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주소 복사
공지가 닫혀있습니다 l 열기
김준슈ll조회 4924l 7
이 글은 11년 전 (2012/9/12) 게시물이에요

나치 독일의 개그맨 괴링 | 인스티즈

2차대전 독일 지휘관중 그만큼 조롱의 대상이 된 사람은 없었다.



진급 내역

1914.1.20 : 소위(Leutnant)

1917.8.18 : 중위(Oberleutnant)

1920.1.8 : 대위(Charakter als[20] Hauptmann)

1933.8.31 : 보병대장(Charakter als General der Infanterie)

1935.3.1 : 항공대장(General der Flieger)

1936.4.20 : 상급대장(Generaloberst)

1938.2.4 : 원수(Generalfeldmarschall)

1940.7.19 : 제국원수(Reichsmarschall)

주요 서훈 내역

1914.9.15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1915.3.22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1917.10.20 : 호엔촐레른 가문 검 기사 십자 훈장

1918.6.2 : 푸어 르 메리테 훈장

시기 미상 : 1918년 제정 전상장 흑장

1939.9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1939.9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1939.9.30 : 기사 철십자 훈장

1940.7.19 : 대 철십자 훈장

나치 독일의 개그맨 괴링 | 인스티즈

나치스 고관중에서는 드물게 육군사관학교와 뮌헨대학교를 졸업한 인텔리로 제1차 세계대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종군하여 1차대전 최고의 에이스집단 "제1전투비행단(JG1)" 3대 지휘관이자 22대격추(1차대전 독일군 격추순위 56위)의 전쟁영웅으로 이름을 날리며 그 공적으로 블루 맥스 훈장을 받았다. 나치당 성립기에 아돌프 히틀러를 전적으로 지지, 히틀러가 나치당 실권을 손에 넣는데에 가장 큰 기여를 하였으며 전쟁영웅에다가 귀족가 출신, 부르주아라는 점이 잉여들이 득시글거리는 나치당의 싸구려 이미지를 불식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훈남에 사교계의 총아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의 여성 스캔들도 없이(추남인 괴벨스조차 여러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 가족에게 매우 충실한 면모도 보이는 등 개인적인 면에서는 신사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히 나치스의 아이돌로서 정권의 인기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사교계 연줄을 활용하여 귀족과 기업가들에게서 고액기부를 얻어내어 당 재정을 윤택하게 했다. 괴링이 없었다면 나치당의 급속한 성장도 없었을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연구가의 일치된 견해이다.







1차세계대전 종전 후, 괴링은 항공사에 취직한다. 이 때 즈음에 카린 폰 칸쵸우에게 첫눈에 반해 끈질긴 구애끝에 결혼한다.

그러나 1931년경. 첫 아내 카린 괴링이 폐렴으로 급사. 그는 카린과 사별한지 4년 후 1935년에 에미 소네만과 재혼한다.

나치 독일의 개그맨 괴링 | 인스티즈

카린 괴링






나 치 핵심인사긴 하지만, 다른 핵심 인물들과는 달리 유태인들에게 꽤 호의적이었으며, 그의 대부인 에펜슈타인 백작이 유태계이기도 해서 유태계 지인들이 많았다. 휘하 지상부대에게는 잔혹행위를 엄격히 금지시키기도 했다. 괴링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을 인터뷰했던 미군소속 정신과 의사 리언 골든슨에게 “유대인 대학살는 나의 기사도 원칙에 위배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여성을 존중하며 어린이를 죽이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유대인 말살 문제에서 내가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 점이다”고 덧붙였다.

정치역량도 뛰어난 편이라 돌격대와 친위대 창설에 깊이 관여했고 게슈타포는 자신이 직접 창설하여 초대 장관을 역임했다. 이외에도 나치스 집권기에 국회의장,재무부 장관을 비롯한 요직을 두루 거쳤다(심지어 제국수렵 어업청장까지 지냈다). 2차대전 말기에 전황이 돌이킬수없이 악화되어 히틀러와 반목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나치독일의 제2인자였다.

1923 년 히틀러의 실패한 "맥주홀 쿠데타" 당시 거시기에 심한 부상을 입고 오스트리아로 도주하게 되었을 무렵 진통제로 맞게 된 모르핀에 중독되면서 성격도 변하고(이 무렵 첫 부인이 병사하는 바람에 더 그랬을것이다.) 체중관리도 안하면서 점차 몸이 불어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후 망가지던 괴링은 나치당 집권기에는 이미 후덕한 이미지로 변모했다. 다만 후처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부인이 바람을 피운게 아니라면 고자는 안된것 같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최후의 르네상스인"이라고 주장했다. 예술품에 대하여 소유욕이 굉장했는데, 프랑스 사기꾼에게 속아서 위조품 명화들을 한가득 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웃긴 건 그 사기꾼이 받은 거액이 죄다 위조지폐들이었다.






업적

재 군비 이후 나치독일이 타국보다 먼저 공군(루프트바페)를 창설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초대 공군원수가 되었던 것을 보아도 군사적 역량도 처지는 편은 아니었다. 루프트바페는 괴링 덕분에 타국 공군들보다 규모와 예산면에서 월등히 앞섰고 이는 전격전에서 독일군이 유럽을 압도하는 큰 요인이 된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실책

그러나 괴링 본인의 욕심과 자만심,과시욕 때문에 후반기로 갈수록 오히려 독일공군, 나아가 독일군 전체의 발목을 잡고야 말았다.

-스페인 내전에서의 양다리

스 페인 내전 당시 독일공군은 "콘도르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전, 프랑코의 스페인 국민군을 지원했다. 그런데, 그때 독일공군의 수장인 괴링은 적군인 스페인 공화군에게도 무기를 팔아먹었다고 한다. 독일이름이 바로 뜨면 뭣하니까, 그가 개인적으로 관리하던 라인메탈사의 그리스인 협력자와 짜고쳐서 그리스 육군에 판매하는척 서류를 꾸미곤 스페인에게 팔아넘겼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국민군의 수장인 프랑코가 이 사실을 알아챘고, 내전이 종결한 다음에 독일과 스페인 관계가 약간씩 껄끄러워지며, 스페인이 공식적으로 추축국으로 들어오지 않은 큰 이유를 제공했다.


-영국 항공전의 패배

영 국 본토 항공전 당시 괴링은 전격전에서 육군만이 각광을 받은것에 불만을 가졌고, 영국을 무력화 시키는데에는 공군만으로 충분하다고 호언하며 영국폭격을 단행했다. 그러나 영국공군을 전멸시키기 직전, 갑자기 공격방향을 바꿔 런던만 집중폭격해 영국공군이 다시 살아날 기회를 제공했다. 영국폭격 당시 폭격기를 전투기가 근접 호위하게 하는 등의 전술상의 실책도 숱하게 저질러 공군전력의 상당부분을 영불해협과 런던위에서 잃어버린다. 더욱 희한한건 전투기 숫자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전투기 생산속도조차 신경쓰지 않았다. 그 결과 매월 영국의 전투기 생산숫자는 독일을 추월해서 마침내는 보유 전투기수조차도 영국에 밀려버린다. 이런저런 끝에 공군은 공군대로 날려먹고, 결국 영국상륙 계획(바다사자 작전)까지 중단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물론 바다사자 작전은 영국의 월등한 해군력으로 인해 성공할수 없는 작전이었다. 독일 군부에서도 바다사자 작전은 그리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애초에 영국 해군에 의해 영국의 독일군이 고립되기 때문이었다. 여담이지만 괴링이 폭격만으로 영국을 굴복시키겠다고 큰소리 칠때 독일해군의 참모총장인 레더 제독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어차피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륙전인데 괴링이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아 참, 개전 초기 괴링은 "내 루프트바페를 뭘로 보고 그런 소릴 하는거요? 만약 베를린에 단 한 발의 폭탄이 떨어진다면 나를 'Meyer 또는 Meier라고 불러”라고 큰소리 쳤으나 영국공군은 1940년 8월25일 보란 듯이 베를린을 두들겼다. 마이어는 오늘날도 그렇지만 아주 평범한 성이다. 우리말로 쉽게 표현하자면 박괴링에서 김괴링으로 개명한 셈이다. 위키피디어나 영어 웹 상당수에 의하면 베를린이 아니라 '루프트바페를 폭격할수 있다면' 이라는 조건이었다고.


-스탈린그라드 공중보급에 대한 호언장담

독 소전쟁의 분수령이라 할 스탈린그라드 전투때에도 히틀러가 제6군 철수를 불허하자 히틀러에게 이쁨을 받기 위해 항공기 수송만으로 제6군을 먹여살릴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당시 독일군에겐 수송기 숫자는 커녕 스탈린그라드 근방을 통틀어도 사용가능한 활주로가 단 한개 밖에 없었다. 물론 괴링의 무능력과 특유의 허풍을 잘알고 있던 히틀러도 그놈의 주장을 처음부터 무조건 신뢰하고 수용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공수작전을 실질적으로 기안한 당사자인 예소네크(Hans Jeschonnek)대장을 히틀러는 따로 불러 공중보급에 관한 가능성을 진지하게 물어봤다. 히틀러를 단독 면담한 예소네크는 몇가지 단서를 달았지만 하루 300톤 정도의 공중보급은 가능할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러한 보고에 고무 받아서인지 모르겠으나 전황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던 히틀러는 제6군의 현지고수를 결심했다. 그러나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바로 단기간이라는 시간적 제약과 300톤이 최대 공수 가능량이라는 전제조건이었다. 그 당시 괴링이 공중보급에 자신감을 보였던 이유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전에 있었던 데미얀스크에 고립되었던 독일육군(독일북부집단군의 제16군 예하 제2군단 및 제10군단의 7개사단 총 10만의 병력)에게 공군이 필사적으로 물자를 지원해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낸데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독일군은 한 집단군으로 25만명이었다(제6군 33만명중 8만명은 포위망밖에 있었거나 포위망을 뚫었다)


-헤르만 괴링 강하기갑사단의 창설

전 무후무한 전차로 무장한 공군 부대인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도 괴링의 공명심과 경쟁심의 산물이다. 이 부대는 원래 공수부대였으나 대전 초 육군의 눈부신 공적에 침을 흘리던 중, 휘하에도 '기갑사단을 만들고 싶은' 괴링의 욕심으로 가뜩이나 부족한 전차 및 각종 기갑장비를 육군에게서 가져와 창설했다. 그리고 창설만으로도 모자라 지속적인 지원을 펼친 결과, 창설 당시부터 사단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데다가 전쟁 말기에 가면 2개 사단을 거느린 기갑군단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로서 독일공군은 중전차와 기갑장비로 중무장한 기갑사단을 거느리게 되었다. 공군이 맞기나 한건지. 그나마 모체인 공수부대가 원체 정예인데다 훈련, 장비도 충실하여 이런 괴악한 상황 하에서도 여러 전투에서 상당한 활약을 펼쳤으나 그 존재는 육군과 공군의 반목을 심화시키는 원인만 된다. 참고로, 처음부터 독일군의 공수부대는 타국의 공수부대가 육군소속인 것과는 달리 공군소속이었는데, 이것 역시 괴링의 전공에 대한 욕심 때문. 대외적으로는 '작전상 항공부대와의 원활한 연계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걸 믿을사람이 어디 있나. 아무튼 강하기갑사단은 전공을 잘 세우는 정예병력이라 육군이 참아 넘겼지만, 공군 자체에 인가병력보다 더 많은 잉여병력이 놀고 있는 것을 육군등 여러 곳에서 지적하니까 인원을 포기하기 싫어서 무늬만 지상사단인 다수의 공군야전사단을 창설하였고, 당연히 장비, 인원, 숙련도에서 떨어지는 이런 공군야전사단들은 최전선에 서자마자 박살나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심지어 이 야전사단들은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어 뺏길거 다 뺏기고 군복까지 뺏겨 '야전사단 군복 입은놈들은 소련군'이란 명령하에 팀킬당하기도 했다!


-그라프 체펠린(독일해군 항공모함) 건조의 방해

2 차대전 전부터 독일은 항공모함을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었고 실제로 어느정도 건조되었다. 그러나 항공모함에는 탑재 전투기가 필수적인데, "제3제국의 모든 날개 달린 것(여기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포함-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괴링이 겸직한 직책 중에는 '제국수렵장관'이란 것도 있는데, 말 그대로 독일 국내의 수렵 행위 및 사냥감, 즉 새들을 관리하는 직책이다)은 모두 내 관할"이라고 하던 괴링은 함재기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고, 그나마 나중에 내놓긴 했는데 그 조건이 공군에서도 노후화된 전투기를 주는것과 더불어 한술 더 떠 조종사와 함재기 관련요원이 전부 공군소속이어야 한다는것이다. 해군 제독 에리히 레더는 이 조건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되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설계도 대대적으로 변경해야 했으며, 이미 그 때문에 건조는 늦고, 결국 미완성인채로 전쟁이 끝났다. 에리히 레더가 물러날때 히틀러에게 "총통에게 제발 충고하겠는데, 해군의 적인 괴링에게서 해군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전후 처분

그 는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뉘른베르크에서도 연합군 장교, 병사들과도 친해질 정도. 결국 교수형을 선고 받은후 친목이 있었던 미군장교로부터 받은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했다.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50년 혹은 60년 뒤면 독일 전역에 헤르만 괴링 동상이 있을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가 약간 머뭇거린 뒤. “아마 동상은 없을지 모르나, 내 초상화는 집집마다 걸려있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뤄지지 못했다. 안습.

괴링은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승자는 언제나 재판관이 되고 패자는 피고석에 선다. 우리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처칠이나 루스벨트가 법정에 섰을것이다.”

나치 독일의 개그맨 괴링 | 인스티즈

추천  7

이런 글은 어떠세요?

 
로그인 후 댓글을 달아보세요
 
카테고리
  1 / 3   키보드
닉네임날짜조회
유머·감동 현재 난리난 "꼴사납게 싸웠다면 쫑났어”.jpg582 우우아아1:3168275 1
유머·감동 남돌 망한 역조공 대회262 쿵쾅맨05.25 19:06102965 10
유머·감동 차 긁어놓고 커서 꼭 갚는다는 수현이117 311329_return05.25 21:5274798 2
유머·감동 자식 다 키운 부모들이 평생 후회한다는것254 션국이네 메르05.25 19:0578211 29
이슈·소식 대한민국 아동 포르노 스너프 비디오 사건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충격적인 사건166 널 사랑해 영05.25 22:1153992 49
드디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공범까지 복귀 완료한 대한민국 근황.jpg5 레츠게리따피 10:10 3610 7
이순신 장군님이 번개숨결 쓰신다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4 대치동신발브 10:07 3362 2
많은 남연예인들이 본 논란의 메이드 인 어비스 내용 중 하나 (충격주의) 배진영(a.k.a발 10:06 3687 0
와 나 기 정말 쎄졌나봐 가위눌렸는데2 션국이네 메르 10:02 4796 0
[선재업고튀어] 방석이가 뽑는 솔선재하면 생각나는 물건은?.jpg2 311869_return 10:02 733 0
10년 이상 부산 택시기사들의 맛집 모음_택슐랭 게임을시작하 10:01 1386 0
강동원 주연 설계자 씨네21 별점 세기말 10:00 2301 0
김호중, 영장실질심사 출석 "잘 받겠다, 진심으로 죄송하다" 311329_return 10:00 208 0
기업에서 업무단절이 일어나는 이유3 풀썬이동혁 9:59 2815 2
송승헌 아버지 사진 복원 전후4 wjjdkkdkrk 9:58 5776 0
직구 금지, 다음달부터 예정대로 시행 베데스다 9:58 1402 0
우리은행 근황.JPG2 비비의주인 9:57 5467 1
RE : 우리은행 근황.JPG 비비의주인 9:57 666 0
실손보험 보험금 받을때 꼭 알아야 할 정보 더보이즈 김영 9:56 2963 2
기차 맨끝자리 안탈수있으면 안타는게 좋다..1 우물밖 여고 9:56 1894 0
언니가 네 차에 음료수 좀 쏟았어1 NCT 지 성 9:55 976 0
[씽크로유] 에일리 -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1 NUEST-W 9:54 329 0
빡쳐서 집 문잠근 7살 남동생7 짱진스 9:54 5861 1
꽃다발 하나 주는데 얼굴 터질뻔한 태연.jpgif 태래래래 9:54 1690 0
원피스 전투력 끝판왕이다 vs 아직 더 남았다 Twenty_Four 9:54 572 0
전체 인기글 l 안내
5/26 10:50 ~ 5/26 10:52 기준
1 ~ 10위
11 ~ 20위
1 ~ 10위
11 ~ 2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