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9월 9일 서울 세종로의 조선 총독부(중앙청) 앞을 행진 중인 미 7사단 병사들)
미군정을 담당하게 된 존 리드 하지 중장의 첫 번째 조치는 총독부의 존속이었다. 총독부의 일본인, 친일파 관료들은 그대로 유임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 내 여론마저 극도로 악화되고 비난이 쏟아지자 9월 12일 맥아더 사령부는 "아베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의 고위 간부들을 즉시 해임하고 나머지 일본인과 친일 부역자 또한 가능한 신속하게 해임하라"고 지시했다. 하지 중장은 그제서야 아베를 해임하고 7사단장 아놀드 소장(Archibald V. Arnold)을 군정 장관으로 임명하여 행정권을 맡겼다. 또한 총독부 건물에 군정청을 신설하고 주요 국장에 미군 장교들을 임명했다. 하지만 일본인 관료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미군정의 고문으로 임명하여 자리를 보존시켰다. 지방의 도지사에는 미군 장교들이, 시장과 군수에는 친일파들이 차지했다. 이것은 하지 중장의 독단이 아니라 일본의 통치 제도를 그대로 놔둔 채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리겠다는 것이 트루먼 행정부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 군정청은 맥아더 사령부의 축소판이었다.
하지 중장이 총독부를 그대로 놔두려고 했던 이유는 남한 진주가 워낙 급작스럽게 결정되었기 때문에 군정을 실시할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계획상으로는 8개 도와 14개 시, 132개 군,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의 국책 회사를 접수하고 운영하는 데 4,619명의 군정 요원이 필요했지만 9월 말까지 하지 중장이 확보한 인원은 겨우 337명에 불과했다. 하지 중장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 달 후에도 필요 인원의 1/4도 채 되지 않는 1,114명 정도였다. 남한을 통치하기에는 3천여 명 이상이 부족했다. 주둔 병력 또한 8만이 채 되지 않았고 그나마 1946년 2월 20일에는 40사단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2개 사단 44,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당초 예상했던 10만 명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숫자였다. 애초에 1개 군이 한반도로 투입되기로 했던 것이 1개 군단으로 줄어들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하지 중장도 "우리는 남한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병력이 모자라다"면서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