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모든 여행기는 100% 사실을 바탕으로 1%의 망상이 섞여 있을 수 있음.
감정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 반말로 기술함.
19세 이하 청소년에게 다소 선정적일 수 있음.
거지1[거ː지]
[명사]
1. 남에게 빌어먹고 사는 사람.
2. 사람을 욕하여 이르는 말.
[유의어] 각설이, 걸식자, 걸인1.
- 포털사이트 국어 사전 참조.
[프롤로그]
그녀가 서서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머리를 포겠다. "한, 난 니가 참 좋아"
순수한 그녀의 미소가 좋았다. 살포시 내 손등위에 손을 얹은 그녀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말이었지만 태국 방콕에 차오프라야 강에 비친 보름달과 잘 어울러지는 노래였다. 주변에는 써니(가명)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노래를 멈추더니 그자리에 날 눕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잡고 밀착하기 시작했다. 큰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가녀린 그녀의 팔에는 힘줄이 곤두서 있었다.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은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바라볼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뭔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살짝 미소를 내게 보이고는 내 손을 그녀의 가슴으로 갖다 대었다. 작지만 봉긋한 그녀의 가슴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내 옆에 눕더니 한손은 내 가슴에, 그리고 다른 한손은 자신의 등으로 가져가 속옷 끈을 풀어헤쳤다.
너무도 긴 밤이었다.
그녀와 밤을 보냈던 방콕 차오프라야 강
1장- 공정여행의 시작
써니는 아시아 방콕 여행당시 만난 현지 매춘여성이었다. 클럽에서 청년문화탐방(?!)을 위해 춤을 추다 만난 우리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진한 담배향기와 어지러운 사이키 조명을 피해 바람을 쐬고 싶었던 난 그렇게 클럽을 나왔고 써니도 따라나왔다. 그녀는 관계를 요구했지만. 그날밤 난 관계 대신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3명의 남동생과 엄마. 그녀가 보살펴야할 가족이었다. 키가 150cm도 안되는, 몸무게가 35kgd이나 될까 싶은 그녀의 작은 몸에 비해 버텨내야할 삶의 무게는 너무나 커보였다.
"일을 하려고 해봤어, 그런데 이게 편해. 너 같은 멋진 남자도 만날 수 있고 영어도 이렇게 배웠는걸. 친구중에는 미국남자랑 결혼해서 잘사는 친구도 있어. 나도 그렇게 될꺼야."
그녀에게 관계 대신 친구라는 이름으로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을 빌려주고 우린 헤어졌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가는 길에는 몇몇 걸인들이 있었고 거리는 너무도 더러웠다. 날이 좀 밝자 부지런한 현지 사람들이 바닦을 쓸며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내가 공정여행을 시작한 이유다.
공정여행이란 여행을 하며 쓰이는 경비가 현지인들에게 돌아가게끔 하며 자연을 보호하고 문화를 존경하는 착한 여행을 뜻한다. 방콕이 세계적인 관광지지만 소비구조가 잘못되어 그곳 현지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하나의 상품으로 전략되어 버리고 외국기업이나 일명 큰손이라 불리우는 재벌들만 배불러지는 현실을 실감한 것이다. 가널픈 몸과 감성을 지닌 써니의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나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 바꿔봐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정여행은 관계중심의 여행이다. 함께 웃는 나와 스리랑카 집시 아이들.
2장 세계일주가 희망여행이 되다.
난 세계일주를 하고 있다. 여행이 시작한지 1년이 조금 더 지난 2010년 9월. 난 세계를 여행하는 대신 희망을 여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먼저 세계의 사람들을 마음에 품고 싶었다. 그러기에 내키 166cm 60kg의 몸무게는 너무나 작았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앞에 사람부터 품자... 라고.
그렇게 프리허그(불특정 다수를 안는 행위)를 시작했다. 여행을 하는 내내 각 도시에 도착하면 프리허그를 진행했다. 허깅당 100원을 스스로 적립하여 그돈을 모아 빈민을 후원하기도 했고 허깅을 통해 많은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많이 웃고, 무엇보다 행복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예쁘고 가슴이 큰 여자를 안는건 부가적인 기쁨이다.
체코 프라하에서의 프리허그. 세계 각국의 도시에서 늘 프리허그를 진행한다.
여행지의 재미있는, 신기한 풍경을 찍기위한 카메라의 용도를 조금 바꿔보았다. 내가 만난 현지 가족들에게 가족사진을 찍어 선물했다. 내가 간직하는 것보다 그들이 간직하는 사진의 값어치가 더욱 빛나보였다. 자신의 보물 1호라고 당당히 외치는 스리랑카 압둘라의 아버지는 가족사진이 정말 좋은가보다.
스리랑카 아루감베이 한 마을의 대가족. 이날 난 밥만 3끼를 얻어먹었다.
한국에서 마술을 좀 배웠었다. 부끄럽지만 길거리에 판을 벌렸다. 친구가 된 거지아저씨를 위해 사람을 모으고 공연을 했다. 공연 하나에 우리나라 25원. 한시간 남짓 공연에 2500원을 번 그날, 아저씨는 나에게 부자가 됐다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즉석에서 벌어지는 마술공연, 동전 하나면 동네스타다.
한글을 배우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한글 교실을 열었고 영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영어 교실을 열었다. 토익 한번 보지 않은 내가, 영어교사를 하고 있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비정부 기구를 방문하여 나라 사정을 알아보고 빈민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나와 같은 꿈을 가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 어울리며 미래를 계획할 수 있었다. 비정부기구의 한계와 약점은 내 마음을 아프게도 했다.
식상한 말이지만 여행은 날 살아있게 만들었고 날 더욱 가치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더욱 도전하게 만들었다.

4번째 만나는 스리랑카 비정부기구의 아이들과 사람들. 이젠 가족이나 다름 없다.
3장 꽃거지가 되다.
인도 여행을 하다 한국의 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뭐할꺼야?"
난 대답했다.
"뭐 에펠탑 앞에서 프리허그나 할까?"
"우와 재밌겠다."
난 주저 하지 않았다. 전 재산을 털어 12월 25일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표를 샀다. 나의 당시 통장 잔고는 4만원 이었다.
도전하고 싶었다. 비싸기만 한 유럽여행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걸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사람이 재산이고 사람이 선물이다. 유럽이든 어디든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많다. 그 믿음을 가지고 갔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참 따뜻했다.

가끔은 여행경비를 위해 색다른 직업을 가졌다. 메니큐어를 칠해주고 4박5일 숙식제공받기!
2년이 넘는 여행 노하우는 나의 도전에 큰 힘이었다. 혼자 잠을 구걸하고 먹을 것을 얻어먹는 것은 너무도 쉬운 생각이 들어서 대안학교를 다니는 열일곱살 아이를 한국에서 불렀다. 이제 한 아이의 책임자가 되어 둘의 잠자리를 잡아야 하고 둘이 먹을 양식을 구걸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바닦에 잔적은 있지만 아이는 항상 따뜻한 침대에 재웠다. 45일간 날 지켜본 태현이는 꼭 형처럼 살겠다는 말을 전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난 여행을 하며 글을 썼다. 라디오 사연에 글을 보내 상품을 타서 여행경비로 쓰기도 하고 가능하면 현지에서 일을 구해서 무슨일 이든지 했다. 하루는 배를 타는 어부가 되기도 하고, 하루는 짐꾼이 됐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커피를 만들었다. 돈의 액수를 떠나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2시간 강의를 하고 50만원을 받은적도 있었고, 16시간 배를 타고 일하고 2500원을 받기도 했다. 이런 돈으로 여행을 하며 하루 하루를 살았다.

스위스 해동검도 장에서. 공정여행을 브리핑하고 돈도 좀 뜯었다.
내 생활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에는 사실 넉넉치 않았다. 그래서 생각 해낸것이 후원이었다. 계좌를 오픈하고 나를 아는 지인들 중심으로 후원자를 모집했다. 월 1만원의 10명 정기후원자. 월 3천원의 100명 후원자. 그리고 100원 이상 1만원 이하의 자율 기부인 1004명의 천사후원자를 모집했다. 그들이 주는 마음으로 내가 만난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다.
그러다 내 소유마저 다 남을 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정확히 말해 얼마나 멋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하며 좋은 사진을 찍고 싶어서 카메라를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근데 그 돈이면 내가 만난 스리랑카 가족들의 꿈인 집 한채 가격이다. 카메라를 사는 대신 집을 선물하면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많은 여자들이 여행하며 자유롭게 사는 날 좋아해줬지만 이렇게까지 특별하게 살면 더 좋아할 것 같았다. 여자들 뿐이겠는가, 남자들도 다 똑같지!
여행하는 나. 간지 하나는 작살이다.
마음을 먹은 뒤 거지로 살았다. 사전적 의미에서의 거지였다. 구걸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보자! 오프라인으로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돈을 구걸했다. 안주면 그만이었다. 주면 감사하게 받았다. 온라인 소셜을 통해 소통하는 사람들에게도 돈을 구걸했다. 집값이 없어 구걸했고 밥값이 없어 구걸했다. 사람들은 내 소유를 털어 빈민을 돕고 거지로 사는 내 모습이 즐거워보였는지 대부분 쉽게 지갑을 열었다. 잠자리를 구걸했고, 밥을 구걸했고, 지역을 이동할때는 히치하이킹을 이용하기도 했다. 물론 필요이상의 구걸은 하지 않았다. 거지보다는 꽃거지가 어감이 예뻤다. 외모는 꽃이 아니었지만, 향기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꽃거지라 칭했다. 사실 그래도 이정도 외모에 패션 센스면 꽃거지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나 구걸, 약간의 원고료를 모았다. 두달을 모으니 집한채 값이 되었다. 나의 생활력이란... 그리고는 스리랑카로 떠났다.
스리랑카 나의 친구들과 첫 레크레이션. 동서양에서 인기는 여전하다.
4장 꽃거지 희망을 선물하다.
"아들, 너무 고마워. 언제든지 놀러와. 아니, 여기 살면 안돼? 저기 해변가에 땅이 좀 있어. 너 원하면 줄께. 신부도 니가 선택해. 우리가 매일 밥도 해줄테니까 밥 걱정은 말고"
엄마는 오늘도 유난스럽다. 아침부터 할머니와 바깥 부엌에서 요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한켠에서는 공사가 한참이다. 확실히 내가 있으면 일 진척이 빠르다. 싱글 싱글 웃으시며 일하는 인부들을 위해 엄마는 카레와 밥을 잔뜩 해서 내놓으신다.
"내일이면 가네. 좀 더 있지. 완성되는거 보고 가면 좋을텐데, 낚시도 하기로 했잖아."
"빨리 갔다가 빨리 올께요. 나도 좀 쉬어야죠. 발리가서 서핑하고 놀다올거예요. 한국에 부모님도 좀 뵈야하구요."
난 공사를 다 마무리 하지 않고 스리랑카를 떠나기로 했다. 농장다섯개를 지어주고 집한채를 선물하니 동네에서 날 신격화 했다. 몇몇 가족들은 자신의 생계가 보장됐다며 고맙다는 표시로 내 발에 키스를 하려고 했다. 집은 그렇다쳐도 농장은 후원자들 돈으로 하는데 그 영광은 내가 다 취했다. 무언가 공정해보이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인데 한일에 비해 너무 많은 찬사를 받는 것은 멋있어보이지 않았다.
집 기초 공사 하는 날. 농장을 다섯개 지은 후라 막노동 근육이 자리 잡았다. 아 간지...
스리랑카에서 마지막 날 밤. 난 비정부기구로 아이들 열댓명과 현지 친구들 몇몇을 초대했다. 음식을 나누고 파티를 했다. 난 내 8년된 여행가방을 그들 앞에서 뒤집어 엎었다.
"가지고 싶은거 있으면 가져"
아이들은 선글라스부터 티셔츠까지 연신 땡큐를 외치며 얼마 안되는 내 물건들을 필요에 따라 나눴다. 이제 내 가방에 남은 것은 노트북과 카메라, 그리고 속옷 두벌 티셔츠 두벌이 다였다.
공항으로 향하는 점심. 엄마와 할머니가 나에게 찾아왔다. 내 가방보다 더 큰 보따리를 챙겨왔다. 새벽부터 만들었다며 한국의 부모님께 전해주라며 떡을 한박스 해주셨다. 공사할때 간식으로 먹던 땅콩이 참 맛있었는데 그 땅콩도 한봉지 챙겨주셨다. 농장을 선물 받은 싸지와 마두는 나에게 과자를 건냈다. 쓰나미로 엄마를 잃은 씨암은 나에게 목걸이를 건냈다. 식당에서 일하는 쇼미는 도시락을 싸줬고 집앞 레스토랑 아저씨는 콜라를 나에게 건냈다.
비워둔 가방이 하루도 채 안되서 꽉 찼다. 간식이 가득 찬 가방은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 길거리 사람들과 나누었다.
마지막날 공사현장. 재수씨(뱃속 아기) 할머니 엄마 형 목사님 왼쪽부터 차례로.
아이가 아프고 집이 없는 한 가족, 과부와 두 손녀가 사는 가족, 10명의 자녀가 있는 가족, 구걸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족, 부모가 없는 3남매에게 가족에게 직접 농장을 선물했다.
집시학교에 교구와 책과 책장, 그리고 선생님을 위한 자전거를 기부했다.
수많은 가족사진을 찍고 일주일에 두번의 레크레이션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과 소풍을 다녀오고 수많은 가족들의 집에서 먹고 자고 즐겼다. .
교재 제공 인증. 학교에 처음으로 200개 넘는 교구와 교재가 들어왔다.
실론의 나라. 인도의 눈물이라 잘 알려진 스리랑카.
2004년 인도네시아의 대형 지진이 일어났을때 스리랑카 한 지역이 쓰나미로 크게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지의 나의 가장 친한 친구 Babu는 그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There's no sigh. The tsunami destroyed everythings. It was disaster" ( 아무런 경고도 없었어요. 쓰나미는 모든걸 파괴했어요. 그건 재앙이었어요 )
아무이유없이 삶의 터젼을 빼앗겨 버린 그들에게 아무 조건없이 희망을 선물하고 싶었다.
5장 여행중 에세이..
5-1
싸지와 마두
싸지(17)와 마두(15)는 스리랑카 아루감베이에 사는 자매입니다.
아버지가 알콜중독으로 돌아가시고 과부가 된 어머니는 재혼을 하셨죠.
이곳에서 재혼을 하면 그 전 아이들을 공식적으로
데려간다는 것은 사실 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싸지와 마두는 할머니의 손에 맡겨진 채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있죠.
가게라고 말해봐야. 모든 물건을 제값 주고 산다해도 5만원도 안되는 작은 동네 가게 입니다. 하루에 나오는 수익이 천원을 넘지 않는 날이 수두룩 합니다.
그 돈으로 3가족이 살아가는거죠.
할머니와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을 위해 치킨농장과 가게 확장사업을 동시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집 앞마당에 벽돌을 쌓아 작은 닭장을 만들고 그곳에 닭을 길러 알을 얻는 형태의 작은 생계지원 사업 프로젝트 입니다. 20마리의 닭과 닭장, 초기 사료등을 제공하면 하루에 알 15개 기준 200루피(한화 2천원)의 고정적 수입이 생기는 겁니다. (3인가족 기본 식비지원 가능)
그리고 가게에 물건을 더 들여놓아 할머니가 장사를 계속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습니다.
한낮 35도가 넘는 땡볕에서 벽돌을 쌓고 모래를 나르고 땅을 파야하는 고된 일이지만,
벽돌이 한장 한장 쌓여가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는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은 또 하나의 행복입니다.
싸지와 마두. 그리고 할머님을 위해 희망을 삽질하여 건내는 꽃거지 어린아저씨 이고 싶습니다.
농장이 인연이 되어 1:1결연을 맺은 싸지와 마두. 사진은 둘째 마두!
5-2
체코 프라하에서 스위스 취리히까지 약 700Km
추운 겨울 고속도로 한복판
"거지야. 그렇게 고생해서 갈 봐에는 차라리 너 좋아하는 글 써서 돈 벌어서 편하게 가는게 좋지 않아?"
"맞아. 하지만 그건 세상의 계산법이겠지. 지금 내가 도전하는 이 경험은 세상 어떤 돈을 줘도 못하는 거야!"
그렇게 주인을 잘못 만난 내 몸둥아리는 오늘도 걷고 뛰고 또 걸었다.
수천대가 넘는 차가 내가 든 표지판과 방긋 웃는 얼굴을 뒤로 하고 지나쳤다.
그렇게 36시간을 춥고 배고픈 도로위에서 보내고 8번의 히치하이킹으로 취리히 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포기 하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진다.
아마 내가 오늘 수천대의 차를 흘려보내고 낙심하여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인디언이 기도하면 비가 온다.
비가 올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먹으면 이루어 진다.
이루어질때까지 도전하기 때문이다.
허세는 세계최고다.
히치 하이킹. 4시간 아무 차도 서지 않을때는 포기하고 싶었다.
5-3
맘에 걸리는 일.
2주내내 맘에 걸리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 이야기좀 들어주실래요?
스리랑카 집시촌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는 결혼을 늦게 하여 6살 9살 두 아들과 40대 아내와 살고 있었습니다. 젊은시절 집시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여 몸에 장애가 생기고 엉덩이에는 창에 찔린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는 할아버지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었습니다.
아이들과 아내는 다른 마을로 구걸을 하고 자신의 집에서 작은 생필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이 가족을 위해 사실은 치킨농장을 하나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제 생계는 유지가 되는거죠.
치킨농장을 다 짓고 인사를 하는데 연신 저에게 인사를 하시며 제 발에 입맞춤을 하려는 할아버지. 방긋 웃으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제 마음이 참 따뜻해졌습니다.
근데 할아버지에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아랫배에 복수가 크게 차올라 있었습니다. 성기를 중심으로 커진 복수는 그 크기가 성인의 머리만했습니다. 순간 그 징그러운(죄송합니다. 그 때 느낌은 그랬습니다.) 모습을 보고 전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병원을 가봤냐는 말에 병원비가 없어서 못갔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겁을 주었지만 겁만 주었지 병원을 가라고 병원비를 쥐어줄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날 제가 가진 모든 돈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후 였습니다. 이별하며 생각했습니다.
"영준아 니가 모두를 도울 순 없어. 이 사람 말고도 죽어가는 사람들 많이 지켜보잖아. 넌 할만큼 했어"
실제로 그러합니다. 제가 조금만 손을 뻗으면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하지만 봉사와 나눔은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라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외면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2주가 지난 지금까지 이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전 이 할아버지를 직접적으로 도와줄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돈을 벌어서 병원비를 드릴 수 있겠지만. 아니면 제가 가진 소유를 팔아 드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제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도록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
요점입니다.
할아버지 병원비를 위한 성금을 모아보려 해요
일단 병원에는 보내드리고 싶어요. 아무리 봐도 그분 살으셔야 해요.
애들이 어려요. 웃는 모습이 너무 이쁜데... 그거 지켜줘야해요.
후원계좌로는 할 수가 없어요. 공정하지 못한 일이거든요.
100원이라도 1000원이라도 좋아요.
모은 성금과 제 용돈으로 어떻게 한번 해볼께요.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꼭 돈이 아니어도
잠깐 눈을 감고 기도해줬으면 좋겠어요.
이 가족의 미소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부탁해요.
거의 완성된 치킨농장과 아프신 할아버지내 식구. 형은 구걸하러 나갔다.
- 하루동안 온라인 모금운동을 했고. 102명이 160만원의 성금을 보냈다.
할아버지는 병원에 갈 수 있었고 수술은 위험이 있어 거절했다.
성금은 약값과 공정여행 후원금에 쓰였다.
여행을 통해 난 알게 됐다.
성공한 삶이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라는 것을.
부자란 많이 가진자가 아니라 많이 나누는 사람이란 것을.
꿈꾸고 도전하고 행동하면,
그리고 노력하면 이루어 진다는 것을.
마지막 이야기.
그래. 난 거지다. 여행하며 향기로 말을 거는 꽃거지다.
함부로 거지같다 하지 마라.
청춘의 그대.
거지같은 그대의 삶에 여행으로 향기를 불어넣어라!
포털사이트에 꽃거지한영준 어린아저씨한영준 을 검색하면 뭐하나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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