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은 게임사에 있어 뜻 깊은 해였다. 베테랑 창작자가 자신의 역량을 모두 동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떤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증명했으며, 또한 게임이 하위문화적 굴레에서 벗어나 예술적 가치를 증명하기도 하였다.
위대한 2019년을 만든 두 게임, 데스 스트랜딩과 디스코 엘리시움은 전혀 다른 게임이지만, 기묘하게도 서로 대조를 이루면서도 또한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스팀판 데스 스트랜딩을 엔딩을 본 기념으로, 이 두 작품을 같이 살펴보면서 어떤 흥미로운 점이 있는지 한번 짚어보고자 한다.
영화감독 지망생과 실패한 소설가의 게임

(데스 스트랜딩의 코지마 히데오(좌), 디스코 엘리시움의 로버트 쿠르비츠(우))
공교롭게도 두 작품을 만든 창작자 모두 기성매체에서 좌절을 맛본 사람들이다. 데스 스트랜딩의 감독 코지마 히데오는 어린시절 영화감독을 꿈꿨지만 개인사를 비롯한 여러가지 일이 겹치면서 현실과 타협하여 게임 개발자가 되었으며, 디스코 엘리시움의 리드 제작자이자 리드 디자이너인 로버트 쿠르비츠는 2013년 소설을 발표해 겨우 천 부 팔았던 완전히 실패한 소설가였다.
이러한 경력의 차이가 있어서일까, 데스 스트랜딩과 디스코 엘리시움은 공통적으로 작가주의적 성격을 띄면서도 동시에 서로가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포트노트 시티 언덕 위에서의 전망)
데스 스트랜딩은 좀 더 영화적이다. 게임을 표현할 때 카메라 무빙이나 음향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또한 전개에 있어도 마치 영화감독처럼 하나의 장면을 완전히 통제에 두고 플레이어가 의도한 상황을 반드시 경험하도록 한다.
튜토리얼을 예로 들어보자. 플레이어는 절벽 위, 산비탈 아래 놓인 짐을 회수해야 한다. 보통의 경우 플레이어는 생각없이 산비탈 아래를 내려오다가 급경사 때문에 균형을 잃고 그대로 절벽 아래로 낙사하게 되고, 리스폰된 플레이어에게 게임은 “좀 더 세심하게 움직여야 한다”라고 툴팁을 띄운다.
이런식으로 데스 스트랜딩은 굳이 컷씬을 사용하지 않고도 플레이어를 함정에 빠뜨리듯이 원하는 장면으로 몰고가서 보여주고자 하는 연출을 보여주는 식의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물론 컷씬도 정말 많이 사용한다.)

(클라예에게 당신의 감정을 표현할까? 말까?)
디스코 엘리시움은 좀 더 소설적이다. 시청각적인 요소보다 서술적 요소에 더 큰 방점을 두는 것도 그렇지만, 촘촘한 복선과 서술 전개로 독자를 옭아매는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또한 전개에 있어서도 더 수동적이다. 무언가 강제 이벤트를 던지기 보다는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여 독자가 기어코 그 전개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임 초반, 플레이어는 뜬금없이 상대를 유혹하는 붉은색 선택지와 마주하게 된다. 보통의 경우 플레이어는 이 과감한 선택지를 고르게 되고, 게임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면서 이 게임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어필한다. 또한 게임 구조 상 새벽 2시에 잠을 자고 다음날로 넘어가지 않으면 게임이 진행되지 않는데, 이러한 단절은 소설의 챕터 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각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실패한 세계와 결함있는 인간

(레바숄의 실패는 동구권의 쇠락을, 결함있는 형사는 레바숄의 실패를 비유한다.)
두 작품 모두 현실의 비판이자 비유로써 실패한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일본과 에스토니아라는 1세계와 2세계 출신이 바라보는 “실패”의 차이는 흥미롭다.
데스 스트랜딩의 세계는 기술적으로 발달했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롭다. 하지만 개개인은 서로 단절되어 국가가 도시로, 도시가 정착지로 무너져내리면서 서서히 고사해가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80년대부터 일본 문화가 갈구해오던 유대의 회복이 필요한 세계다.
그에 비해 디스코 엘리시움의 세계는 내외부적으로 계속된 실패로 인하여 내부의 동력을 모두 소진하고 서서히 진창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세계다. 이 세계는 소련 붕괴 이후 동구권 문화에서 자주 그려지던, 희망이 사라지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하는 절망적인 세계다.
두 작품에서 이러한 세계를 극복할 인물로 공통적으로 선택한 것이 백마 탄 초인이 아닌 결함있는 인물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물 각각의 결함은 각자 세계의 “실패”의 연장선에 있기에, 인물과 세계와 현실은 서로 비유적으로 묶이게 된다.
데스 스트랜딩의 주인공 “샘”은 접촉공포증을 가지고 병적일 정도로 고립주의적이다. 그는 고립되어 고사하고 있는 세계인 “UCA”를 비유하며, 더 나아가 유대가 끊어진 일본을 비유한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주인공 “형사”는 기억상실증에다가 신뢰받지도 못하며 정신적, 신체적으로 엉망진창이다. 그는 혁명으로 인해 단절되고 군사/정치/경제/사회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세계인 “레바숄”을 비유하며, 당연히 20세기 이후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동구권을 비유한다.
이렇게 주인공과 세계, 그리고 현실이 서로 연결되도록 의도되어있기 때문에, 게임이 전개되면서 주인공이 겪는 변화는 세계의 변화와 연동되며, 궁극적으로는 창작자가 현실에 바라는 변화인 게임의 주제를 내포하게 된다.
데스 스트랜딩의 샘은 UCA가 다시금 하나가 되도록 하는 여행을 떠나면서 서서히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가며, 디스코 엘리시움의 형사는 다양한 선택을 통해서 레바숄에 영향을 주면서 동시에 그 선택 하나하나가 형사 자신의 내면 심리에 강한 반향을 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게임 플레이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의 호의)
두 게임이 게임 구조적으로 훌륭한 것은 게임 주제와 전개를 인물과 세계와 단단히 연결하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연결을 게임 플레이까지 확장시켰다는 것에 있다.
데스 스트랜딩에서 플레이어는 고립된 정착지를 연결하기 위해서 택배를 배달하게 된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플레이어가 만날 수 있는 NPC의 수는 매우 적고 사람이 붐비는 시설은 등장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대다수의 시간을 광야에서 떠돈다. 이 게임은 황량하고 고독하다. 그런데 플레이어가 계곡과 험지를 넘어 정착자를 연결하는 순간,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수많은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비동기 멀티플레이라는 게임 특성상 당신은 다른 플레이어를 볼 수 없지만 그들이 남긴 메시지, 강을 가로지르는 사다리, 외딴 산 정상에 놓인 짚라인에서 서로의 존재와 호의를 확신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어느 순간 연결 그 자체를,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를 위한 행동 그 자체를 즐기게 된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플레이어는 갑작스럽게 엉망진창인 호스텔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실과, 그리고 세계가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 역시도 게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무엇부터 할지조차 전혀 모른다. 게임은 시작부터 혼란과 의문만 가득하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 소개문에서 거창하게 소개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건 어쩌면 주인공의 간단한 배경, 예를 들어 어렸을 적 집을 찾아가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게임은 메인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 간의 상하 관계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그저 동등한 “업무”로 배정해버린다. 그리고는 그저 “뭘 할지 모르겠다고? 그러면 아무거나 해봐. 저기 보이는 노래방 기계 마이크를 잡고 한 곡조 뽑아보는게 어때?”라며 가볍게 등을 떠민다. 그렇게 플레이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형사가 되어 뭘 해야 할지 모를 도시를 막연하게 떠돌게 되는 것이다.
맺음말

데스 스트랜딩과 디스코 엘리시움은 비상업적인 게임이다. 물론 훨씬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게임들과 비교하면 두 게임이 상업성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지만, 게임 업계에서 통용되는 소위 “잘 팔리는” 공식을 가져오기 보다는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많은 게임들이 수익성에 종속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2020년대 게임 업계에 있어 이런 비상업적이고 작가주의적인 게임의 대성공은 게임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창작물을 만드는데 있어 명확한 목표의식, 그리고 창작자로서의 긍지가 있다면 게임은 분명 단순히 수익성에 종속된 하위문화에 머무르지 않고 더 대단한 경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중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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