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ch.yes24.com/Article/View/43888
권김현영의 입을 빌어

당시에는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불시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암호 같은 감정이 둥둥 떠다녔다.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감정을 다루는 건 난제 중 난제였다,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뭐고, 사랑은 또 그중에서도 뭐가 다르지, 얼굴을 보고 좋아하면 왜 가벼운 마음이라고 취급받고, 태도나 성격을 보고 좋아하면 그렇지 않은지, 상대에 대해 뭘 안다고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지 하나같이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러다 갑자기 벼락처럼 깨달았다. 상대를 '알기'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한 다음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나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된다는 걸.

퀴어 로맨스 영화가 나올 때 흔히 등장하는 비평적 클리셰가 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우연히 동성이었을 뿐”이라는 설명, 비평가뿐만 아니라 감독이나 배우도 종종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반동성애 혐오세력의 감시라도 받는 것처럼 잔뜩 눈치를 보거나 동성애를 이성애와 다르지 않을 때만 인정할 수 있다는 식이라서, 그런 말은 좋게 말해도 지루한 다원주의자의 태도이고 나쁘게 말하면 선량한 차별주의자인 거라고 참견을 하고 싶어지곤 했다.
우연히 동성일 뿐이라니. 이성애 로맨스각본이 얼마나 철저하게 가부장제의 정치경제적 이해에 맞춤하게 제공되는지를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말인지 알 수 있다. 이성애 로맨스 각본은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의 갭차이를 강조하고 그 차이를 극복하는 사랑의 위대함이라는 메시지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갭차이는 통상적으로 남자주인공에게 재력과 권력을 몰아주고 여자주인공은 미모와 성격으로 승부한다. 최근에는 이 각본이 뒤집히는 경우도 있으나 기껏해야 나이 차이 정도로 변주될 뿐 남자주인공이 아무런 능력이나 배경 없이 오직 성격과 외모만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경우는 없거나 매우 드물다. 제도로서의 이성애 안에서 사랑은 예외적인 지위를 차지하며 그 사랑 역시 당대의 사회규범이 허용하는 선에서 관리된다.

는 이십 년 동안 상대를 잊지 못했던 40대 여자 두 명이 다시 자기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 서로를 만나게 되는 중년 퀴어 여성 로맨스 영화다. 나는 이 영화에서 특히 두 가지가 흥미로웠다. 결말에서 둘이 마침내 사랑을 확인해서 함께 있기로 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는 것. 두 사람의 만남 그 자체보다는 두 사람을 마침내 만나게 하는 다른 두 명의 조력자 역할이 매우 강조되었다는 점이 그랬다. 이 영화의 관심은 두 사람의 사랑 그 자체보다는, 두 사람이 자신이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 즉 동성애자라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연히 상대가 동성이었을 뿐’이라는 가정은 성립될 수 없다. 동성애가 금기인 이유는 단지 낯설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애가 규범으로 존재하고 제도로서 강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상대가 동성일 때, 이것은 언제나 끌림의 문제를 넘어서 세계관의 문제가 된다.

윤희와 쥰은 이십 년 전 서로에 대한 감정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둘은 얼마나 두려웠을 것이며 그럼에도 얼마나 용감했던 걸까. 하지만 그 모든 용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때 그 용기는 얼마나 무용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 봐.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사랑은 구원은 아니지만 희망은 될 수 있으니까. 사랑이 끝내 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만은 나 자신으로 살게 하는 것일 테니까.
이 날씨면 생각나는 영화라
여성학자 권김현영이 쓴 평론을 가져왔어

인스티즈앱
요새 망삘느낌 강하게 오는 배민 근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