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너에게, 말 없는 눈발로 내 옆에 서 있었던 쓸쓸함을 묻지 않으리라. 어느 날 막막한 강변로에서
다시 너를 잃어버리고 창문 틈에 너를 기다린다는 戀書(연서) 를 꽂아놓을 때까지. 네가 옆에 없음을 알고
戰慄(전율) 할 때까지.
낡은 자명종의 태엽을 감으며,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다.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옆에 있어준다고 했다, 허연
삶의 마지막 순간에 호흡은 들숨일까 날숨일까
마지막 날숨을 탄식이라고 볼 수 있을까
들숨을 결심할 때의 그것으로 볼 수 있을까
남의 밥그릇에 밥을 퍼줄 때만 우리는 잠시 초연해질 수 있다
밥통을 열어젖힐 때의 훈김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본다
/눈물의 원료, 이현승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오래된 서적, 기형도
나의 속성이 부럽다는 너의 편지를 받고, 석간을 뒤적이던 나는 악마였다 십일월 보도블럭 위를 흘러 다니는건 씁쓸한 철야기도였고, 부풀린 고향이었고 벅찬 노래였을 뿐 백목련 같았던 너는 없다 나는 네게서 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떨리는 손에 분필을 들고 서 있을 너를 네가 살았다는 남쪽 어느 바닷가를 찾아가는 밤 기차를 상상했다 걸어서 강을 건너다 아이들이 몰려 나오는 어린 잔디밭을 본다 문득 너는 없다 지나 온 강 저쪽은 언제나 절망이었으므로
잃어 버렸다 너의 어깨를 생머리를 막차 시간이 기억나질 않는다 빗줄기는 그친 다음에도 빗줄기였고 너는 이제 울지 못한다 내게서 살지 않는다 새벽녘 돌아왔을 때 빈 방만 혼자서 울고 있었다 온통 젖은 채 전부가 아닌건 싫다고
/참회록, 허연
깨진 거울을 조각조각 들여다본다 오월
치우지 않은 밥이 꾸덕꾸덕 말라간다 유월
칠월에는 죽은 화분을 버리러 가는 산책
매일 더 멀어지는 집
간신히 그림자를 앞세우고 돌아오면
어느새 팔월이 된다
그래 죽자 차라리 죽어버리자
식칼을 집어 들고서
어머 이 자두 빛깔 참 곱다
큭큭거리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멍울이 망울이 되는 기적
너의 눈은 동화 속 비밀의 숲처럼
오려두고 싶은 슬픔으로 반짝인다
/너의 명랑, 안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