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력, 새로운 사치품이 되다
-메리 해링턴 언론인
https://www.nytimes.com/2025/07/28/opinion/smartphones-literacy-inequality-democracy.html

1980년대, 부모님은 나를 영국의 한 발도르프 학교(대안학교의 한 종류)에 보냈다. 당시 학교는 아이들의 TV 시청을 말리고, 대신 독서와 체험 학습, 야외 활동을 강조했다.
그때는 그런 규제가 답답했지만, 어쩌면 그들은 무언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는 지금도 TV를 거의 보지 않고 책을 많이 읽는다. 하지만 학창 시절 이후, 훨씬 교활하고 매혹적인 기술인 인터넷, 특히 스마트폰이 세상을 장악했다. 이제는 몇 분이라도 집중하려면 휴대폰을 서랍이나 다른 방에 치워둬야만 한다.
약 100년 전 지능 검사가 발명된 이래, 국제 IQ 점수는 '플린 효과'라 불리며 꾸준히 상승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의 지적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는 능력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대다수 OECD 국가에서 성인의 글 읽고 쓰는 능력이 정체되거나 감소했다. 특히 소득이 낮은 계층에서 하락세가 뚜렷했다. 아이들의 문해력 또한 마찬가지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존 번-머독은 이를 '탈문자(post-literate)' 문화의 부상과 연결한다. 빽빽한 글 대신 이미지와 숏폼 영상으로 정보를 소비하는 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다른 연구는 스마트폰 사용과 청소년의 ADHD 증상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했고, 이제 미국 성인 4명 중 1명은 자신이 ADHD일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학생들의 독서 능력이 떨어지자 학교와 대학에서는 책 한 권을 통째로 읽히는 과제를 점점 줄이고 있다. 2023년, 미국인 절반 가까이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기술이 우리의 집중력뿐 아니라 읽고 추론하는 능력까지 바꾸고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 현상이 또 다른 불평등을 낳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선뜻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정크푸드 문제를 떠올리면 쉽다.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초가공식품이 넘쳐나면서,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할 여유가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사이에 거대한 격차가 생겼다. 서구 선진국에서 비만이 빈곤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된 것처럼 말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음'의 문제 역시 계급을 따라 흐를까 두렵다.
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때로는 힘든 훈련이 필요하다. 문해력 학자 매리언 울프의 설명처럼, 깊이 있는 독서 능력을 갖추는 과정은 말 그대로 뇌를 개조하는 일이다. 어휘력이 늘고, 뇌 활동이 분석적 사고를 담당하는 좌뇌 중심으로 바뀌며, 집중력과 논리적 추론 능력이 단련된다.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표현의 자유, 현대 과학, 자유 민주주의 같은 가치들이 꽃필 수 있었다.
반면 디지털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사고 습관은 전혀 다르다. 생산성 전문가 칼 뉴포트는 저서 '딥 워크'에서 디지털 세상이 어떻게 우리의 주의를 흩뜨리는지 보여준다. 온갖 알림과 요구가 끊임없이 우리의 집중력을 뺏기 위해 경쟁한다. 소셜 미디어는 중독적으로 설계됐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깊은 사유보다 순간적인 자극에 반응하도록 길들여진다. 그 결과, 우리는 글을 읽더라도 건성으로 훑어보거나 단편적인 정보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는 데 익숙해진다.
점점 읽는 행위 자체가 불필요한 시대가 되고 있다. 틱톡이나 유튜브 쇼츠는 끝없이 흥미로운 짧은 영상을 제공한다. 여기에 온갖 밈, 가짜 뉴스,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 적대적인 허위 정보, 그리고 AI가 쏟아내는 저질 콘텐츠까지 뒤섞인다. 이는 마치 우리 뇌를 정크푸드 코너에 던져 놓은 것과 같아서, 그 유혹을 뿌리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개인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정크푸드를 멀리하듯 디지털 미디어도 건강하게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건강에 해로운 음식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를 주듯, 디지털 미디어의 인지적 해악 역시 사회경제적 하위 계층에 집중될 것이라는 점이다.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과거부터 문해력과 빈곤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제는 가난한 아이들이 부유한 아이들보다 스크린을 보는 시간이 더 길다. 2019년 한 연구를 보면, 연소득 3만 5천 달러 미만 가정의 10대들은 10만 달러(약 1억3500만원) 초과 가정의 또래보다 하루 평균 2시간 더 스크린을 봤다. 연구에 따르면, 하루 2시간 이상 오락용으로 스크린을 보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기억력, 정보 처리 속도, 주의력, 언어 능력 등이 모두 뒤처졌다.
솔직히 말해, 인지적으로 건강한 선택을 하기는 어렵다. 더 쉽고 자극적인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깊이 있는 독서는 머지않아 소수 엘리트만의 전유물이 될지 모른다.
이미 엘리트, 종교 단체, 보수주의자들은 기술 사용에 스스로 고삐를 죄고 있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미국에서는 250개가 넘는 고전 교육 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들 중 다수는 기독교계 학교로, 긴 호흡으로 고전을 읽는 것을 교육의 중심으로 삼는다. 보수 싱크탱크 연구원이 쓴 '테크 엑시트: 스마트폰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는 실용 가이드' 같은 책도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보수주의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빌 게이츠나 에반 스피겔 같은 기술 업계 거물들도 자녀의 스크린 사용을 제한한다고 밝혔다. 어떤 부모는 '휴대폰 사용 금지' 계약을 맺는 보모를 고용하고, 기기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는 발도르프 학교에 자녀를 보낸다. 여기서 계급의 단면이 날카롭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고전 학교는 비싼 학비를 내야 한다. 한 발도르프 학교의 경우, 자녀를 스마트폰의 해악에서 지키려면 초등 과정에만 연간 3만 4천 달러(약 4700만 원)가 든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많은 주에서 학생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공정한 운동장을 만드는 조치다. 하지만 이런 규칙이 가정은 물론이고, 소규모 사립학교와 거대한 공립학교에서 똑같은 강도로 지켜질 것이라 기대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실리콘밸리 너머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도파민 단식'이라는 이름으로 소셜 미디어 같은 디지털 자극을 의도적으로 끊으며 자기 계발에 힘쓴다.
이처럼 인지 능력을 지키려는 금욕적인 노력은 아직 부유층에 집중된 소수의 문화다. 하지만 스마트폰 없는 세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어른이 되면서, 우리 사회의 문화적 계층화는 더욱 극명해질 전망이다. 한쪽에는 집중력과 논리적 사고력을 의식적으로 계발하는 소수의 집단이, 다른 한쪽에는 사실상 글을 읽고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거대한 대중이 존재할 것이다.
이런 미래가 완전히 현실이 되면 어떻게 될까.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잃은 유권자는 진영 논리에 쉽게 갇히고, 이성보다 감성에 휘둘리며, 사실이나 역사적 기록에 무관심해진다. 합리적 주장 대신 분위기에 휩쓸려 허황된 믿음이나 기괴한 음모론에 빠져들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면, 서구 사회가 이미 이 길에 얼마나 깊이 들어섰는지 보여주는 신호다.
이런 대중은 영악한 선동가들에게 부패를 위한 최적의 토양을 제공한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책을 바꾸려는 소수의 권력자들은, 대중이 따분하고 복잡한 정책을 들여다볼 집중력이 없다는 사실을 이용해 이득을 챙길 것이다. 이제 대중이 원하는 것은 치밀한 조사가 아니라, 상대를 조롱하는 짧은 영상 하나다. 지배 계급은 대중의 이성적 능력 저하에 실용적으로 적응할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형식은 유지하되, 핵심 정책은 변덕스럽고 조종하기 쉬운 시민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놓는 식으로 말이다. 결코 반가운 미래가 아니지만, 우리의 '디지털 세대' 청년들은 무관심해 보인다. 여러 국제 여론조사에서 Z세대의 민주주의 지지율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오해는 말기 바란다. 대중을 소외시키고 정책과 여론의 격차를 이용해 이득을 볼 기회는 진보와 보수, 어느 한쪽에만 주어지지 않는다. 이 '탈문자' 세계는 엘리트의 언어와 저급한 밈(meme)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선동가에게 유리하다. 진실성보다는 자신감 넘치는 인물, 뛰어난 소셜 미디어 감각을 지닌 권력자에게 유리하다. 돈도, 힘도, 자신을 대변해 줄 사람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유리하지 않은 세상이다.
*해링턴은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다. 온라인 매체 '언허드(UnHerd)'의 기고 편집자이며, 저서로는 '진보에 반대하는 페미니즘'과 출간을 앞둔 '왕과 군중'이 있다.
-
◇ NYT 독자 반응
-사람들의 주의력과 사실 및 논리를 존중하는 능력이 이미 1950년대와 60년대 TV 때문에 망가졌다고 생각한다. '롱폼(long form)'이라는 용어 자체도 PC와 스마트폰 시대에 생긴 말 아닌가. 아마 에세이나 책을 뜻하는 것 같다. 이런 인터넷 용어들이 정확한 사고를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인이 아니며 진지한 독서를 많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왜 외면하나. 이건 최근에 생긴 현상도 아니다. 그리고 PC와 스마트폰으로 수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건, 다소 단순화된 형태로 제공되더라도 좋은 일이다. 약간의 결함은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 대중적인 문해력 자체가 역사적으로 꽤 최근에 발전한 것이다. PC와 휴대폰은 방대한 정보에 즉각적이고 저렴하게 접근하게 해준다. 그중 상당수는 실제로 정확하다. 20년 전만 해도 정보를 얻으려면 도서관에 가거나 서점에서 책을 찾아 헤매야 했다. PC와 휴대폰의 보편성은 정보 접근성을 평등하게 만드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된다. (워싱턴주)
-이 문제는 정보 관리에 더 가깝다. 칼 세이건은 뉴욕 공립 도서관에 200만 권의 장서가 있지만, 한 사람이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은 고작 2000권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만약 그 책들을 되는대로 고른다면, 그건 거의 완벽한 비효율의 극치다. 서로 아무 관련 없는 요리법, 난해한 논문, 희귀한 전문 서적을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다. 이런 무작위성이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미국인들은 쏟아지는 헤드라인과 자극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일관성을 부여해 줄 필터를 찾아 헤매고 있다. 방대하고 복잡한 정보, 허위 정보, 단편적인 말, 전문가들의 의견에 직면한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은 개인적인 정보 압축 알고리즘으로 '진영 논리'를 택한다. 섀넌의 이론으로 말하면, 정치적 진영 논리는 압도적인 선택지를 좁은 해석의 틀에 끼워 맞춤으로써 불확실성의 척도인 엔트로피를 줄인다. 특정 진영의 이념에 동조하면 혼란은 '우리 대 그들'이라는 관리 가능한 신호의 흐름으로 바뀐다. 우리의 진영 논리는 인지적 편안함을 위해 의미 있는 대화를 희생시킨다. 밈, 슬로건, 구호는 깊이 있는 토론을 대신하는 저품질 대리인 역할을 한다. 내부자에게는 효율적이지만 외부자에게는 해독 불가능하다. 각 진영 내부에서는 엔트로피가 감소하지만, 진영 간에는 치솟으며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상호 이해를 무너뜨린다. (텍사스)
-필자의 주장은 한 가지를 제외하고 모두 옳다. 부유한 가정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장벽은 부모의 끈기와 참여다. 나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한 곳인, 테크 기업 임원들이 모여 사는 베이 에어리어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나는 평범한 소득층이었지만, 아이들의 스크린 타임을 엄격히 제한했다. 그건 전쟁이었다. 스마트폰의 중독성을 깨닫고 사용을 줄이려 했을 때,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고, 어느 정도 성공한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다. 부유한 기술 기업 임원 부모들이 매번 포기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들은 화난 십 대 자녀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했다. 내 아이들이 대학에 갔을 때, 그들은 사실상 혼자였다. 제대로 '독립'한 또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이의 친구들은 졸업 후 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부모님 집에 살고 있다. 몇몇은 식료품점 같은 소매업에서 일한다. 그렇다. 빅테크 임원들의 자녀인 젊은 성인들이 여전히 집에서 스크롤을 내리고 비디오 게임을 하며 앉아있다. 필자가 묘사한 현상은 현실이다. 돈이 어린 시절의 뇌가 썩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유일한 요인은 아니다. 부모의 끈기와 문제에 대한 인식이 단연코 가장 중요하다. 간단히 말해, 아이의 애원과 떼쓰기를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가. 기꺼이 전자 기기를 내려놓고 아이들을 바쁘게 만들 의향이 있는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일이다. 게으른 양육과 참여하고 깨어있는 양육이 여기서 모든 차이를 만든다. (캔자스)
-고등학교 생물 교사로서 37년째 교직 생활을 하고 있다. 학생들에게서 많은 변화를 봤지만, '구글 효과'라고 부르는 것만큼 해로운 것은 없었다. 구글과 함께 자란 학생들은 아이디어 간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비판적 사고가 필요한 질문에 스스로 답을 생성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항상 그대로 베낄 무언가를 찾고 있을 뿐이다. 챗GPT와 유사한 AI가 등장한 짧은 시간 동안 이 하락세는 정말 가팔라졌고, 앞으로 더 나빠질 일만 남았다. 아이들은 또래와 직접 만나 사귀는 데도 서툴다. 수업이 몇 분 일찍 끝나면 나는 학생들에게 컴퓨터나 휴대폰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우리 학교는 명목상 휴대폰 사용이 금지되어 있지만, 나와 몇몇 교사만 그 규칙을 시행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서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몇 분 동안 교실이 얼마나 조용한지 믿지 못할 것이다. 아주 슬픈 일이다. (필라델피아)
-
출처 - 디미토리
2차 출처 ㄷ.ㅋ


인스티즈앱
선정성 논란으로 기사까지 났던 지하철 스크린도어 시 3개...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