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빈 성씨(성덕임)가 후궁이 되고 나서 정조가 의빈 신분이 낮아서 문효를 원자 책봉하길 주저했다?(×)
아님. 2달 미룬 건 화빈 윤씨 산실청이 계속 세워져있어서인데 이게 정조가 신분 높은 화빈의 소생을 원자삼기위해서 였다는 건 대표적인 오해임.
문효세자가 태어난 시점에서 이미 화빈은 출산 시기가 한참지나도 지난거였음. 이게 화빈 윤씨 집안이 자기 임금 외척이라고 나대고 다니고 억지로 세워놓은 거고 그거 때문에 하고싶어도 바로 못한 거.
실제로 나중에 이 문제로 관련자들이 다 처벌받음. 그리고 애초에 문효태어나고 바로 문효세자를 위한 동궁 짓고 아예 세자 책봉도 역대급으로 빨리 해버리고 각종 행사 으리으리하게 다해줌...(의궤만 해도 몇개됨)
신하들? 얼씨구나 다 찬성함.
의빈은 신하들이나 내명부에서도 환영받는 존재였음.
애초에 의빈 성씨는 정조 엄마 혜경궁 홍씨 집안 사람 딸에다 혜경궁의 지밀 나인임
그리고 화빈 윤씨 들어올 때부터 정조가 간택으로 후궁들이는 걸 싫어하는 티 팍팍냄....(일성록에도 기록되어있음)
2. 의빈이 옷소매에서 덕임이 처럼 못먹고 주눅든채로 내명부 생활을 했다?(×)
혜경궁이 의빈 해산할 때 자기 집에서 하녀들 데려와 산후조리 다 해줬어. 정조가 이들 녹봉 다 후하게 주고 벼슬까지 줌.
이것만 봐도 옷소매에서 의빈을 묘사한거랑은 천지 차이지.
제문이나 묘비명에 검소한 생활이 강조된 건 그 당시 유명하고 벼슬 높은 사람들이 그리 사는 게 미덕이었고 죄다 묘비명에 검소하게 살았다고 적혀있어.
그땐 그게 고인을 칭송하던 추임새지
진짜 정조가 의빈을 말려죽였다고 받아들이면 안돼.
그때 정서로 사람들이 다 보는 공식문서에 의빈이 얼마나 그 높은 위치서 대단했나 자랑한다고 적은 거야.
심지어 왕인 자기가 대단한 신분인 본인이 반평생 당신만을 기다렸어요, 라고 쓴거야.
그만큼 의빈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쓴거지
내가 강제로 사람 인생조졌어요.이렇게 적은 텍스트가 아님. 제발..;
그리고 의빈 친척들 벼락출세했다는 기록이랑 의빈 친오빠들도 부서옮기고 동궁내례로 임명했다는 기록까지 있으니 의빈집안에게 박하지 않았다는 것도 적어둘게
이런 게 그 동안 오해 중에 아마 대표적인 게 아닐까?
그리고 문효세자 사망하고 장례도 세자 생모인 의빈과 함께하고 의빈 아플 때도 매일 경희궁까지 가서 매일 옆에서 간호한 게 바로 정조야 소설에서 묘사와는 달리.
그래서 독살설 어쩌고도 정조로선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지 무마한 건 아니야. 원래 왕실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죽으면 엄청 후폭풍이 있어.
누구든 처벌받지 책임지고. 의빈 사후 정순왕후 언문교지는 의빈독살을 저격한게 아니고 자기 친오빠 김귀주의 죽음 배경에 은언군이 있다는 이야기가 핵심이야.
근데 정조가 은언군을 보호한 것일뿐, 의빈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무마한 건 없어. 아무 근거도 없어.
실제로 정조는 자기 아버지 죽음에도 복수라는 카드를 꺼내지 않지. 정조 정치스타일이 그래. 막 다 처단하고 목자르고 그런 스타일이 아니야. 그럼 역사에 폭군이었겠지.
3. 의빈이 죽고 난 뒤 궁중에서 일개 후궁1이었던 의빈은 곧 잊혀졌다?(×)
이것도 아님.
의빈이야기는 나중에 사도세자가 수원으로 묘이장할 때도 등장해. 그리고 나중에 순조는 왕되고 의빈 회갑 제문까지 직접써. 왕이 아낀 사람이라고.
의빈은 서른 네 살에 죽었고 순조가 태어나기 4년전에 이미 죽었던 사람임, 심지어 선왕인 정조가 승하하고도 후대왕이 직접 제문을 쓴거야. 이건....정조가 언질을 줬다고 밖엔 해석할 수 없음.
실제로 재임 내내 의빈 제사는 정성껏 치뤄진 기록이 있고 사당, 무덤 뻔질나게 간건 유명하지.
순조 태어나기 2달전에도 의빈사당에서 밤샜다고 실록에 적힘.
의빈 제사는 정조 증조할머니(숙빈 최씨), 할머니(영빈 이씨)와 함께 지내줬어.
사실 이 둘이랑은 급이 정말 다른데...정조가 그렇게 해준거야.. 3년상 치루고 나서도 사당관리자들 다 직접 만나고 여기 돈 쏟아부었어...문효세자랑 같이 봉해준 사당. 그리고 무덤도.
이거 진짜 조선사에서 자기 부인한테 그것도 후궁한테 이렇게 해준 왕 정조 뿐임....
4. 의빈 죽은 뒤 여색 관련 상소받은 일.
이게 정조가 의빈 죽고 여자놀음을 했다, 그 후에 들어온 후궁이랑 너무 붙어있어서 항의 받았다?
뭐 그렇게 알더라... 근데 전혀 아님.
1792년도에 받은 유성한 상소는 사도세자 추승일로 딴지 걸려고 도발하는 거짓 상소였어. 실제로 이 여색이란 말도 궁안에 기생(여악)들을 들였다는 말임(궁녀×후궁×).근데 실제론 신하들 몇이 연관된 일로 정조랑은 무관한 일이여서 신하들이 유성한처벌하라고 난리치는데 정조가 비답을 내리는 걸로 마무리함. 처벌은 × .
거기다 여색관련은 너무 근거가 없어서 대답할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
정조가 여색 관련 상소받은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임
5. 정조가 의빈죽고 나서 들어온 후궁처소에 가서
살았다.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림.
사도세자가 태어난 곳이 집복헌임.
정조가 말년에 거주하는 영춘헌은 지금은 합쳐져있는데 당시엔 앞 쪽에 가까이 있는 형태(공간적으론 완전히 분리되어있음)야.
그리고 옮긴 시기가 의빈-문효 3년상이 끝나고 사도세자 추승할려고 묘자리를 수원으로 옮길 때 였어 시기가. 그래서 이거, 정치적인 수사라고 보는 사람도 많아. 학자들 사이에선.
실제로 영춘헌이 사도세자 사당이랑 무지 가까웠거든. 사도세자 추승 문제는 그 기점으로 조정이 완전히 갈릴 정도로 뜨거운 문제였음
거기다 문효세자 동궁 전용으로지은 중희당.
거기서 의빈이 사망하는데.... 정조는 그곳을 평생 자기 집무실로 씀.
동궁전용이라 얼마든지 다음 세자를 위해 내어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자기가 평생 쓴거고 후대왕들에 비해 정조대에 중희당 언급횟수가 압도적임. 곤룡포입고 대부분 거기서 생활했다고 보면 돼. 순조는 왕되고 나서도 그닥.. 사용기록이 없어.
뭐 비교하는 건 아닌데 의빈 죽고 팽당했다 이런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서 적어본다. (중희당이 효명세자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잡혔지만 사실 정조임...)
옷소매가 잘 쓰여진 소설이나 역사서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게 기정사실인 거 마냥 막 정조가 악역되고 댓망도 자주 돼서 적어봄.
정조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아마 의빈의 죽음이었을걸. 본인이 직접 언급했지. 앞전에 겪은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고. 자기도 예상 못한 일이었고.
물론 후궁이 되지않았다면 그런 비극적인 결말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결론적인 이야기고.
무엇보다 소설이랑 역사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싶었어.

인스티즈앱
일본에서 난리난 한국 레시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