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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 비니ll조회 361l 1
이 글은 4년 전 (2019/6/18) 게시물이에요







 커피 마시는 개 | 인스티즈


이명, 분천동 본가입납(本家入納)

 

 

 

태어나 최초로 걸었다는 산길을 돌아

푹신한 나뭇잎을 밟으며

청주 한 병 들고 능선을 밟아 내려갔니더

누님이 벌초를 해놓은 20년 묵은 산소는

어둡고 짙은 주변의 빛깔과는 달리 어찌나 밝은지

무덤이 아니었니더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담한 봉오리

그랬니더, 그것은 어매의 젖이었니더

진초록 적삼을 살짝 풀어 헤친 자리에 속살이 드러나고

빛이 쏟아져 나왔지요

나는 그만 아기가 되어 한참동안 보듬고 쓰다듬고

얼굴을 파묻었을 때는 맥박소리가 들려오고

숨이 턱 막혔었니더

내가 오는 줄 알고

미리 나뭇잎으로 길을 덮어두고

아삭아삭한 소리까지 그 속에 갈무리해 두었디더

나는 낙엽을 밟으며 산등을 넘고

어매는 그 소리에 옷고름을 풀었겠지요

적삼 속에서 영일만 바다가 아장아장 걸어 나오고

해안선이 출렁거리고

몽실몽실한 백사장이 예전과 같았니더

이 젖의 힘으로 여태껏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 살고 있고

하늘 가득 씨앗들이 날아오르고

파릇파릇 아기 부처들이 자라나고 있었니더







 커피 마시는 개 | 인스티즈


정호승, 무인등대

 

 

 

등대는 바다가 아니다

등대는 바다를 밝힐 뿐

바다가 되어야 하는 이는

당신이다

 

오늘도 당신은 멀리 배를 타고 나아가

그만 바다에 길을 빠뜨린다

길을 빠뜨린 지점을

뱃전에다 새기고 돌아와

결국 길을 찾지 못하고

어두운 방파제 끝

무인등대의 가슴에 기대어 운다

 

울지 마라

등대는 길이 아니다

등대는 길 잃은 길을 밝힐 뿐

길이 되어야 하는 이는 오직

당신이다







 커피 마시는 개 | 인스티즈


김사이, 커피 마시는 개

 

 

 

생후 5개월째인 발발이는

화원 안을 뛰어다니며 매일 사고를 친다

하루에 석 잔 넘게 커피를 마시는 그놈은

인간으로 산다

 

남자 직원이 두들겨 패며

가랑이 밑으로 쏙 들어가 찍소리도 않다가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면 그제야 발라당 뒤집어진다

슬슬 눈치를 보며 꼬리를 살랑거릴 때

어김없이 놈에게 커피 한 잔이 수여된다

개팔자가 상팔자 맞는가

하는 짓이 낯 뜨거워 붉어진 채 돌아서는데

 

야성은 어디에 버렸는지

재미 삼아 때리는 매질을 고스란히 맞으며

보답인 양 던져주는

커피와 샌드위치에 길들여져 간다

너는 살 만하니?

짖지 못하는 나도 놈과 다를 게 없다

내가 나를 버리고 있나 보다

 

천덕꾸러기 그놈은

시들고 상처가 난 꽃들과 난 뿌리들

수북히 쌓여 있는 구석으로 달려가

거품 물고 먹어댄다

가끔 그렇게 미친 행동을 한다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커피 마시는 개 | 인스티즈


전영관, 개 같은 봄날

 

 

 

열차처럼 개나리 무더기가 지나가는 정오

아스팔트에도 겹겹 현기증이 쌓여있다

몸살인지 허기인지를 지우러 들어간 식당

이 동네선 눈치 보이는 음식이라는 듯

황사 분위기의 여주인을 중심으로

식탁들만 공손하게 엎드려있다

 

개장국 한 그릇 주문하며 앉아버렸다

울음이 흘러내리는 길목에 간판 건 식당

불 지르기 좋게 마른 봄날인데도

방석이 눅눅하다 참지 못할 일이라도 당했는지

뚝배기는 식탁에 올라와서까지 부글거린다

고깃점은 어금니에 짓이겨지면서도 비명이 없고

허연 아랫도리를 된장으로 대충 가린 냉이를

햇빛이 집적거린다 다들 얼굴 젖어있는

저 위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몸살이 아니라 허기였다며 국물은

구수하게 넘어간다 녀석도 좋아했던 맛이다

 

잘라버리겠다는 기세로 내리꽂히는 햇빛 사이로

개장국 건더기처럼 느릿느릿 걷다가 굴뚝을 보았다

화장(火葬)이 끝나지 않았는지 희미한 연기가 올라온다

지하철에 뛰어들어 뭉개진 허벅지 한 짝을

끝내 맞춰주지 못하고 녀석에게 수의를 입혔다

개장국에 소주를 좋아했던 내 친구

점심도 거르고 절뚝거리며, 뛰어가고 있다







 커피 마시는 개 | 인스티즈


김충규, 시름에 대하여

 

 

 

시름시름 앓는 내 시름을 먹고 새가 살아간다

내 속의 쌓이는 시름을 먹고 통통 살이 찐 새

시름을 먹고도 시름을 모르는 새

시름시름 앓지도 않는 새

 

극지에서도 얼지 않을 시름

사막에서도 녹지 않을 시름

 

시름이 쌓이고 쌓여 잠적한

잠적하여 영영 돌아오지 않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이 잠적하자

그의 가족이 하나 둘 시름시름 앓아누웠다

 

하늘을 몰라 날개를 가졌어도 날아보지 못한 새

시름이 유일한 벌레인 줄 아는 새

 

시럽으로도 제조할 수 없는 시름

 

날려 보내고 싶은데

그 새를 날려 보낼 하늘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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