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위나라의 3대 장군을 뽑는다면
조인,장료,하우연을 뽑고 싶습니다..
그러나 삼국지게임이나 연의에서 너무 저평가 되어서
요즘 다시 재평가가 되고 있는 인물중에 대표주자입니다.
사실 그가 형주를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조운급의 능력은 되야 한다고 생각이 드는데
철벽수비란 말이 무엇인지 보여준 조인.........
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인은 168년생으로 조조와는 13년이라는 큰 나이차를 가진 사촌아우입니다. 223년에 56세의 나이에 대사마와 대장군을 역임한 최고위의 무장임에도 최전선을 방비하며 병사합니다. 조인은 젊은시절 무척 거칠고 난폭하며 말타기와 활쏘기 등은 물론이고 각종 무술에 능통해 조조의 일족 하후씨와 조씨 일족들 중에서 가장 무인으로서의 기질이 선명했습니다. 그래서 조조도 조인을 불러 지휘장수의 용맹한 돌격능력이 요구되는 기병부대의 지휘관을 맡기게 됩니다. 군인이 된 후 조인은 어릴적의 난폭함을 버리고 새사람이 된 듯 법규를 준수하고 늘 행동에 모범을 보여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큰 추앙을 받았습니다. 조조를 따라 각지를 전전하며 전공을 세우고 특히 적벽의 패배 이후에는 조조를 맞아들여 무사히 허도로 퇴각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1년여게 걸쳐 주유를 막아내고 그에게 치명상을 입힘으로써 주유를 죽게만든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인은 겹겹이 둘러싸인 오군의 포위를 돌파해 부장 우금과 그 병사들을 구출하고 오의 무장들을 물리치는 용맹을 떨쳐 보좌관 진교로부터 "우리 장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장수"라는 극찬을 들었습니다. 그후에도 마초와의 전투 등에서 본진을 든든히 방비하고 번성을 수비하며 관우의 처절한 맹공과 강의 범람등으로 고립되어 우금과 방덕의 원군이 괴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분전해 끝내 서황의 원군과 오군 여몽의 형주점령으로 관우를 격퇴하고 형주전선을 방어합니다. 이후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자 대사마와 대장군 등을 역임하고 56세를 일기로 하늘이 내린 명장은 눈을 감습니다.

일생
궁술, 마술, 수렵을 좋아해서 190년에 조조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천 명의 군사를 거느려서 조조의 부하로 들어왔다. 그 이후에 조조 아래에서 행봉교위(厲鋒校尉)로서 대도겸전, 대원술전, 관도 전투 등에서 활약한다. 209년의 남군 공방전에서는 오의 주유(周瑜)가 인솔하는 6천 기의 군대와 싸워서 궁지에 빠진 부장 우금(牛金)을 구했다. 이후에도 마초(馬超) 토벌전에 따른다.
218년에 과도한 군대 일이 원인으로 관우(關羽)와 내통 해서 모반을 일으킨 완의 호족의 후음·위개 등을 방덕(龐德)과 함께 토벌 해서 남양태수·동리곤과 합류했다. 다음해 219년 정월에 완성을 함락 시키고 후음 등을 즉각 처형했다.
그 이후에는 번성을 거점으로 사용하고 관우와의 형주 쟁탈전에서는 유비(劉備)의 원군 도착까지 적군의 맹공을 막는 등 많은 공적을 올렸다. 이 전공으로 도정후(都亭侯)에서 안평후(安平侯)로 승격했다.
관우가 오의 군대에 의해 사망하고, 220년 조조가 사망하면서 그 기세를 타서 오에서는 진소가 양양을 빼앗았다. 조인은 조서(詔書)를 받아서 서황(徐晃) 등과 함께 진소를 무찔러서 양양을 탈환했다.
젊은 시절에는 꽤 난폭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소외당하고 상속권을 아우인 조순(曹純)에게 빼앗기는 등 불운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조조 막하에 들어가서 무장으로서 과거의 행위를 반성하고, 성장한 다음은 엄격하게 법을 준수해서 항상 법과 대조하고 행동을 행하는 등, 위나라의 여러 장군의 견본이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또한 거기장군(車騎将軍)·도독형(都督荊)·양주(揚州)와 익주제군사(益州諸軍事)를 역임했고 한층 더 올라가 진후(陳侯)에 영봉 되었다.
말년인 조비(문제) 때의 시대에는 합비에서 오군과 대치해서 대장군(大將軍), 그 다음에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었다. 222년,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인솔해서 유수에 진군했다. 223년 3월, 중주공략의 의도를 숨겨 다른 지점을 공격한다고 선전하는 것으로, 오의 유수독(濡須督)이었던 주환(朱桓)을 속여서 오군을 분산시키는 데에 성공했지만 주환이 자신의 군대를 약하도록 보이게 만들어서 그것에 속아 패배했다.
223년(황초 4년) 3월 19일에 55세에 병으로 죽어서 충후(忠侯)의 시호가 내려졌다.

조인의 군사적 경력
조인은 조조가 거병한 이래 기병의 지휘관을 맡으며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웁니다.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했을때 도겸군의 대장 여유를 격퇴하였고 이후 구원으로 달려온 도겸군의 여러장수들도 기병을 인솔하여 모두 격파시키는 등 뛰어난 기병장군으로 위용을 뽐냅니다.
다음으로는 조조가 장수군에 의해 패주할 때에는 부하장수들과 병사들을 독려하며 그 위용을 떨쳐 추격하는 장수를 역으로 패퇴시켜버리기도 합니다. 또한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무장 사환과 함께 원소군의 운반식량을 기습하여 깡그리 불태워버리는 등 관도전에서의 대승에도 기여합니다. 그리고 여남지역에서 유비가 책동하여 조조의 배후를 위협하자 조인이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이를 평정하여 조조가 아무 걱정없이 화북을 쟁패하는데 큰 수훈을 올립니다.
다음은 주유와의 공방전을 들 수 있겠습니다. 주유는 마침 적벽의 기세를 타고 조조가 점령하고있는 형주를 향하여 짓쳐들어옵니다. 조인의 부장인 우금이 조인에게 청해 분연히 성을나가 분전했지만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오군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조인은 또한번 용맹을 떨쳐 겨우 수십기의 부하만을 이끌고 달려나가 용맹무쌍하게 활약, 우금과 그 병사들을 모두 구해 돌아옵니다. 이것을 본 성의 장사였던 진교가 "우리 장군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장이시다."라고 감탄했을 정도로 그 활약은 조인의 용맹을 드날림은물론 그 명장 주유를 상대로 1년이상 버텨내며 끝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상을 입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후 조인은 동관에서 여러 무장들을 지휘하며 위수에서 마초를 격퇴시켰고 번성을 수비하는 중 형주의 총독 관우가 북벌을 일으켜 번성으로 밀고 들어오자 마침 강이 범람하여 우금과 방덕의 원군이 수몰되어 괴멸당하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역경을 딛고 분전하여 서황의 원군과 오의 협력에 의한 형주기습으로 관우를 대파하고 끝내 관우 또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조조의 사후 말년의 조인은 조비에 의해 대사마가 되고 하후돈의 사후 대장군도 역임하지만 늘 최전선을 지키며 위나라의 든든한 성벽이 되어주었습니다. 오나라를 상대로 비록 큰 성과는 아니었지만 시시각각 위협함으로써 국경의 분쟁을 최소화시켰습니다.
조인이 갖춘 장군으로서의 능력
조인은 무용과 통솔력 그리고 지략과 인간적 매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원래부터 무예가 뛰어났을뿐더러 기병을 통솔하여 적을 돌파하여 무찌르는 등 돌격과 돌파전술, 전략과 전술적인 기동전에 일가견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역경에 처하여서도 분기를 떨쳐 병사들을 고무하고 스스로 군대의 선두에 서서 용맹을 떨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모습은 진교의 말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식견도 뛰어났던듯 조조에게 늘 유익한 조언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우금과 그 병사들을 구원하는 장면에서처럼 자기 부하들을 무척 사랑하는 인격적인 지휘관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조인은 또 매우 끈기가있는 인물인것 같습니다. 어지간히 능력이 있는 무장들도 어느정도 패색이 짙어지면 바로 패주를 해버리는 상황에서도 조인은 상당히 처절하게 열악한 상황에 처해서도 그것을 뒤엎고 승리의 열쇠를 거머쥡니다. 대표적 싸움이 바로 번성의 전투이지요. 이처럼 조인은 후방사령관 하후돈과 함께 조조군을 지탱해온 양 축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항상 솔선수범하고 법규를 준수하는 모습에서 그의 뛰어난 전투력을 논외로 치더라도 훌륭한 이상적인 군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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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 거리]
조인 요약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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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파의 조자룡? 형주의 조자효다!!]
삼국지에서 조씨들의 특색은 아마도 일당백 혹은 온 몸이 담덩어리인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조자룡은 유비로부터 "온 몸이 담 덩어리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과연 극찬이다. 얼마나 깡이 좋았으면 그런 평가를 받겠는가?
그러나 조인은 "담덩어리다"라는 말 정도로 그치지않았다.
조인은 "천인이십니다"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관우는 죽어서 무신이 되었으나 조인은 살아서 신 대접을 받은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적벽대전에서 조조는 만신창이가 되어 도망가기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조조는 조인과 서황에게 주유의 추격을 막으라는 명을 내린다.
조인은 적의 군세를 알아보기위해 우금(번성공략때 관우에게 빈 그 우금이 아님)에게 3백의 군사를 주어 정찰을 보낸다.
그런데 우금이란 놈이 멍청한 건지 주유라는 놈이 대단한건지 우금의 3백정찰대는 포위당하고 만다.
성에서 지켜보던 조인은 분개하는데
왜 분개한지는 알 수없다.
멍청한 우금때문인지...
아니면 위나라군대를 죽이지 않고 포위하고 가지고 노는 괘씸한 주유때문인지...
하여튼 조인은 강릉문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말 한필을 끌고 그대로 주유의 대군 속으로 질풍처럼 내달려 동분서주 칼날을 휘두르며 먼저 우금을 구해 성에 데려다 놓고 다시 대군 속에 뛰어들어 나머지 3백의 군사를 구해낸다.
300명의 정찰병중에 사상자는 겨우 십수명 밖에 되지않았다.
성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진교는 조인에게
"천인이십니다"
라고 말한다.
단신으로 8천기에 뛰어들어(정사기준)아두를 구한 조운이나 손권을 위해 3번씩 적진에 뛰어들어간 주태나 3백병사를 위해 대군을 동요시키며 모두를 구해낸 조인,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참군인이 아닌가?
적어도 조인의 능력은 재평가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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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연의의 피해자중 한명인 조인에 대해]
대략 조조, 손권의 인재들이 피해를 봤군요... 특히 제갈량과 맞섰던 자는 거의 피해를 크게 입었죠. 그 피해자중 한명인 조인에 대해 다뤄볼까 합니다.
다들 조인이라면 어떤점이 생각나십니까? 다른 장수들 처럼 용맹이 뛰어난 장수 정도로 생각 하실 겁니다. 조조의 빽을 타고 출세한 인물이라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인은 다른 유명한 인물들과 같이 아주 뛰어난 장군이었습니다.
밑의 글은 삼국지정사의 조인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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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의 자는 자효(子孝)이며 조조의 사촌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 말타기, 창던지기, 사냥을 좋아했다. 훗날 호걸들이 일제히 일어났을때, 조인도 은밀히 젊은이들을 모아 천여명을 이끌고 회수와 사수 일대를 두루다녔다. 마침내 조조를 따라 별부사마(別部司馬) * 행려봉교위(行勵鋒校尉)를 대행했다. 조조가 원술을 격파시킬때 조인이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군은 자못많았다. 조조를 따라 서주를 정벌할때, 조인은 항상 기병을 인솔하여 군대의 선봉이 되었다. 그는 별도의 군대로 도겸의 대장 여유(呂由)를 공격하여 그를 격파시키고, 돌아와 팽성에서 대군과 합류하여 도겸의 군사들을 크게 무찔렀다. 후에 비(費) * 화(華) * 즉묵(卽墨) * 개양현(開陽縣)을 공격하였다. 도겸은 다른 장수를 보내어 이들 여러현을 구하려고 했지만, 조인은 기병으로 이들을 격파시켰다. 조조가 여포를 토벌할때, 조인은 별도의 군대로 구양(句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여포의 대장 유하(劉何)를 사로잡았다.
조조가 황건무리를 평정하고, 천자를 맞이하여 허현에 수도를 세웠을때, 조인이 여러차례 공을 세웠으므로 광양태수(廣陽太守)로 임명하였다. 조조는 조인의 용기와 지략을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광양군의 지방관이 되도록 하지않고, 의랑의 신분으로 기병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조조가 장수(張繡)를 정벌할때, 조인은 별도의 군대를 인솔하여 가까이있는현을 공략하고 그곳의 주민 남녀 3천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조조의 군대는 돌아오는길에 장수에게 추격당했는데, 군사력이 불리하고 사기가 꺽여있었다. 이때 조인은 장수와 병사들을 격려하여 떨쳐 일어나도록 하였고, 조조는 그의 용기에 감동했다. 마침내 조인의 부대는 장수를 무찔렀다.
조조가 원소와 오랜기간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때, 원소는 유비를 보내어 은강(隱彊)의 여러현을 공격하였고, 여려현에서는 군대를 일으켜 유비에 대항했다. 이로 인해 허창남쪽의 관리와 백성들은 불안해했으며 조조는 이점을 매우 걱정했다. 조인이 조조에게 말했다.
"남방 각 현의 관리와 백성들은 우리 대군이 목전에서 마침 원소의 대군과 대치하고 있어 정세가 위급하므로, 이 형세로는 병사를 나누어 서로 구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굳센 병사들을 이끌고 성아래까지 왔으니, 그들이 반기를 든것은 실로 당연합니다. 유비는 원소의 군사들을 인솔하게 되었으므로 그 군사들을 제대로 다룰수 없을것입니다. 유비를 공격한다면 격파시킬수 있을것입니다."
조조는 그의 의견이 좋다고 생각해 그에게 기병을 주어 유비를 공격했고, 자신은 유비의 군대를 격파시키러 달려갔다. 조인은 자주 반기를 들었던 여러현을 전부 수복하고 돌아왔다. 원소가 별장(別將) 한순(韓荀)을 파견하여 조인의 군사와 후방이 연결되는 서쪽길을 끊어놓도록 하였는데, 조인은 계락산(鷄落山)에서 한순을 공격하여 그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이로부터 원소는 감히 다시 군대를 나누어 출동시키지 못하였다. 또 조인은 사환 등의 장수들과 원소 군대의 식량을 운반하는 군대를 습격하여 그 식량을 불태웠다.
하북이 이미 평정된후, 조인은 조조를 따라가서 후관을 포위했다. 조조가 명령을 내렸다.
"성이 함락되면 성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매장시키시오."
성은 수개월이 지나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조인이 조조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들에게 살수있는 출구를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지금 공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고, 성 안에서 장수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은 견고하고 식량이 많이있으므로, 그들을 공격하면 우리 병사들은 부상을 입을것이고, 그들을 포위하여 달아나지 못하게 지킨다면 매우 오랜 시일을 낭비해야 됩니다. 지금 병사들은 견고한 성아래 머물고 있는데, 필사적으로 적군을 공격하는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조조가 그의 의견을 다르니, 성안 사람들이 항복했다. 그래서 조조는 조인이 세운 앞뒤의 공적을 기록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했다.
형주를 평정하러 갔을때, 조조는 조인을 정남장군으로 임명하여 강릉(江陵)에 주둔하면서 오나라 장수 주유(周瑜)를 상대하도록 했다. 오래지않아 주유는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공격했는데, 수천명의 선봉대가 막 도착했을때, 조인은 성으로 올라 그들을 바라보고 3백명의 병사들을 소집하여 부대장 우금을 보내 그들과 싸우도록 했다. 적군은 많고 우금의 병사는 적었으므로 적군에게 금방 포위되었다. 장사(長史) 진교(陳矯)등은 모두 성위에서 우금 등이 삽시간에 소멸당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좌우의 장수들이 모두 얼굴빛을 잃었다. 오직 조인만이 의기가 치솟고 분노가 절정에 이르러 좌우의 장수들에게 말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니, 진교 등이 함께 조인을 붙잡으며 말했다.
"적군이 너무 많아 감당할수 없습니다. 설령 수백명을 없앴다고 하더라도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알면서도 장군 혼자 그들에게 가실수 있습니까?"
조인은 이말을 듣지 않고,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그 휘하의 장수 수십명의 기병을 이끌고 성을 나갔다. 적군으로부터 백여 보쯤 떨어진 곳의 도랑에 다다랐는데, 진교 등은 조인이 마땅히 도랑가에 머물것으로 생각하고 우금을 원조하는 형세를 취하려고 했지만, 조인은 직접 도랑을 건너 똑바로 앞으로 가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우금 등이 곧 탈출할수 있었다. 남아있는 병사들이 아직 포위망을 둟고 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조인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겹겹의 포위망을 뚫고 우금의 병사들을 구출하였다. 그곳에서 죽은 병사는 몇명뿐이었고, 적군은 물러났다. 진교 등은 처음에 조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었는데, 조인이 성으로 돌아오는것을 보고는 찬탄하며 말했다.
"장군은 정말로 하늘에서 내린 사람이구나."
삼군이 그의 용맹함에 탄복했다. 조조는 그의 의기에 감복하여 안평정후(安平亭侯)에 봉했다.
조조가 마초를 토벌할때, 조인에게 안서장군(安西將軍)을 대행하도록 하여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고 동관(潼關)을 막도록 하였으므로, 조인은 위사 남쪽에서 마초를 격파시켰다. 소백(蘇伯)과 전은(田銀)이 반란을 일으켰을때 조인을 효기장군으로 임명하고, 칠군(七軍)을 통솔하여 전은을 토벌하도록 했는데, 그들을 격파시켰다. 조인은 또 정남장군 가절에 임명되어 번에 주둔하며 형주를 진무했다. 후음(侯音)이 완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켜 부근에 있는 현을 황폐화시키고 수천명의 백성들을 겁주엇을때, 조인은 제군을 이끌고 후음을 공격하여 격파시켰으며, 그 머리를 베어 주둔하고 있는 번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즉시 정남장군으로 임명했다.
관우가 번성을 공격했을때, 마침 한수가 범람하여 우금 등 칠군은 모두 물에 빠졌고,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다. 그 당시는 오직 조인이 이끄는 수천 군사와 말만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성에서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은 몇 판(板; 1판은 높이가 2척이고, 폭이 1장쯤 됨)으로 쌓았기 때문이다. 관우는 배를타고 성으로 와서 몇겹으로 포위하여 안과 밖의 통로는 끊어놓앗다. 식량은 바닥이 나려고 하는데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조인은 장수와 병사들을 격려하며, 그들에게 자신은 이 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임을 보여주었고, 장수와 병사들은 그에게 감동되어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서황의 구원병이 도착하였고 성밖의 물도 점점 줄어들었다. 서황은 성밖에서 관우를 공격하여 조인으로 하여금 포위망을 뚫고 나갈수 있게하니 관우는 퇴각했다.
조인은 어렸을때 행동이 방탕하였지만 성장하여 장수가 되면서 엄격하게 법령을 받들어, 항상 법조문을 옆에 놓고 그것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언릉후(焉陵侯) 조창(曹彰)이 오환을 정벌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자, 동궁에 남아있던 문제는 편지를 써서 조창에게 경계의 말을 하였다.
"대장이 되어 법을 받들어야 되는데, 정남장군(조인)처럼 하지는 않겠지!"
문제가 왕위에 즉위하자 조인을 거기장군에 임명하여 형주 * 양주 * 익주의 여러 군사들을 통솔하도록 했으며, 나아가 진후(陳侯)로 봉하고 식읍 2천호를 주니 이전것과 합쳐 3천5백호가 되었다. 조인의 부친 조치(曹熾)를 추증하여 시호는 진목후(陳穆侯)로 하고, 그의 묘를 지키는 집 10채를 지었다. 후에 문제는 조인에게 조서를 내려 완성으로 돌아와 주둔하도록 했다. 손권이 대장 진소(陳邵)를 보내 양양을 차지하도록 하자, 조인에게 칙명을 내려 그를 토벌하도록 했다. 조인은 서황과 힘을 합쳐 진소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양양으로 들어왔다. 조인은 또 장군 고천(高遷)등에게 새로 종속된 한수 남쪽의 백성들을 한수 북쪽으로 이주시키도록 했다. 문제는 사자를 보내 즉시 조인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또다시 조서를 내려 조인의 진영을 임영(臨潁)으로 옮기도록 하고 대사마로 승진시켰다. 다시 여러 군사들을 통솔하여 오강을 점거하고 합비로 돌아와 주둔했다.
황초 4년(223)에 조인은 시호를 충후(忠侯)라고 했으며,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조태(曹泰)가 뒤를 이어 후에 관직이 전동장군 * 가절까지 올랐으며, 영릉후(영陵侯)에 봉해졌다. 조태가 죽자, 아들 조초(曹初)가 뒤를 이었다. 문제는 또 조태의 동생 조해(曹楷) * 조범(曹範)에게 식읍을 나누어 주고 모두 열후로 삼았으며, 우금의 관직은 후장군까지 올랐다.
조인의 동생 조순(曹純)은 처음으로 의랑이 되어 사공군사(司空軍事)를 맡고, 호표기(虎豹騎)를 통솔하여 대군을 따라가서 남피를 포위했다. 남피의 우두머리 원담이 출전하였으므로 조순의 병사들을 대부분 전사했다. 조조가 그를 도우려 하자 조순이 말했다.
"지금 우리 군대는 천리나 와서 적들과 싸우고 있으므로 앞으로 나아가 적을 이길수없고, 물러나면 반드시 군대의 위엄을 잃게 될것입니다. 더구나 적지의 깊숙한 곳까지 홀로 들어온 군사들은 오래버티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지금 승리하여 교만해질것이고, 우리는 패배하여 신중해질것입니다. 신중한 우리 군사가 교만하여 느슨해진 적군과 싸우면, 반드시 이길수 있을겁니다."
조조는 그의 의견이 좋다고 생각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급히 공격하여, 원담은 패했다. 조순의 휘하에 있는 기병이 원담의 머리를 베었다. 북방의 삼군을 정벌할때, 조순의 부하 기병은 선우 답돈(踏頓)을 잡았다. 조순은 앞뒤의 공로때문에 고릉정후에 봉해지고, 3백호의 식읍을 받았다. 따라가 형주를 정벌할때, 조순은 유비를 장판까지 추겨하여 그의 두딸 및 군수품을 얻었고, 그들의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었으며, 진격하여 강릉을 항복시키고, 조조를 수행하여 초현으로 돌아왔다.
건안 15년(210)에 조순은 세상을 떠났으며, 문제가 즉위하며 위후(威侯)로 추증했다. 그의 아들 조연(曹演)이 작위를 이어 관직이 영군장군(영軍將軍)까지 올라갔다.
정원 연간에 평락향후(平樂鄕侯)로 봉해졌다. 조연이 죽자 아들 조량(曹亮)이 뒤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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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본다면 주유, 관우, 마초등과 대적했던 기록들이 있습니다. 앞의 3명만 봐도 조인의 상대가 어땠는지도 알 수 있죠. 하지만 조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아주 잘 지켜 냈습니다. 특히 관우를 상대로 끝까지 성을 사수한걸 보면 그의 지휘력과 용맹이 어땠는지도 알 수 있죠. 거기다 몇몇 구절을 보면 상황판단력도 아주 잘 갖추고 있습니다. 결국 대장군, 대사마 등의 아주 높은 직위를 지녔으며 형주를 수호하는 장군이 되죠.
조인은 단순히 싸움만 잘하는 단순무식형 인물이 아닌 관우, 주유에 뒤질것 없는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인물이라고 평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조 주위에는 정말 걸출한 인물들이 많군요. 조조가 유비의 장수들을 부러워 할게 아니라 유비가 오히려 조조의 장수들을 부러워 해야 하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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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 아니었으면 더 욕먹었을 조조]
하북(河北)이 평정된 후 호관(壺關)을 포위하는데 종군했다. 태조가 영을 내렸다, “성이 함락되면 모두 파묻어 죽여라.” 여러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했다.
조인이 태조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할 때는 필히 활문(活門)을 보여주어 이로써 그들이 살아날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지금 공(公)께서 반드시 죽일 것이라 말씀하시니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성이 단단하고 양곡이 많아 이를 공격하자니 사졸들이 상하고 수비하자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지금 (적의) 견고한 성 아래에 머물면서(頓兵堅城) 공격해 포로들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위서 <조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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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 대표 장군인 장합과 조인의 차이점]
원소는 장합을 교위(校尉)로 삼고 공손찬과 맞서게 했다. 공손찬을 격파하는데 장합의 공이 많았으므로 영국중랑장(寧國中郎將)으로 올렸다.
서주 정벌(徐 州)에 종군하여 조인은 늘 기병을 지휘하며 군의 전봉(前鋒-선봉)이 되었다. 따로 도겸의 장수 여유(呂由)를 공격해 격파하고, 돌아와 팽성(彭城)에서 대군(大軍)과 합쳐 도겸군을 대파했다. 비(費), 화(華), 즉묵(卽墨), 개양(開陽) 공격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別將)을 보내 여러 현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공통점 :: 우선 전투전의 둘은 전장에서 활동해본 경험이 부족한 장수들이다.
장합은 황건적을 토벌할당시부터 활동했다고 했으나, 황건적과 공손찬은 급자체가 상당히 다르다.
황건적 토벌은 왠만한 네임드 장수들의 데뷔식정도로 좀 흔한일로 보이는데, 공손찬군을 격파하는데 큰공을
세웠다는것은 엄청난 일이라고 본다.
그럼 조인을보면, 이전의 조인의 활약은 전무하다.
열전에선 그저 무술에 뛰어나다고만 할뿐. 다른 전과는 없는데,
항상 선봉에 서면서 전승을 거둔다.
분명 경험이 없는 신예 장수임에 불구하고 엄청난 전과를 낸것.
데뷔식부터 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주 1) [한진춘추]에서 이르길 – 장합이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공이 비록 연달아 이겼으나 조공과 맞붙지 마십시오. 은밀히 경기(輕騎)를 보내 그 남쪽을 공략해 끊는다면 조공의 군은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합이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조공(曹公-조조)의 군사가 정예하니 필시 순우경 등을 격파할 것입니다. 순우경 등이 격파되면 장군의 대사가 어그러질 것이니, 마땅히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야 됩니다.”
장합이 말했다, “조공의 둔영이 견고하므로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순우경 등이 사로잡힌다면 우리들 또한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주 4) [위략]에서 이르길 – 제갈량군이 퇴각하자 사마선왕이 장합에게 이를 추격토록 했다. 장합이 말했다, “군법(軍法-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선왕이 이를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했다.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弓弩)를 난사하자 화살이 장합의 넓적다리에 적중했다.
태조는 원소(袁紹)와 더불어 관도에서 서로 오랫동안 대치했는데, 원소가 유비(劉備)를 보내 은강(濦彊-예주 여남군 은강현) 등 여러 현을 돌며 많은 무리를 일으켜 호응하게 했다. 허현 남쪽에서 관원과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하자 태조가 이를 근심했다.
조인이 말했다, “남방 사람들은 대군(大軍)이 바야흐로 (원소와 대치하느라) 목전이 급박하므로 그 사세상 구원해줄 수 없으리라 여기는 터에 유비가 강병(彊兵)으로 당도하니 그들이 배반한 것은 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유비가 새로 원소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어 그들을 능히 부릴 수 없을 것이니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
조인이 태조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할 때는 필히 활문(活門)을 보여주어 이로써 그들이 살아날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지금 공(公)께서 반드시 죽일 것이라 말씀하시니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성이 단단하고 양곡이 많아 이를 공격하자니 사졸들이 상하고 수비하자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지금 (적의) 견고한 성 아래에 머물면서(頓兵堅城) 공격해 포로들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공통점 :: 머리를 잘 굴릴줄 아는 장수였다.
우선 장합같은 경우엔, 관도대전시 가담했던 참모였던 곽도보다도 뛰어난 지능을 보이고있다.
관도대전당시 장합은 조조군을 꿰뚫어보고 있었고, 그에 맞는 책략에 진언했으나, 원소는 받아드리지 않았고
결국 원소는 대패를 당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장합의 마지막전투역시 장합은 ' 안돼! ' 라고 했지만, 사마의가 ' 가! ' 로 갔기때문에 전사하고만다..
그럼 조인을 살펴보면, 시대는 비슷비슷하다.
관도전투당시 유비는 원소가 조조를 견제하기위해 파견했는데, 조인은 유비에게 시간을 주면 안된다고 하며
바로 토벌해야한다고 조조에게 진언했고, 조조는 받아드리며 조인은 유비를 격파해버린다.
그뒤 호관을 포위했을땐 회유책으로 승리를 따낸다.
다만 다른점은, 당시 둘의 군주였던 조조와 원소의 기량이다.
조조는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승리를 가져갔지만, 원소는 그러지 못하였기에 패배하고 만것이다.
또하나는 장합의 지략은 모두 옳은것이었지만, 상부는 받아드린적이 없던것.
연의에서도 유사하게 나온것은 정군산에서 하후연이 장합의 진언을 받지않고 나갔다가,
황충에게 킬당하는것... 뭔가 장합은 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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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수인 조인
그러나 게임에서건 연의에서건 이유없이 까이는 동네북 조인 -_-이죠;
왜 조조가 관우와 대치하고 있는 번성을 조인에게 맡겼을까요?
이것만 봐도 그의 능력을 조조가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고, 정남장군이라는 양대 위나라 장군의 작위를 주었던게 아닐까요?
방어만을 본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 조인
화려하게 빛나진 않지만, 묵묵히 조조의 굳은 일을 도맡아 수행했던 위의 진정한 에이스라
부르고 싶네요
다음 회를 기대하세요 ~~!!
ps. 추천 받습니다. 현재 만총 나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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