어졌다. - 18세기초 정한휘보 권 4 30면

위와 같이 일본군의 전술은 군선의 돗대를 사다리로 이용해 전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것인데 이때문에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11]했으며, 경상 우수사 배설은 자신의 휘하 함대의 7척만 이끌고 도망쳤다. 이후 배설의 판옥선 7척에 살아남은 다른 판옥선들이 합류해 12척까지 늘었고, 이들이 조선 해군 최후의 전력이 되었다.불행 중 다행

한편 원균은 아들 원사웅과 함께 육지로 도망쳤지만 소나무 아래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으로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고 하는데 실상 원균이 죽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원균이 뛰기 힘들어 뒤쳐져 있는데 추격해온 군이 달려들더라" 정도 수준의 증언이 있을 뿐이라 어쩌면 누가 구해줘서(설마 원균이 칼을 들어 왜군을 쳐죽였을 리는 없으니) 살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걸 증언한 게 김식인데 이 인간도 원균이랑 딱히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서(…) 어쩌면 조선군이 원균에게 향하는 걸 잘 못 봤을 가능성까지 있다.

게다가 실록에 전투후 멀쩡히 살아있는 원균을 만났다는 도원수 권율 휘하 군관 최영길의 증언이 실려있다.[12] 그 뒤로도 원균이 살아있으니 찾아내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의가 조정 내에서 반복되지만 선조는 응하지 않으며, 결국 원균이 확실히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김경진, 윤민혁 등이 집필한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원균을 생존한 것으로 가정하고 순천부사 우치적이 평생 숨어 살도록 원균을 숨긴 것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당연히 이 전투가 묘사된다. 여기서는 칠천량에 정박해 있던 조선군이 일본군의 기습 포격전을 맞아 포 한방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발려버렸고 일본군의 화포 사격과 접현전투로 대다수의 배를 격침당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당연히 사실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13] 무적 무패 신화의 위용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이 정말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짜피 전투전에 이순신 휘하에 있던 기존 지휘관들이 3명 빼고 다 사직해버리고 원균이나 새로 부임된 뭣도 모르는 신참들이 허벌나게 박살나는게 거봐 이순신 장군 말을 안들으니까 이렇게 되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꼴좋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베테랑이 된 병졸들이 허무하게 죽어가는게 안타까우면서도 분노를 느끼게 한다. 더구나 거북선이 불살라지며 조수창이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은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게다가 예고편에서 나오는 글귀가 찢어진 희망이 피로 흘렀다.(...) 말 다했다.


3 패배의 원인? 일단 원균 자체의 지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다. 경계작전 조차 시행하지 않고 부하들을 헌신짝 처럼 내팽겨 쳐놓은데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기생을 끼고 살았다..이 미친 인간이 이 때문인지 원균에 대한 반발로 인해 밑의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중략)이때까지 이순신 휘하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원균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통제사가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부체찰사 한효순이 이 문제를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해결해 보려 했지만 이것은 미쳐 조처를 취하기 전에 칠천량 해전이 일어났다. - 이덕형이 올린 보고서. 선조실록 권133 선조 34년 1월 병진 기사.

이러한 이야기는 칠천량 해전이 벌어지기 한달전 이순신이 쓴 일기에도 나온다.

(중략)휘하의 여러 장수중 다수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과, 통제사가 장수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는 상황으로 볼때 일이 잘못된것을 알수 있다. - 난중일기 정유년 6월 17일

그리고 통제사의 권한보다 체찰사의 힘이 컷다. 권율이 삼도수군통제사에게 곤장을 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니 통제사는 작전에 대해 아무것도 토를 달수가 없던 상황. 원균 자신도 부산포 공격은 무리라는 것을 판단했지만 억지로 끌고 나갔고 결국 패배로 이어졌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원균이다.원균!원흉!!!


4 전투의 결과 칠천량의 패전은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이 한 일이다! -선조실록 권90 선조 30년 7월 신해 기사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이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인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결코 빈말만은 아니다.

169척의 조선 수군중 함대 단위로 남은 건 배설이 도망칠때 끌고간 12척 정도[14]로 조선은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물론 제대로 된 전투없이 다 도망갔기 때문에 이억기, 최호를 제외하면 지휘관급 전사자는 거의 없었고 병력 손실도 규모에 비해 적었지만 도망간 이들이 합류한 것은 대개 명랑해전 이후의 일이었다. 혹은 몇 척 단위로 도망간 배들도 있겠지만 자세한 수는 추측하기 어렵다.

일본군 장계에 따르면 칠천량에서만 160여척의 전선을 탈취하거나 불태웠고 연안에 남겨진 전선들 또한 불태웠다고 한다. 조선 수군의 전력이 도주한 몇몇 전선을 제외하면, 모조리 분멸했다는 이야기.아 속터져, 다 원흉때문이다

그리고 장수(배설)가 전장에서 도망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이 경우에선 그나마 12척이라도 건질 수 있게 한 행동인지라 그냥 욕하기엔 좀 그렇다(…).불행 중 다행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함선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는데 시간상 보면 건조하는 속도로는 그렇게 빨리 불어나기 힘들 것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장수 대부분이 배와 휘하 병력을 데리고 숨어 있었다는 얘기이며(실제로 명량해전 이후 도망쳤던 장수들이 수군에 합류해서 도망친 죄를 처벌받은 기록이 존재한다) 그나마 배설만 자기 휘하 병력을 새로운 통제사 이순신에게 인계했다는 소리가 된다. 그러나 배설은 이때 얻은 까임방지권을 명량해전에 참가 안하고 떠나버리면서 써버렸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잡혀와 목이 잘렸다. 안습 그냥 명량해전에 참가했다면 목숨도 건지고 승진도 했을지 모르는데...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순신이 막아내어 유지할 수 있었던 남해의 제해권이 일본군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리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전라도가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으며,[15] 일본의 입장에선 임진년 당시 한양 이북으로 진격의 가장 큰 방해물이었던 보급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난중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순신이 말한건 아니고 이순신을 찾아온 이가 이순신에게 한탄하며 하는 말이다.


(중략)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후략) - 난중일기 정유년 5월 20일, 5월 23일.

다만 일본군은 7월 말까지 주변지역을 소탕하고 약탈하는 모습만 보였고 8월에는 이마저도 중단하여 이순신이 수습할 시간을 주었다. 하늘이 우릴 도운거다 이후 남원과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 육군과 수군이 투입되는데 사천과 곤양을 거쳐 하동땅 두지진으로 이동하며 대대적인 살육이 벌어지기도 했다.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 케이넨[16]의 일기

여튼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선조내가 더 이상 뭔말을 하리요[17]라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했고[18][19] 이순신은 원통함과 울분을 뒤로한 채 조선 수군 재건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세계 해전사 사상 최강의 전설, 아니 신화로 기억될 말도 안되는 캐사기 전투가 시작되는데...[20]


-
[1] 요시라의 보고가 조정에 전해진 게 1월 11일, 그런데 이순신은 1월 10일에 이미 가토가 가덕도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육지로 올라온 건 1월 13일) 여기에, 요시라의 보고가 한양에 도달했을 때는 1월 19일이며, 당연히 이때 가토는 부산에 도착해 있었다.
[2] 권율과 김응서가 이때 일에 대한 장계를 올렸고, 원균도 나중에 이순신을 무조건 까기 위해 관련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이 이때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3] 아무리 왕이 대신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어도 보통 탄핵을 두어번 반려하는 모양새를 취하던 시대였다. 이틀만에 파직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
[4] 기문포에 왜선 3척이 나무하러 와 있는 걸 술과 먹을 걸 줘가면서(아직은 휴전기간중이다) 안심시킨 다음 뒤를 쳤는데 반격한 일본군에게 그만 임란 최초로 해상에서 판옥선 탈취를 당한다. 판옥선 안에 실린 화포와 화약, 기타 무기는 부록이다(...)
[5]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건 아니고 선조실록 30년 7월 7일 기사에 "조선수군이 다대포에 정박하여" 라는 기록으로 추측한 날짜다.
[6] 5척은 도모포에, 7척은 서생포로 표류했고 서생포에 표류한 인원들은 모두 전멸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7월 14일과 16일 기사에 기록.
[7] 권율이 때마침 조선 육군 주력을 이끌고 한산도 근처에 있어서 빠른 배로 잡아다 두들겨패고 돌려보내는 게 가능했다(…).
[8]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르면 초기에 기습한 적선은 겨우 두 척 천 척에 달한다는 일본 수군은 기습이 성공한 한참 후에야 차례대로 도착했고, 육군은 거제도 등으로 도망오는 조선 수군만 잡았을 뿐이었다.
[9] 곤장 사건에서 보듯 권율이 그 근처에 있었다. 그러나, 만이 채 안되는 병력의 조선 육군이 일본군 수만을 막아주리라 본 것부터가 실수다.
[10] 조선수군
[11] 기록상 싸우다가 자결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전사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보통은 자살 행위를 연상할 정도로 처절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판단하는 편이다. 경과야 어찌되었던, 등신같은 지휘관 때문에 아까운 목숨 날린 것은 매한가지.
[12] 이 때 견내량을 탈출한 배가 최소 서른 척 확인된다.
[13] 안택선 항목을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당시 일본 함선은 그 설계 및 제작법상 한계 때문에 화포를 탑재해 봤자 뱃머리에 2문 정도가 고작이었다.
[14] 한산도에 남겨둔 배, 또는 건조중인 배가 다수 있었으나 적의 손에 넘기지 않으려고 모두 불태워버렸다. 아아...
[15]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는 일본의 침략을 받지 않은 인적으로든 물적으로든 조선의 보급고와도 같은 곳이었다. 단적인 예로 도원수 권율의 병력은 자신의 부임지였던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 시무조선'은 이런 맥락에서 한 말이다.
[16]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이자 주지스님이었던 사람이다. 주군을 따라 임진왜란에 참가해 일기를 남긴 것으로 유명.
[17]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선 이를 두고 '임금이 신하한테 싹싹 비는' 상황으로까지 비견하는데, 다소 과장이긴 하지만 중앙집권국가에서 왕이 신하한테 저 정도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긴 하다. 그만큼 급박했다는 소리.
[18] 그런데,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대왕 가라사대, "아놔 정찰 안했나요? 왜 후퇴해서 한산도도 못 지킨거예효? 한산을 지키면서 호랑이가 버티는 듯한 형세를 지키며 우주방어 했어야 하는데 괜히 출동해서 이렇게 발렸으니 이건 사람이 한게 아니라 하늘 때문이야." 이봐요...
[19] 그나마도 제대로 한것도 아니고 신하들이 이순신을 복직시킬것을 요구하자 답을 주지않고 그냥 나가버리자 신하들이 그대로 진행시켜버렸다. 게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키면서도 품계를 내리는 식의 견제를 하였다. 이 품계란게 민감한게 직급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가 위라고 해도 명분상 품계가 같으면 서로 동급이기 때문에 품계가 같은 휘하 통제사들이 군령을 따르지 않아도 처벌할수 없게된다.
[20] 사실상 이 전투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이득은 명량대첩을 통해 이순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원균이 죽은것도 이득이라면 이득이다



 


[엔하위키] 한국사 3大 패전(敗戰)중 최악의 흑역사: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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