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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년 전 (2020/3/14) 게시물이에요

명 장수 모문룡의 조선 영토인 가도 점령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주요 원인이었다.

     모문룡의 가도 점령

 

  1. 명나라  전쟁난민의 조선 유입


   1618년부터 후금이 본격적으로 명에 대한 공세를 취하자 조선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터가 된 요동에 거주하는 명나라 주민과 명의 패잔병이 난민이 되어 조선으로 대거 몰려온 것이다.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난민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이들은 산해관을 넘어 화북으로 이주하거나 진강(鎭江) 등 압록강 근처로 몰려들었다. 진강은 바닷길을 통해 여순 뿐 아니라 등주와 내주 등 산동성으로 갈 수 있으며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압록강을 넘어 조선 영내로 들어오는 난민의 수는 갈수록 늘어나 1621년 명나라 조정이 파악하고 있는 숫자만도 2만 명이었고 이듬해에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평안도에서 청천강 이북의 지역은 난민이 넘쳐 났다. 일부 난민은 더욱 남하하여 강원도와 경기도까지 흘러들었다. 어느 시대건 난민들은 현지주민과 마찰을 빗게 마련이다. 낯선 이국 땅에 들어와 숙식을 해결해야 했던 명의 난민들은 조선에서 갖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이들 중 일부는 청람포(靑藍布) 등 포목류를 가지고 와 식량으로 바꾸는 등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가진 것 없는 빈민들은 무리를 지어 조선 민가를 약탈하고 관청에 몰려와 식량을 내놓으라고 집단 시위를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 주민과 충돌이 일어나 쌍방에 사상자가 생겼고 지방관들은 골머리를 썩였다.

   광해군은 일찍이 명의 난민들을 미래의 화근으로 인식했다. 비변사가 대책을 내놓지 못하자 왕이 직접 나섰다. 우선 국경지대의 평안도 수령들에게 난민이 조선 영내로 상륙하지 못하도록 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배편을 마련하여 산동의 등주나 내주로 소환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이미 들어와 있는 난민들의 신상을 파악하여 거주 지역별로 나누어 장부를 만들어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경기도 지역까지 깊숙이 들어온 난민은 남해, 진도 등 원격지로 이주시키게 했다. 이는 앞으로 제기될지 모르는 후금이나 명의 송환 요구를 사전에 막으려는 조치였다.

   그뿐 아니라 조선 영내로 들어와 조선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머물던 명나라 장졸들의 동태를 살피고 이들이 조선 주민과 접촉하는 것을 막게 했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내부 정보가 명이나 후금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2. 명나라 장수 몸문룡의 가도 점령

 

   후금은 천명 6년(1621) 3월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였다.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은 요양이 함락되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변의 진강을 점령했다. 모문룡은 요동 전체를 수복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후금이 대병력을 투입해오자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광해군 13년(1621) 7월 모문룡은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의 미곶에 상륙했다. 평안감사가 올린 장계를 받은 광해군은 대책을 마련하려 한밤중에 비변사 회의를 열었다. 

   모문룡은 조선에 들어온 이후에도 ‘요동을 수복하겠다’ 고 큰 소리쳤다. 철산, 용천, 의주 등 압록강변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명군 패잔병과 요민(遼民 ; 명의 난민, 요동에서 왔으므로 붙인 명칭)을 수습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토에 들어온 것은 후금을 크게 자극하였다. 요동 석권 이후 후금사회는 대다수의 한인부로(漢人俘虜) 및 민호를 최하층에 두고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으며, 이들의 농업생산과 잉여노동으로 후금이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 한인이 과중한 착취와 민족 차별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주하는 사태가 끊이지 않아 후금의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애써 이룩한 후금의 농경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인의 반란과 도망은 천명 6년(1621) 3월 요양 함락 이래 끊임없이 계속되었는데 대부분 모문룡과 밀통하거나 사주를 받아 일어난 일이었다.       

   광해군은 모문룡으로 인해 조선이 병화를 입을 수 있음을 크게 우려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내에 머물자 후금과의 접촉도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이 조선에 들어오자 요민들과 명군 패잔병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광해군 13년(1621) 12월 후금의 아민(Amin ; 阿敏)은 모문룡을 치려 5천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후금군은 의주, 가산, 용천 등지를 습격했고 모문룡은 용천 관아에 있다가 조선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간신히 탈출했다. 이 기습으로 요민 578명이 죽었다.

   광해군 14년(1622) 11월 모문룡은 광해군의 권유대로 평안도 철산 앞 바다에 있는 섬인 가도(椵島)로 들어갔다. 가도는 고려가 몽고 침략을 받을 때 서북면병마영이 설치된 곳이다. 조선은 이 곳을 목마장으로 운영해왔다. 명군과 난민 등 1만여 명이 가도에 몰려들었다. 모문룡은 여기에 진을 치고 동강진(東江鎭)이라 하였으며 명과 조선으로부터 식량, 병기 등을 공급받고 계속하여 후금을 교란하였다. 모문룡의 후방 교란으로 후금의 요서 진출은 큰 제약을 받았다. 명은 모문룡에게 총병좌도독(摠兵左都督) 직을 주었다.

   모문룡의 가도 주둔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모문룡의 가도 점령 | 인스티즈


모문룡의 가도 점령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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