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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392 출처
이 글은 6년 전 (2020/1/14) 게시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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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한다 | 인스티즈


황희순, 숨바꼭질

 

 

 

커튼 사이로 칼날 같은 햇살이 들어온다

세상과 통하는 길이 저랬다, 좁은 그 길을 여닫으며

칼날 같은 말과 눈빛만 오래 주고받았다

꼭꼭 커튼을 여미지만 여민 틈새로

더욱더 예리한 빛이 스며든다

칼이 들어와도 다시는 커튼을 열지 않을 거야

살을 파고드는 빛은

들숨과 날숨으로 천천히 삭이면 돼

낮은 천장에 닿은 숨 절절 녹아내리는, 여기는

아늑한 무덤

아들아, 어미의 실종을 말하지 마라

영원히 종적을 감추고 싶지만, 꼬리가 너무 길어

비어지려는 징그러운 이 긴 꼬리를

손에 둘둘 말아 쥐고, 잠시

칼날을 피해 숨어있을 뿐이니, 아들아

어미의 무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한다 | 인스티즈


조은, 꽃과 꽃 사이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과 꽃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도드라지게 아름다운 꽃들은

그 거리가 한결 절묘하다

 

꽃과 꽃 사이 꿀벌이 난다

안개가 피어오른다

낙타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바람이 살얼음을 걷으며 분다

 

향기가 어둠의 계단을

반짝이며 뛰어 오르내린다

 

봉긋해지는 열매들은

서로의 거리를

앙큼하게 좁힌다







 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한다 | 인스티즈


정현종, 그 사이에

 

 

 

순간에서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협곡이 있고

산맥이 있다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그림자들,

무거워, 한숨과도 같고

가벼워, 웃음과도 같은

그림자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그림자들







 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한다 | 인스티즈


장영숙, 초대

 

 

 

먼 산처럼 무심하던 그가

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한다

백 년 된 아름드리 벚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황홀하다고

섬진강 숭어처럼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살다 보니 이렇게

신의 음성을 듣게 되는 날도 오는구나

한 백 년쯤 더 기다려야 올 것 같은

경이로운 시간들이

그와 나 사이에도 이렇게 오는구나

순고 앞 정류장에서 64번 버스를 타고

나는 그가 부임해온 상사 초등학교를 찾아간다

이사 천을 끼고 굽이굽이 아름다운 상사길

찻집 연우당을 지나 작은 면사무소를 지나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게 꽃 잔치가 열린 그곳

그 곳에 그가 있다

30년 먼 산보니 같던 그가

잘 익은 나무향기를 내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한다 | 인스티즈


박영희, 단 하루라도 좋으니

 

 

 

단 하루라도 좋으니

형광등 끄고 잠들어봤으면

누군가와 밤이 새도록 이야기 한 번 나눠봤으면

철창에 조각난 달이 아닌 온달 한 번 보았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따뜻한 방에서 한숨 푹 자봤으면

탄불 지핀 아랫목에서 삼십 분만 누워봤으면

욕탕에 들어가 언 몸 한 번 담가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흠뻑 비에 젖어봤으면

밤길 한 번 거닐어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잠에서 깨어난 아침 누군가 곁에 있어주었으면

그리운 이의 얼굴 한 번 어루만질 수 있었으면

마루방 구석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들 그만 죽였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딸에게 전화 한 번 걸어봤으면

검열 거치지 않은 편지 한 번 써봤으면

접견 온 친구와 한 시간만 이야기 나눠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단 하루라도 좋으니

내 방문 내 손으로 열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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