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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l조회 755 출처
이 글은 5년 전 (2020/1/06) 게시물이에요






1. 이방원은 당시 고려 과거에 급제한 문인 엘리트였다.


철혈 군주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사실 이방원은 당시 고려 과거를 급제한 문인 출신이다.


당시 군인 집안이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이성계로서는 너무 기뻐서 이방원의 문과 급제 사령장을 몇번 읽게 했다고 한다.


또한, 과거를 급제했기 때문에 당시 관직 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이방원은 조선 왕들 중 유일하게 과거 시험과 관직 생활을 한 인물이다.








2. 정몽주의 선죽교 암살은 사실 대낮에 일어났다.


킬방원의 시작을 알린 정몽주 암살은 사실 밤이 아닌 대낮에 이루어졌다.



공양왕 4년, 이성계가 황해도에서 머무르다 부상을 당하고 나서,


정몽주를 중심으로 반 이성계 세력이 득세를 하게 되고,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 일파가 귀양을 가게 되며,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친어머니의 3년상을 치루고 있던 이방원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황해도로 내려와


이성계를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와 다시 전세를 역전시킨다.


그후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인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하나,


뜻이 맞지 않자 선지교(현재 선죽교)에서 철퇴로 정몽주를 죽인다.



이를 알게된 이성계는 크게 화를 내긴 했지만,


당시 대낮에 길 한복판에서 정적을 때려죽인 과격한 방식으로 공포를 심어주었고,


당시 이렇다할 공적이 없던 이방원은 이 사건 이후로 확실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데 성공한다.







3. 단군 이래로 오늘날까지 국가 재정이 꾸준히 흑자를 기록한 때는 바로 태종 때이다.


당시 태종은 중국 화폐 제도를 모방하여 저화라는 일종의 지폐를 통용하기도 하고, 화폐 개혁도 실시하였다.


당시 조선의 교역 경제가 미비한 수준이라 당연히 실패하긴 했지만,


친명파였던 태종의 외교적인 정책으로 (당시 명나라는 세계 최고의 국가였다)


조공무역을 통해 실로 많은 이익을 올리게 되었다.


그로 인해 명나라에서 몇번이나 조선에게 조공 무역을 줄이자고 요청했지만, 태종은 쿨하게 씹었다.


다음 왕인 세종이 대규모 사업이나 개혁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도,


태종 때 기본적인 튼튼한 재력을 마련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4. 태종은 영락제와 홍무제를 모두 만나보았다.


왕자 시절, 태종은 명나라 사신으로 몇번 간 적이 있는데,


이때 홍무제는 물론이고, 영락제와도 만나서 만담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고 한다.


당시 태종이 영락제에 대해서 평하길 "연왕은 왕에만 머무를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고 후에 영락제는 태종과 비슷한 방식으로 황제 자리까지 오른다.







5. 태종은 명나라에게 저자세로만 나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정도전의 요동 정벌을 막고,


그후로는 조선이 계속 명나라에게 사대 관계로만 지내게 되었다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이다.



태종은 당시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통해 조공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보았으며,


우리 땅만큼은 지킨다는 방침을 고수하여, 당시 명나라가 조선 동북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을 직할로 통치하겠다고 말하자, 태종은 즉시 관련 역사 자료까지 수립하면서,


이를 토대로 명의 주장을 반박했으며, 결국 동북지역 여진족을 계속 관리하게 되는데 성공한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세계 최고의 제국 중 하나였고,


영락제의 치세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태종의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는 현명한 판단이였을 수도 있다.





6. 태종은 조선 최고의 갈굼왕이다.


신하를 갈구는데에는 세종도 있었지만, 태종도 세종에 뒤지지 않았다.


당시 고려 과거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였던 태종은 성리학적 지식이 관료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고,


수많은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정치적 능력,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뛰어난 용인술을 바탕으로,


신하들을 가지고 노는 왕이였다.



그가 가장 잘한 것은 현재로 치면 답정너 같은 스타일인데,


자신이 의견을 내면, 신하들이 반대를 하고, 그러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라는 식으로 화를 냈다.


신하들이 태종의 성에 당황을 하자, 농담이라고 웃으며 넘어가지만..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밀어붙였다고 한다.



찬성하면 어떻게 했냐고?


임금이 뭐라고 하면 신하들이 아부하기 바쁘다고 말하며 웃어 넘겼다고 한다.


물론 그 다음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은 동일.






7. 태종의 여성 편력은 심각한 수준이였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에 부합되는 인물이였던 만큼 사냥과 여자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자녀는 조선 왕들 중 가장 많았으며, 덕분에 부부관계도 매우 나빴다.



즉위 초기부터 원경왕후와 부부 싸움이 거의 일상이였으며,


원경왕후 또한 매우 다혈질의 성격이였기 때문에 태종의 바가지를 엄청 긁었다고 한다.


물론 태종의 성격도 장난이 아니였기 때문에 똑같이 화를 냈다고...



하루는 원경왕후가 태종의 승은을 입은 궁녀를 벌주자,


태종이 교태전 소속 궁녀와 내관을 모두 궁 밖으로 내쳤다고 한다.



왕권강화를 한다고 친정 가문은 박살을 내고도 모자라,


집 밖으로만 도는 태종이 원경왕후 입장에서는 매우 안 좋았을 것이다.






8. 태종은 남다른 자식사랑을 가진 자식 바보였다.


사극에서는 긴장감 조성을 위해 세종과 태종이 대립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만,


사실 태종은 자기 자식에게는 매우 따뜻한 아버지였다.



양녕이 망나니 짓을 하고 돌아다닐 때에도 끝까지 참아준게 태종이며,


양녕을 폐할 때에도 목 놓아 울 정도로 아꼈다고 한다.



양녕이 공부를 안한다고 곁에서 감시하라는 신하들의 말에,


오히려 부자 간의 사이만 나빠진다면 끝까지 아들을 배려해주었다.



또한 세종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는데...


아들이 하루종일 책만 보고 산다고 건강을 걱정해 책을 숨긴 일화,


또 고기 덕후였던 세종을 배려하여,


유언으로 '자기 상 중에는 세종이 고기를 먹게 해라.' 라고 말을 남겼다고 한다.



물론 그래도 왕권을 중요시 여겼던지,


세종에게는 죽기 전에 위협이 된다면 양녕을 죽이라고 했다고 한다.





9. 태종은 백성들에게 관대한 왕이였다.



당시 애들이 태종의 이름과 효령군, 충녕군의 이름을 붙이고 다니다가 잡힌 일이 있었다.


하지만 태종은 '애들이 놀다보면 그럴수도 있다.' 라고 시크하게 넘어갔으며,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이 창경궁을 구경하려고 궁 안에 침입했을 때에도


모르고 했으면 상관없다며 풀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억울한 백성이 있으면 북을 쳐서 청원이나 상소를 올릴 수 있는 신문고 또한,


태종 1년 때 만들어진 제도이다.





10. 고려 왕족인 개성 왕씨를 보호하기 시작한 것은 태종 때부터 이다.



태종 치세 때 고려 왕족 출신 한명이 체포되었는데,


그를 죽여야한다는 신하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역성혁명 후 전조의 후손을 멸망시키는 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이성계의 조치를 뒤집은 발언이여서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자,


"이씨에 도가 있으면 백 명의 왕씨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슨 걱정이겠는가?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더라도 천명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 라고 말하며,


쿨하게 신하들의 의견을 씹고 그를 살려주었다고 한다.





11. 숙청의 대명사, 태종이 죽인 사람의 숫자는 연산군, 선조, 광해군, 숙종 때보다 적다.



태종은 자신을 도와준 공신을 싹 숙청한 것으로 유명한데,


자신의 오른팔이였던 이숙번은 물론, 처갓집과 사돈집까지 모두 박살을 내버렸다.


심지어 이숙번의 죄목은 거만하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태종이 홍무제나 영락제처럼 피의 숙청을 한 사람은 아니였다.


태종은 사건이 터지면 '주모자'만 처벌하는 편이였고,


대부분은 관직에서 폐하여 목숨을 살려주는 편이기도 하였다.



물론 민씨 4형제는 그렇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태종의 입장에서는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 세력이 크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만, 이 모습의 정 반대의 모습을 띤 세조는 자신의 공신들을 후대하였고,


그 결과 훈구파가 득세하여 나라를 말아먹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12. 태종은 간언과 사관의 언론 중요성을 인정하는 왕이였다.



태종은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신하들의 말을 잘 안들었지만,


끝까지 사관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신하들이 간언을 한다고 폐하거나 처벌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진절머리 치면서도 끝까지 신하들이 간언을 하게 놔두었다.



이는 일반적인 폭군과는 다른 면모인데,


아무래도 언론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임금이 너무 막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간언하는 신하들을 모두 숙청하는 피의 숙청을 벌인 영락제는


그 시기에는 엄청난 황권을 수립하였지만,


그 후에 이게 발목을 잡아 명나라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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