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스코틀랜드의 형성
2. 잉글랜드의 선제 공격, 던바 전투
3. 윌리엄 월리스의 등장
전투 준비
최후의 회담이 결렬되자 서리 백작은 기사(banneret)들을 소집하여 작전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대부분 스코틀랜드군의 전투 능력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지난번 원정에서 스코틀랜드군이 보인 모습을 보면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낙관적인 분위기에 휩쓸린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실전 경험이 풍부한 기사들은 스코틀랜드군이 차지하고 있는 지형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잉글랜드군에 참가한 스코틀랜드 출신 기사인 리처드 런디(Richard Lundie)였다. 그가 이 회의에서 올바른 판단을 한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회의 석상에서 짧게 발언했다.
"만일 우리가 저 다리를 건넌다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 될 것입니다. 저 다리는 2열 종대로밖에는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적군은 이미 대형을 갖추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적의 전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를 향해 돌격해 내려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고를 하고 나서 런디는 새로운 작전을 제안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강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이 있는데, 한 번에 60명씩 건널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제게 약간의 병력만 주신다면 그곳을 건너서 적의 측면을 치겠습니다. 그러면 백작님께서는 안전하게 다리를 건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레싱험(Hugh de Cressingham)이 반대하고 나섰다.
"백작님! 여기서 말다툼을 하든, 쓸데없는 기동으로 국왕의 돈을 낭비하든 하등 좋을 게 없습니다. 지금 당장 다리를 건너서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서리 백작은 크레싱험의 주장에 동의했다. 스코틀랜드군을 얕본 것도 이러한 결정에 한몫을 했을 것이고, 적의 코앞에서 병력을 나누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결정은 이날의 최대 실수였다.
다리 건너에 있는 스코틀랜드군은 윌리엄 월리스가 이끌던 게릴라군 수준의 그 이상이었다. 그간 새로운 증원 병력들이 전장으로 합류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잘 무장된 병사들이었다. 제대로 훈련시킬 시간은 부족했으나, 결코 허술한 농민병은 아니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군은 다리를 건너는 어떠한 움직임도 손금 보듯 내려다볼 수 있는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다.
사실 그날 윌리엄 월리스와 앤드류 머레이는 오전 내내 잉글랜드군이 다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웠을지 황당해했을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되었건, 잉글랜드군이 언제 다리를 건너올지 모르는 일이니 병력 배치 명령을 내렸다. 스코틀랜드군은 주둔해 있던 숲에서 나와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잉글랜드군이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을 때는 이미 전투 대형을 갖춘 스코틀랜드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결전
잉글랜드군도 회의의 결과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잉글랜드군은 이날에만 강변에서 세 번이나 대형을 갖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규모가 달랐다. 스코틀랜드군 지휘관들도 이번에는 진짜 공격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서리 백작이 그랬듯이, 스코틀랜드군도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스코틀랜드군은 지휘권도 머레이와 월리스가 공동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혼선이 일어날 우려가 컸지만, 잉글랜드군과 달리 제대로 된 결정을 내렸다. 스코틀랜드군은 방어 대형을 취한 채로 적군이 다리를 건널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적의 전위 부대가 건널 무렵 먼저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잉글랜드군의 3분의 1정도가 다리를 건넌 것은 오전 11시경이었다. 이 전위 부대는 2천여 명이었으며 크레싱험이 그 대열에 끼어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국왕과 서리 백작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외에 유명한 요크셔 기사인 마머듀크 드 스웡이 기병대와 함께 다리를 건넜고, 스털링 성의 치안 대장인 리처드 월드그레이브가 성 수비대 상당수와 함께 진군하고 있었다.
'쉴트론(Schiltron)'이라고 불리는 스코틀랜드 특유의 보병 팔랑크스 대형으로 밀집한 스코틀랜드군은 조용히 잉글랜드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다리를 건너는 잉글랜드군의 눈에도 햇빛에 빛나는 창날을 곧추세운 스코틀랜드군의 거대한 고슴도치 같은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잉글랜드 기병대가 먼저 다리를 건넜다. 그들은 어서 보병 부대들이 건너서 전투 대형으로 배치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대가 좁은 다리에서 넓은 공간으로 나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월리스와 머레이는 공격할 시점을 찾고 있었다. 적의 일부가 다리를 건넜을 때 치는 것은 이미 결정된 일이고, 문제는 '언제' 치느냐였다. 너무 일찍 공격하면 적군은 도로 다리를 건너 돌아가 버릴 수 있었다. 그러면 적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힌다는 목적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반면에 공격을 너무 늦추면 적의 대군이 강을 건너 대형을 갖추고 반격을 가할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었다.
그러나 결정은 올바른 순간에 내려졌다. 잉글랜드군의 전위대 2천여 명의 마지막 대열이 다리에서 강둑으로 나오는 순간, 돌격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인간과 창날로 이루어진 거대한 고슴도치가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가 그려진 푸른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가장 잘 무장한 병사들이 선두에 섰고, 쉴트론은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게 서서히 전진했다. 윌리엄 월리스와 앤드류 머레이는 완전 무장을 갖추고 선두에서 말을 달렸다. 잉글랜드군이 격렬하게 화살을 날려 댔으나, 이들의 전진을 막지는 못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다시 한 번 뿔나팔 소리가 울렸고, 스코틀랜드 보병들은 장창을 일제히 앞으로 내리고 파도처럼 적병을 향해 돌진했다.

(앵거스 맥브라이드, 스털링 다리 전투)
창날을 번득이며 몰려오는 스코틀랜드군 앞에서 잉글랜드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방어 대형을 갖추려 노력했다. 그러나 뒤에서 계속 밀려드는 아군 병사들 때문에 쉽지 않았다. 다리는 여전히 건너려는 잉글랜드 병사들도 가득차 있었다. 대열이 갖춰지지 않고, 뒤에서는 아군이 자꾸 밀어 대는 통에 앞에서는 적군이 달려오니 선두의 잉글랜드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명절날 고속도로 같은 상황에서 스코틀랜드군의 일선이 그대로 잉글랜드군과 부딪쳤다. 그러자 잉글랜드군은 기병이고, 보병이고, 궁병이고 할 것 없이 죄다 이 물결에 휩쓸렸다.
잉글랜드군 입장에서는 눈뜨고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 아직 전군의 3분의 2는 다리 저편에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싸우고 있는 잉글랜드군은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다. 게다가 견고한 밀집 대형을 갖추고 공격한 스코틀랜드군에 비해 잉글랜드군의 전위 부대는 제대로 대형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당했다.

여기서 스코틀랜드군은 오랜 훈련을 받지 못한 군대치고는 상당히 노련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잉글랜드군 앞에서 거대한 함정을 만들면서 창끝으로 적병을 몰아붙였다. 물론 뒤에서는 강물이 스코틀랜드군을 위해 완벽한 함정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전투 상황도. 잉글랜드군을 다리에서 그 아래 U자형 지형으로 몰아붙였다)
다리의 입구도 스코틀랜드군의 손에 떨어졌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을 다리에서 강의 만곡부를 향해 몰아붙였다. 이제 잉글랜드 전위대에게는 출구가 없었고, 다리 건너편의 본대로부터 완전히 차단을 당했다. 이제 스코틀랜드군은 완전히 갇힌 적군을 향해 달려들어 마음껏 살육하기 시작했다. 국왕의 깃발과 백작의 깃발이 스코틀랜드군의 창날 앞에 무참하게 땅에 떨어져 짓밟혔다.

서리 백작 휘하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다리 건너편에서 속수무책으로 이 광경을 바라봐야 했다.
기병들을 포함해서 중무장한 잉글랜드군의 상당수는 스코틀랜드군의 손에 죽거나 강물에 빠져 갑옷의 무게로 익사했다. 좀 더 가벼운 무장을 걸친 보병들의 경우 헤엄쳐서 도망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스털링 성의 치안 대장 리처드 월드그레이브는 난전 중에 살해되었다. 그가 데려온 수비대 병력 상당수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누구보다도 스코틀랜드인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았던 휴 크레싱험은 말에서 끌어내려져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마머듀크 드 스웡은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행동을 보여 주었다. 그는 싸움은 다 틀렸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기병들을 결집시켰다. 강물로 뛰어들었다간 갑옷의 무게 때문에 살아남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그는 대담하게도 스코틀랜드군이 장악한 다리를 그대로 돌파해서 돌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와 기사들의 필사적인 돌격에 못 이긴 스코틀랜드군이 결국 길을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혈로를 뚫고 본진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더 이상 잉글랜드군은 조직적으로 저항할 여력이 없었다. 스코틀랜드군은 강 북쪽의 잉글랜드군 생존자들을 하나 둘씩 처리해 나갔다. 완벽한 승리였다. 그들은 비대한 크레싱험의 시체에서 가죽을 벗겨 낸 뒤에 조각을 내는 것으로 최후의 복수이자 모욕을 가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지난 패전을 완전히 설욕하는 데 성공했다. 던바 전투에서 그토록 무력하게 무너졌던 스코틀랜드군이 서리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본대를 상대로 야전에서 당당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측에도 손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타격이 컸던 것은 이때까지 스코틀랜드 저항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앤드류 머레이가 중상을 입은 것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월리스와 함께 스코틀랜드군의 공동 사령관으로 활약했지만, 끝내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11월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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