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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433 출처
이 글은 6년 전 (2019/10/30) 게시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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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준비 없이 온다 | 인스티즈


김진기, 솔잎 바늘

 

소나무 아래 앉아 시집을 읽고 있는데

눈이 자꾸 글을 벗어난다

그때 가을바람 한 무리가 지나가면서

책장 위에 무엇인가 툭, 떨어뜨린다

바늘이다

어릴 적 할머니가 쓰시던 눈에 익은 그 바늘

끝은 아직 뾰족하다

밤마다 남폿불을 밝히고 내 양말을 깁던 할머니

그때마다 내 뒤꿈치도 따끔거렸지만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풀려

글이 저절로 눈 속으로 들어왔다

바늘 끝이 환했다

할머니의 바늘을 책갈피에 꽂고

시집을 읽는다

시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준비 없이 온다 | 인스티즈


고영민, 동행

 

 

 

길가 돌멩이 하나를 골라

발로 차면서 왔다

저만치 차놓고 다가가 다시 멀리 차면서 왔다

먼 길을 한달음에 왔다

집에 당도하여

대문을 밀고 들어가려니

그 돌멩이

모난 눈으로

나를 멀끔히 쳐다본다

영문도 모른 채 내 발에 차여

끌려온 돌멩이 하나

책임 못 질 돌멩이를

집 앞까지 데려왔다







 우리는 준비 없이 온다 | 인스티즈


정현종, 준비

 

 

 

우리는 준비 없이 온다

욕망은 준비 없이 움직이므로

시작은 그러했듯이

평생의 일들은 한번도

제대로 준비된 적이 없다

물론 또한

경황없이 떠날 것이다







 우리는 준비 없이 온다 | 인스티즈


김필규, 묶는다는 것

 

 

 

우리 아부지는 짐을 잘 묶는다고 동네에 소문이 났었다

일제강점기 공출 낼 때 벼 가마니 묶는 일로 아부지는 마을에 불려 다니셨다

아들녀석 객지 공부하러 나갈 때 부치는 짐도

부자(父子)의 인연만큼이나 팽팽히 묶었지만

부쳐온 짐을 내가 풀 때는 한 가닥만 잡아당기면 풀어지도록 했다

 

그러나 정작

당신의 생에 얽힌 묶임과 매듭은 끝내 풀지 못하고 가신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시신을 묶는 일은

그렇게 짐 잘 묶는 당신이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몸을 내어 주고 아무 말 없이 맡겨 두었었다

짐은 단단히 묶는 일도 중요하지만 풀 때 쉽게 풀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 아부지를 묶은 매듭

저승에 가서 쉬 풀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준비 없이 온다 | 인스티즈


이태수, 구름 한 채

 

 

 

구름 한 채 허공에 떠 있다

떠 있는 게 아니라 거기 단단히 붙들려 있다

한참 올려다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다

풀 것 다 풀어 놓고 클 태()자로 드러누워

꿈속에 든 건지, 미동조차 없다

 

아무리 끌어당겨도 아득한

내 마음의 다락방이 유독 큰 저 집

눈을 감았다 떠 보면

새들이 불현듯 까마득하게 날아올라

허공을 뚫고 있다

구름을 날카로운 부리로 마구 쪼아 댄다

 

그분은 이 한낮에도 캄캄한 마음

다듬이로 두드려 구김살 펴 주고

주름들을 다림질해 준다

나도 모르는 허물들마저 하나씩 지우면서

그중 유별나게 깊이 파인 영혼의 골을 메운다

궁륭 같은 골에 날개를 달아 준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구름 한 채 무참하게 이지러진다

며칠째 두문불출, 내가 구들장을 지고 있는

우리 집, 창 앞까지 낯익은 새들이 날아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들은 저희끼리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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