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군이 조선에서 군량을 구했을까 못 구했을까?
<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 키타지마 만지 >
① 6월1일 일본은 무인지경의 평양성에 들어와 군량미 수만석을 입수했다.
이 군량미는 '임금께서 평양성에 당도할 무렵, 식량부족을 걱정한 조정에서는 여러 고을의 전세(田稅)를 평양으로 옮겨 두었었다. 그 양이 무려 10만석이 넘었는데 그것 또한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라고 하듯이 국왕의 평양 이주에 의해 여러 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이다.
② 1593년 3월 13일, 송응창의 지시를 받은 부총병 사대수는, 배하의 김지귀와 조선 왜통사 김선경 등을 서울에 잠입시켜, 용산에 있는 일본군 군량창고 23개소(일설에는 13개소)를 불화살로 태워버렸다.
이 용산창은 원래 조선국가 조세미 창고로, 서울 함락 후, 일본군은 그 조세미를 군량으로 했던 것이다.
이것은 앞에 언급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이 히젠 나고야(肥前名護屋)에 보낸 주진장(注進状)에서 말한 1만4천석의 군량미였다.
(역주: 이 군량미가 서울에 모인 왜군의 2개월분이라고 했음)
(역주2: 이 미츠나리의 보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임진왜란과 히데요시, 시마즈, 이순신 - 키타지마 만지')
2) 혹시나 '서울이랑 임금님 있던 곳은 이야기가 다르다!'고 변명할 까봐, 스윽~
< 분로쿠/케이쵸의 역, 공허한 진 - 카미가이토 켄이치 >
각지의 성에서 손에 넣은 병량은 풍부하여, 부족하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리군에게 이것을 굶주리는 민중에게 주고자 하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조선 민중이 굶주려서 단지 (곡식을 달라고) 비는 것을, 모리 군병은 '베어 넘기니, 눈 둘 데가 없었다(역주: 편지 속에서 왜장 모리 모토나리 본인의 감상)'.
(역주2: 침략 군단장에게 보낸 4월 23일의 조선 지시(高麗国中掟)에는 굶주린 백성이 있으면 구제하라고 되어있음)
* 당시 모리 모토나리의 편지(조선이 넓다고 한 바로 그 편지)
"성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 없는데, 그게 모두 대관소(代官所)라 들었으며, (대관은) 2년 3년으로 바뀌는데, (그 쌀은) 모두 조선국왕의 소유로, 그 곳의 군량과 그 밖에 많기가 한이 없으며, (상태가) 나쁜 것이나 불탄 것도 금령(法度)을 내려, 병량의 빠짐이 없었다."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는 건,
1) 역시나 조선은 읍성 국가였다는 것.
2) 조선의 관곡이 왜군의 침략 물자로 접수됐다는 것.
3) 대관소라는 것은, 편지를 쓰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평생 봉건제만 보고 산 사람들이다보니, 중앙집권제에 대한 설명이 『국왕이 있고, 그게 다 국왕의 직할지로 대관(代官: 영주 대리인)이 파견된다』는 식.
항간의 소문이 아니라, 모리 모토나리는 왜군에서 임진왜란 최대투자자이자 현지 고위 지휘관.
3) 이래도 조선이 가난해서 털어먹지 못 했다고? 자 더 보여주지.
<천하통일과 조선침략 - 이케 스스무 >
① 그런데, 조선에 건너간 각군은 각지에서 병량이 윤택하다는 것을 보고하고 있다.
가장 빨리 부산에 상륙한 제1군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미 나고야 도착전인 히데요시에 대하여, '고려의 성들 10여 개소 달아남, (중략) 나라의 지도를 헌상, 성들에 군량 2~3천석씩, 세츠노카미(摂津守=유키나가)가 봉(封)을 붙이고 부교(奉行:담당)을 둠'이라 보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의 성들에 쌓아둔 군량이 코니시군의 관리하에 놓였다는 것만 보고하고 있다.
또한 상륙 몇일 후 카토 키요미사(加藤清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연서장(連署状)에서도, '여러 군의 병량은, 본국에서도 그런 바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래아래까지 만족하고 있음', '여러 성들에도 병량이 많이 있으므로, 사람을 남겨 두어, 오실 때 쓸모있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한시 바삐 와주시길 말씀드림'이라는 것이 보인다.
② 병량보다 군대를 우선적으로 운송하기 때문에 병량부족의 염려가 있지만, 히데요시는 조선내륙부에도 병량이 윤택하게 있다고 생각하여, 더욱 그 확보에 노력하도록 명하고 있다.
(중략: 왜장 안코쿠지 에케이는 영산/현풍 등지를 둘러보고)
"이 나라는 병량이 많아서 말로 다 할 수 없고, 일본의 里(3.9km)정도에 영산, 현풍 같은 성들이 있고, 1개의 성에 백미 4~5천석, 흑미, 대두, 보리 이하 잡곡도 창고에 있어 그 수를 알 수 없음.
고려인은 여름에 술을 차게 마시니, 얼음 창고도 5칸 3칸 정도 있었음."
(역주: 가난한 나라가 얼음도 먹네? )
③ (중략: 앞서 유키나가의 보고와 에케이의 기록은 뉘앙스가 다른데)
병력수송(무기/탄약 포함)을 병량 보급보다 우선하는 결정하에서는, 조선측 비축미를 침략 여러 다이묘가 접수하여, 그 일정부분을 유용한는 것은 현실적인 대응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실제, 모리 가문의 요시미 모토요리(吉見元頼)의 가신이었던 시타세 요리나오(下瀬頼直)가 쓴 朝鮮陣留記 등을 살펴보는 한, 결과적으로, 혹은 실태로서, 침공군의 병량은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을 주축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 그 요시미 모토요리의 조선 일기(吉見元頼朝鮮日記)를 보면
- 5월 25일, 세히산(성산)에서 4~5리 동쪽 에 나가 한 무리의 집들에 머무르며 백미창고, 벼창고, 또한 무구를 취했다. 영주의 것이다.(관아라는 것)
- 6월 30일, 예안이라는 성에 당인(조선인)이 귀순을 위해 들어감 (중략) 성내의 방비는 단단하며, 무구, 널판지 등의 창고가 있고, 말린밥, 얼음창고, 잣창고 등이 있다.
4) 해정창(海汀倉) 전투는 모르지?
한극함이 북관6진의 병력을 이끌고 키요마사의 북상을 저지하러 내려와.
키요마사의 군대는 해정창에 들어가 쌀가마니를 쌓아서 방어를 해.
『 창고에 갇힌 적은 곡식 섭을 성처럼 쌓은 후 그 안에서 우리 군사의 활을 피하면서 조총을 쏘아댔다 - 징비록(서해문집) 』
그 쌀은 무슨 쌀일까?
그런 세곡 창고가 한 둘일까?
전투 다음날 키요마사는 가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투 양상과 함께 창고에 쌀이 많으니까 담당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음.
『蔵共ニ兵糧たくさんニ在る事に候問、是又心易かるべく候、則ち、奉行として保田善介, 吉村橘左衛門残置き候』
5) 곽재우는 아니?
곽재우는 관곡을 털었는데, 경상 순찰사 김수는 그걸 반란군으로 봤고, 김성일이 중간에 열심히 의병이라 변호해서 화를 면했지 않는가.
그리고 그 관곡을 노린 도적의 예도 많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과 그 역사적 고발 - 키타지마 만지 >
① 싸움이 길어짐에 따라, 무기 병량이 곧 부족했다.
그 때문에, 곽재우는 공성이 된 경상도 초계성에 있던 관의 무기와 병량을 입수하여 부족을 보충했다.
이 때 선녕에 있던 정대성이라는 자가 '무리를 지어, 도적을 만들어' 그 수괴가 되었다.
이를 본 협천군수 전견룡은 곽재우도 정대성과 같은 부류라고 보고, 반란도적이라고 규정했다(선조실록 선조25년 6월 병진).
또한 앞서 용인 전투에서 패배를 맛본 경상도 순찰사 김수도 곽재우의 의병을 반란군으로 의심했다(선조수정실록 동년동월).
② 이처럼 김수는 곽재우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곽재우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에 대해,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은 곽재우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김성일은 경상도 단성에서 곽재우와 회견하고, '그 사람은 담용 있으면서도 심모원려 없고 (중략) 이 위급한 때에 있어, 그 같은 사람을 다루어 쓰지 않으면 무익한지라, 즉시 선녕에 돌격장의 칭호를 보내 그로 하여금 왜를 치게 하여야 함(선조실록 동년 동월)'이라고 조선 국왕에게 보고하고 있다.
6) 기타.
* 그리고 사원의 약탈은 왜 빼먹나?
불국사는 키요마사가 태웠다메?
(개성을 함락시킨 몇일 뒤에도 개성의 사원을 약탈함)
* 왜군의 현지 지배 체계 구축은 카토 키요마사의 함경도 점령을 공부할 것.
* 점령지에서 사람들 끌고 오고, 잡아두고, 짐 나르는데 동원하는 것은, 호구일록(虎口日錄)도 공부해보고
(저자의 주장 : 침략전쟁 초기 어느 정도 군량을 일본에서 준비 → 개전 이후 약탈적 방식으로 현지 조달 → 전쟁 상황 악화로 일본에서 군량 조달) 페이스북
明智光秀 님의 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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