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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빛 트라우마 6

성용은 제 옆에 엎드려 잠과의 만남을 이어나가는 자철을 주시했다. 벌써 청용과 자철을 소개 시킨 지는 한참의 일이었다. 청용과 제가 둘이서 다녔을 적과도, 자철과 제가 이야기를 할 적과 달라진 점 하나 없기에 안심을 하던 성용이었다. 자철은 그 사이 조금의 마음 속 빈 공간을 성용에게 내어준 모양인지 조금은 따스해졌을 지도 몰랐다. 자철이 먹다 남은 빵을 처리할 방안이 따로 없어 성용에게 던져 주었을 적에도 성용은 나홀로 그 마음에 감명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자철이 점점 저에게 마음을 열어간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성용에게 활기를 주었다. 성용은 자철이 저에게 소중하듯 제가 자철에게 이곳에서 '유일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소중했다. 짧은 기간 내에 기성용이란 석자를 그 마음에 새겼으니.

새근거리는 자철을 한참이나 주시한 성용은 선생님의 꾸중을 받을 적까지 눈을 떼지 못하였다. 꾸중에 의해 거둬진 성용의 뜨거운 시선도 없겠다, 자철은 중간에 깨지 않고 편히 꿈 속을 노닐 수 있었다. 한창 장마철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온통 잿빛으로 얼룩져 청용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한창의 짐들이 사라질 생각에 성용은 가뿐했다. 비에 젖어 질퍽한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일도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들을 일도 점차 줄을 것이었다. 자철에게 향하는 제 눈을 애써 돌리며 성용은 지루하기 짝 없는 수업에 겨우 집중했다.

기말 고사가 머지 않은 지라 적막감만 감도는 수업 시간을 시끄러운 종소리가 구제해 주었다. 간단한 인사 후 나가시는 선생님의 끝을 지켜보던 성용은 기다렸단 듯  몸을 돌려 다시 자철을 바라 보았다. 적절하게 탄 피부와 콧날, 약간 멀어져도 꽤 크던 감겨진 눈. 그런 모습 하나 하나 성용은 제 시야에 담았다. 성용은 자철이 마치 위태로운 밧줄 위 제 정신 하나만을 붙들고 매달린 광대같았다. 무엇이 그리도 자철의 마음을 꽁꽁 싸매게 하였을까. 그 위 흔들리는 자철의 모습이 연상된 성용이 손 한 편을 들어 자철에게 내밀으려는 순간 자철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뭐하냐?"

아냐, 아무것도.
성용은 머쓱한 듯 웃었다. 자철이 이상하다며 미간을 좁히곤 등을 펴자마자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청용이 그 사이로 슬그머니 들어와 앞 자리에 앉았다. 청용은 슬그머니 자철과 성용의 시선을 피해 제 자리 였던 이제는 자철의 자리인 성용의 옆 자리를 보곤 입술을 축였다.

당장이라도 자철을 끌어내 제 자신이 저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성용이 그를 달갑게 받아들일 인물은 아니었다. 배 아프단 핑계로 일찍 반에서 나와 쉬는시간의 종이 치기 전 성용의 반 앞을 서성이던 청용은 소중하다는 듯 자철을 쳐다보는 성용의 시선과 내미려던 손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런 청용에게 유일하게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이미 자철에 대한 애정이 성용을 점유해 나가는 것을 성용 제 자신이 눈치 채지 못했단 사실이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 둘 사이에 껴 대개 성용이 주도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청용은 종이 치자 자리에 일어났다. 청용은 제 씁쓸한 표정을 아무도 보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분명 저가 먼저 성용과 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둘 사이에 괜히 낀 느낌이 된 듯한 기분을 청용은 톡톡히 맛보고 있었다. 청용은 애써 웃으며 가겠다며 반문으로 향했다. 성용은 조금 뒤에 보자며 자신에게 얘기했다. 청용은 그저 웃기만 했다. 지금 또 다음에 오지 않겠단 생각을 하면서도 청용 역시 제 스스로 성용을 보지 못하면 안절부절하는 것은 저란 것을 알았기에 다시 이 반에서 씁쓸함을 맛보러 제 발로 걸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 일어나 제 반으로 향하려는 청용을 그저 보기만 하던 자철은 청용이 문 밖으로 나가기 직전 끄덕이기만 하던 고개덕에 굳게 닫혔던 입술을 열었다

"이청용."

밖에 나가려던 청용은 생각치도 못한 부름이었는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자철은 입술을 굳게 닫은 채로 청용을 마주했다. 성용이라는 울타리 안에 엮여 있었던 둘이었기에 서로간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 봐도 무관했기에 그런 부름은 성용에게도 놀라웠다.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청용을 보는 성용의 시선을 맛본 청용은 자철을 주시했다.

"조금 있다가 매점으로 와라. 기성용은 내가 떼놓고 갈게."

자철은 청용에게 피식 웃었다. 자철의 웃음을 처음 본 청용은 순간 당황해 알았다는 말을 뱉은 후 제 교실로 돌아갔다. 왜 자기는 뺴놓냐는 신경질적인 성용의 목소리가 들린 것만도 같았다. 성용의 목소리였기에 청용의 귀에 들렸던 것이지 다른 목소리였다면 신경도 못 쓸 겨를로 청용은 자철의 한 마디에 휩쓸려 이러저러한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제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들은 점차 느려져만 갔고, 청용의 생각들은 그와 반비례로 더욱더 깊어져갔다.

…결국 발걸음을 멈추고야 만 청용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자철과 성용의 반을 다시 쳐다 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성용 때문이 아닌 다른 이 때문에. 갑작스레 달라진 자철의 태도에 청용은 그대로 모든 생각을 주제 자철으로 내어 주고야 말았다. 자철이 원했던 바처럼.

덕분에 청용은 제 수업 시간에도 늦게 들어가는 것은 물론 수많은 지적들을 받았다.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었기에 주영 역시 걱정 어린 기색으로 청용을 걱정했다. 청용은 메마라 붙은 입술을 겨우 떼 놓으며 괜찮다 답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주영의 걱정 어린 낯빛이 되돌아 온 것은 아니었지만 청용의 괜찮다는 단호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자철은 생각보다 꽤 간사한 인물이었을 지 몰랐다. 늦은 편이 아닌 눈치로 청용이 성용에게 보내는 애정으로 점유된 눈빛도 저에게 슬그머니 내비치는 질투의 행동도 자철은 정확히 꼬집어 내진 못하더라도 그를 지레짐작을 하곤 청용이 그에 따라 움직여 휘둘릴 방안까지 생각해낼 정도로. 

덕분에 청용은 정말 매점 앞 나홀로 있는 자철에 당황을 머금었다. 자철이 함부로 말을 내뱉을 위인이 아니란 것을 청용은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저에게 자철이 호의와 대화를 건낼만한 관심을 저에게 두지 않았으리라 착각하던 청용이었다.

"구자철?"
"아."

자철은 청용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그저 정적만으로 태도를 일관했다. 어색함만이 감도는 이상한 기류에 청용은 연속적으로 당황을 맞이했다. 침을 삼키며 자철에게 눈을 잠시 흘깃거렸지만 자철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청용 쪽으론 시선 한 올도 던지지 않았다. 청용은 그런 자철을 훑었다. 마치 자철을 처음 만났을 적 자철을 유심히 살폈던 성용마냥.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어?"
 
얇은 유리창마냥 위태롭던 침묵을 깬 것은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시킨 자철 제 본인이었다.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소리가 제 귀에 안착함에 청용은 당황한 기색으로 자철을 마주했다. 청용이 본 자철은 우선 낯가림이 심했고 사람과의 거리감에서 큰 장벽을 두었다. 청용처럼 세심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철의 그런 기색은 누구나 알 것이라 청용은 확실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철의 이 다가옴이 청용은 당황스러웠다. 저를 마주보는 자철의 짙은 쌍커풀과 그 눈망울에 청용은 침을 다시 삼켰다.
 
자철의 입술이 움직였다. 청용은 그런 움직임을 주시했다. 자철의 음성이 시끄러운 매점 소리를 가르고 청용에게 전달됐다. 청용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청용의 구렛나루가엔 식은땀에 송골송골 맺혔다. 자철은 그런 청용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마치 청용의 속까지 궤뚫어 간파한 마냥.
 
*  *  *
 
성용은 눈썰미가 없었고 사람이 보기완 다르게 둔했다. 하지만 청용과 자철이 그 둘만의 만남 사이 무언가 미묘한 변화가 생겼음을 한눈에 파악했다. 성용이 예리해진 까닭은 자철의 변화 때문일지 청용의 달라짐 때문일지 성용이 아직 알아차리지 않은 제 마음을 제외하곤 제 자신도 몰랐다.
 
청용과의 만남 후 아무렇지 않게 들어온 자철에 성용은 입 바로 앞까지 내려온 호기심의 질문들이 휘몰아쳤지만 피곤하단 듯 바로 엎드리는 자철에 그 모든 것들을 삼켜 내었다. 그러고 다음 쉬는 시간 오지 않는 청용에 저번 정호와의 사건이 생각나 먼저 일어나 청용의 교실로 향했다. 그런 성용을 반기는 것은 늘 그래왔던 해사하게 웃는 청용이 아닌 눈에 띄게 굳어 저와 눈을 맞추려 들지 않는 청용이었다.

무슨 일 있어?
아냐 아무것도
 
딱 잘라 짓는 청용의 대답과 엎드리는 청용의 둥그런 머리통은 단호했다. 그리고 성용은 확신했다.
청용과 자철 사이 모종의 대화가 오갔을 것이라고.



미도리빛 트라우마 7

세상은 넓었다, 그리고 사람은 많았다. 스쳐지나가다 옷깃만 스쳐도 연이라 운운하는 이 현세임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청용이 목을 메는 것이 성용이냐 묻는다면 청용은 묵묵부답이었다. 어느날 열병마냥 갑작스레 찾아온 존재인 첫사랑은 청용에게 어릴 적 제 개마냥 소중했다. 끙끙 앓아 열꽃까지 피어도 결국엔 제가 이겨내야만 하는 정말 그 마치 열병마냥.

 

청용이 성용을 마음에 품고 있어 삿대질을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속속들이 들켜 치부인 마냥 취급 받는 것 조차도, 그는 구태의연한 일이었다. 자철의 한마디 전까지는.

 

"혹시 말야 기성용 좋아해?"

 

자철의 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 한마디에 자신은 홀로 나락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고, 고개를 어렵사리 들어 지켜본 자철의 눈동자는 자철 제 스스로는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제 자신을 추궁하고 있었다. 사실 그 어조 모두가 확신에 차 있었다, 자신이 죄를 지은 것 마냥 숨이 턱 막혀오는 청용이었다.  지금껏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제가 성용을 좋아하는 것이 더러운 일은 아닐까란 의문과 수많은 질문들이 그 짧은 몇초사이 청용의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더욱더 우스운 것은 그 말 한마디에 아무런 대응도 취하지 못했던 청용 자신이었다.

 

"이런 이야기 할 거면 더는 나 안 불렀으면 좋겠다."

"그런 의도로 말한 건…"

"나 다음 시간 이동 수업이라서 먼저 갈게."

 

그렇게 벙쪄하는 자철을 뒤로 하고 청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향을 꺾었다.

얼굴을 붉혀 제 반으로 돌아오고나니 어땠냐 묻는 주영의 질문도 청용의 귓가엔 들어오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그렁거리는 눈물들을 애써 삼켜낼 뿐이었다.

 

만약 자철이 성용에게 제 마음을 이야기하면 어떡하지? 제 감정을 전하는 것보다, 제 감정이 무참하게 짓밟혀버리는 것보다 성용이 저에게 대할 태도가 청용은 두려웠다. 애초에 욕심을 바란 제 탓이 너무나도 컸다. 점점 커져가는 마음과는 절대적으로 반비례하게도 청용은 제 마음을 추스리려 심호흡을 했다. 이런다고 해서 성용에 대한 제 마음이 절대 바뀌지 않음을, 제 욕심이 사그라들지 않음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  *  *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주 큰 장마철이 한번 휩쓸고 지나갔다. 우습게도 제가 다가가면 제 몸에 바늘이라도 붙은 듯 떨어지려는 청용의 태도 탓에 성용은 요 며칠 간 청용의 상태가 어떠한지 모든 일에 대해서는 주영의 입을 통해 들었다. 확실히 자철과 청용의 매점에서의 단 둘만의 대화가 원인이리라 성용은 생각했다. 더욱더 성용이 기막혀 하는 일은 제 자신 스스로가 주영의 입을 통해 청용의 소식을 듣는 것이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 며칠 학교에서 자철과 대화와 축구를 하고 돌아오고 집에서 청용을 되짚으며 찾아갈걸 후회하는, 그런 일상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 속 자리 잡기란 굉장히 어려울 일일 것이었고, 누군가에게 있어서 소중하다는 의미를 얻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하지만 그 자리를 뺏기는 것도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것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성용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했던 청용의 자리가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씩 성용의 눈에 보여지는 자철의 마음이 열어지는 행동들이 늘어만 갈수록.

 

수업 시간 따분히 들려지는 선생님의 나긋한 음성에 반이 잠에 잠식된 잠긴 눈으로 성용은 제 옆의 자철에게 흘깃, 시선을 던졌다. 연필을 둥그렇게 돌리는 자철의 손아귀를 성용은 하나하나 주시했다. 그런 성용의 집요한 시선을 느낀 것인지 자철은 손을 거두고 헛기침을 했다.

 

사람은 본디 날이 서져 있는 존재가 아니다. 누구나 말상대가 필요했고, 누구나 외로움을 탔다. 자철 역시 그에 해당했다. 경계심이 짙은 자철에게 성용은 늘 같은 태도로 다가왔다. 아무리 투박스런 언어라도 모두 다 자철의 것이니 이해한다는 듯이.

 

"자철아."

"왜 불러."

"야 구자철."

 

성용은 말 없이 자철을 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자철은 그 시선에 무엇이 창피한 건지 괜히 익숙치 않은 그 시선이 제 몸을 콕콕히 쑤시는 듯 해 엎드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성용에게는 씨발이란 두 단어만 툭 던져놓곤.

 

엎드렸음에도 성용의 시선이 훤히 느껴진 자철이었다. 자철은 곰곰히 생각했다. 요즈음 보기 힘든 청용의 얼굴을. 자철은 그저 성용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면 저를 보며 밉다는 투로 쳐다보지 말았음 좋겠단 말을 하려 건넨 한마디에 얼굴을 붉히며 사라진 청용을.

 

정말 청용이 성용을 좋아하나? 하지만 자철은 그곳까지 신경쓸 정도로 마음을 내주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다만 두 의리 좋던 사이를 제 말 한마디가 갈라 놓은 것 같단 일말의 죄책감이 자철의 마음을 움켜 쥐었다, 성용이 청용을 염두해 둔 다는 것이 자철의 눈가에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용의 걱정이 청용으로 인해 사는 것이 신경쓰였던 것일까, 그냥 걱정하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 제 속내를 잘 모르는 자철도 사람이었다.

 

결국엔 자철은 청용을 찾아 매점과 수업 이외 거의 처음으로 교실 문턱을 나섰고 청용의 교실에 찾아왔다. 지난번 성용의 교실로 찾아왔던 주영이 보이자 우선 청용을 찾아야 겠다 싶어 이청용 좀 이라 말 한마디를 던지자 무엇이 못마땅한 것인지 자철을 위아래로 훑는 주영에 자철은 조금 언짢았다. 하지만 그에 대해 주영에게 무어라 말을 던지기도 전 창백하다 못해 피골이 상접했단 표현이 어울리는 청용의 모습에 신경질적이었던 표정이 자동으로 풀렸다.

 

괜히 양심의 가책이 조금 자철의 마음 위에 올라탔다. 청용은 자철의 등장이 썩 내키지는 않은 듯 바닥만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굳은 표정이 장악한 청용의 얼굴만을 지켜본 자철은 굳어진 입술을 혀로 축였다.

 

"교실 좀 와."

"…."

"기성용이 너 걱정해."

 

그제서야 청용은 고개를 들었다. 정말 기성용을 좋아하나, 연민일지 그저 신기함일지 자철은 순간 진심으로 청용을 동정했다.

 

"좋아하던 말던 내 알바는 아니니깐."

 

신경 안 쓴다고.

청용이 그 말을 되짚어보기도 전에 자철은 행여라도 청용이 제 어깨를 붙잡을까 황급히 고갤 돌려 제 교실로 향했다. 주제 넘은 말이었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저 자철은 옆에서 푹푹 한숨을 쉬는 성용의 모습이 보기 싫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린 비덕에 축축함만이 가득한 운동장 덕에 점심시간 성용은 교실에 발이 묶여 앉아 있었다. 그렇게 툴툴 거리던 투정을 자철에게 하던 와중 문을 열고 들어온 청용을 발견한 성용은 벌떡 일어났다. 그를 본 청용은 살짝 웃었다.

 

그런 청용과 성용을 자철은 살짝 주시했다. 무언가 조금 더 일이 꼬였다는 느낌이 들지만 자철은 그 이유를 몰랐기에 염두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경직된 표정을 애써 풀어 청용에게 조금 따스한 웃음을 내비쳤다.

 

첫인상은 사람을 판별해내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누군가와의 첫대면은 평생 그 꼬리표로 따라다닌다. 한번 고정된 고정관념을 탈피하기 위해선 무언가의 한 사건이 필요한 법이었다. 청용은 자철에게 가졌던 조금이나마의 언짢음이 슬슬 붕괴되는 것을 느꼈다. 성용을 생각해서라면 자철에게 이런 호의를 갖는 것은 굉장히 위험했지만, 청용은 생각했다. 내 알바는 아니라 자철 스스로 자신을 제 3자로 치부했기에. 

 

자철이 저와 같이 성용에게 같은 마음을 품지는 않으리라 청용은 생각했다. 아직까진 마냥 안심을 할 바는 아니었지만 한동안 이 세명이란 울타리 안 자신이 자철과 함께 존속되는 것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제 반에 찾아옴도 알고보면 성용과 다시 친해질 매개체는 아니었을까 청용은 자신을 찾아온 자철이 왜 왔느냐란 이유는 생각치 않고 그저 자신을 향한 호의로 착각하고 있었다. 




미도리빛 트라우마 8


공통적인 무언가가 있다면야 자석의 같은 극같은 상성인 두 사람이라도 제 대화에 혹은 만남, 교류에 불을 지피기 시작하고 오고가는 말들 속 공통분모를 발견함으로써 저도 알게 모르게 상대에 대한 호감에 대한 감정이 점유가 된다. 늘 감정은 슬그머니 조금씩 자신을 잠식시켜 간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한순간이며 감정이 자신을 잠식시켜온 속도에 비해 굉장히 더뎠을 뿐이다.

 

성용을 중심으로 청용은 자철이란 인물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자철은 보기완 다르게 조금 둔한 면도 저 못잖게 섬세한 면도 그리고 보시다시피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짙었다. 자철의 한마디에 과민 반응은 물론 한 떨기 꽃마냥 영롱하게 눈을 빛내며 자철을 주시하는 성용의 모습은 청용의 반감을 사기 충분했지만, 자철이란 사람 자체가 제가 생각했던 것 만큼 나쁜 과는 아닌 것 같다 청용은 생각했다.

 

"그러면 있잖아 성용아…."

"잠시만 청용아, 야 구자철 얘기 듣고 있냐? 구자철? 자?"

 

몇분인지 몇초인지 앞에 청용이 있음에도 언제나, 늘 자철에게 향해있는 성용의 시선과 혹은 마음까지 빼노라면 말이다.

 

 *  *  *

 

자철의 튼튼한 대인관계의 벽이 조금씩 성용이란 존재에 부셔져 잔해가 조금 남아 있을 무렵 자철은 늘 그랬듯이 깔끔한 매무새로 학교에 도착했다. 시간은 언제나 빠르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나 가을의 중순이 다가왔는지 물들어 떨어질 준비를 시작하는 붉은 단풍잎을 마주하며 자철은 제 자리에 앉았다. 푸르른 녹음이 슬슬 사라져 가고 가을의 중순이 와 시큼한 땀냄새들도 짧은 생활복들도 흰 와이셔츠로 변해가고 있었다.

 

자철은 변화에 낯설었다. 아주 옛날 자철의 잘 살던 집이 한순간에 내려 앉아 압류 딱지가 집안 곳곳히 붙여 지던 그 시절도 자철은 그 변화에 제 자신을 이겨내지 못했었다. 전 학교에서 한순간에 달라진 친구들의 태도와 홀로 남았던 제 자신에게도. 자철에게 과거란 씻을 수 없는 악몽이었고 그로 인해 생긴 변화에 대한 트라우마는 짙었다.

 

그럼에도 계절의 변화가 당연하게 다가오는 이 처럼 성용을 향한 알 수 없을 이 끌림이 전혀 낯설지 않은 점에 자철은 의아했다. 무언가, 달라짐을 느꼈으나 되려 위안을 받는 느낌에 자철은 생소했다. 성용의 옆에 가면 안정되어지는 제 자신을 성용은 알까. 자철은 이 오묘한 감정이 성용에게 들키지 않았음 좋겠다며 제 마음 속으로 바랐다.

 

"자철아, 형 왔다!"

 

부산스럽게 교실로 들어오는 성용을 보며 피식 웃은 자철이었다. 그리고 같이 온 모양인지 성용의 뒤에 뺴꼼히 나와 자철에게 손을 흔드는 청용을 보며 자철은 조금 씁쓸함을 느꼈다. 청용이 성용을 좋아하는 것이 사실인가?

남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노라 자철은 곱씹었던 제 관념이 제 마음의 벽처럼 성용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성용은 책상 위에 가방을 던져 놓곤 자철의 머리통을 휘집었다. 으레 청용에게 하듯이 거친 손놀림이었지만 그 속에는 친밀함이 담겨져 있었다. 자철은 깔끔했던 제 머리가 어지럽혀 지자 짜증이 솓구친 얼굴로 성용을 노려 보았다. 그를 본 성용은 또 미안하다며 실실 웃으며 손으로 그 머리 모양을 정리해 주었다. 그런 꼴이 뭔가 웃겨 자철은 허탈하게 피식 웃었다. 또 그게 좋은 건지 성용은 웃음을 멈추지 않고.

 

자철에게 지금까지 굳게 지켜져 왔던 관념과 제 철학들이 붕괴되는 것은 위험했다, 하지만 성용에게서 느껴지는 따듯함이 좋다 자철은 생각했다. 성용에게라면, 휘둘려도 괜찮지 않을까? 처음으로 자철은 성용에게 제 마음의 한 구석을 내어줌을 생각했다. 이 역시 놀라운 변화였지만 자철은 제가 스스로 변화했다는 사실조차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피식 웃는 자철과 성용을 뒤에서 지켜본 청용뿐. 하지만 청용은 그저 자철이 성용에게 느낀 것은 우정일 뿐이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눈 깜짝 할 사이 점심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청용은 익숙화된 성용의 교실을 향한 발걸음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교실 문을 열고 간 성용의 교실은 언제나 그렇듯 자철과 성용이 시시덕대며 있었다. 이젠 이런 일상도 익숙해졌다. 청용은 그 둘의 친함이 익숙해진 제 자신이 못미더웠지만, 어느새 자철에게 신뢰를 가진 본인이 있었다.

 

청용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이 곧 사실이라 믿는 쪽이었다. 그렇기에 자철에 대한 경각심은 잠시 끊은 지 오래였다. 자철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나니 조금 자철이 달라 보이기도 하고, 이젠 성용과 자철만이 있는 그 반의 그림 속 제 자신이 끼어들어 있을 것이라 청용은 새로운 익숙해짐을 바랐다.

 

"자철아."

"?"

 

잠시 성용이 화장실을 간 사이 청용은 낯간지러운 마음에 괜히 코를 긁적였다. 자철은 답 대신 고개를 돌려 청용과 마주했다.

 

"어, 음.. 고맙다고."

 

자철은 답 대신 의아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애써 번거롭게 입을 열어 묻는 일은 하지 않았다. 청용은 자철을 신뢰했고, 제가 성용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자철이 알 리라 착각했다. 청용이 성용을 좋아하는 것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굳이 성용에게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자철이란 것을 알 수 없었던 청용은 성용이 청용의 감정을 모르는 것마저 자철의 호의라 생각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나 성용이 좋아하는거, 성용이한테 안 말해준 거."

"뭐?"

 

자철은 벌떡 일어나 되물었다. 청용은 생각치 못한 자철의 반응에 자철을 멀뚱멀뚱 쳐다 보았다. 자철은 순간 당황해 언성을 높인 제 자신을 파악하기도 전 알면 안 됐어야 할 사실이 닥쳐옴에 순간 당황했다. 분명 저가 관련되지 않은 이 상황에 제가 흥분할 일이 아님에도. 여전히 청용을 자철을 바라보고 있자 자철은 당황함 동시에 머리를 굴렸다.

 

"어…, 그래."

 

자철은 어색해하며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성용이 들어왔다. 

자신은 왜 청용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에 반응한 것이며, 왜 순간 제 심장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는지 자철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뭔가 성용을 만나고부턴 굉장한 변화가 제 주위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자철은 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자철은 고개를 돌려 청용과 성용을 바라 보았다. 언제던 성용을 향해 있는 청용의 시야. 그제서야 이 상황이 실제임을 자각한 자철이었다.

청용은 성용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성용은? 자철은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미도리빛 트라우마 9


누구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손쉽게 스스로가 형태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복잡하게 흐트러진 퍼즐들을 제대로 쌓아 맞춘다는 것은 굉장히 더디고 어려울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다 맞추게 될 때에 몰려오는 성취감은 감정에 끼우자면 늦게나마 깨달은 마음을 주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철은 지금 흐트러진 퍼즐이 맞춰져 나가려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그 감정이 청용이 성용에게 띄는 것과 같은 류일지는 자철도 스스로 확신해 낼 수 없었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구자철."

"뭐."

"너 왜 요즘 나 피해."

 

전에는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치면은 지금엔 마주하는 것이 어려웠다. 성용이란 존재가 갑작스레 달라져 보이는 것은 어느 것을 기점으로 두자면 본의 아니게 청용의 속마음을 제 스스로 궤뚫은 그 날 부터였다. 자철의 고정관념 속 각인된 동성끼리의 애정이 청용으로 인해 부정된 순간부터 그릇됐다 생각한 모든 것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으로 거듭나면서 기존의 자철의 고정관념과 급작스레 자철에게 다가온 생각들이 엇갈려 충돌했다. 그러한 상황은 더욱이 성용을 마주하면 골이 깊어만 갔다.


"알 바야?"

"뭐?"

"원래 나 너 피했어. 니가 무식하게 말 걸고 오바싼 거잖아, 새끼야."


자철은 표현할 줄을 몰랐다. 어렵다거나 힘들다, 복잡하다라는 단어에 약했다. 그저 쉽게 한마디만 내뱉을 것을 자철의 습관된 대인관계의 벽이 늘 막았다. 구태의연하다 여길 수 있는 자철의 태도에는 그간의 얽히고 설킨 생각의 복잡함까지 섞여 성용에게로 향했다. 잔뜩 날 서린 태도에 성용 역시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다. 미간이 안 좋게 구겨진 성용의 표정을 한참이나 마주하던 자철은 역시나 미안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자철의 마음 속 단단히 세워진 벽은 자철 스스로가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타의적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진 자철의 마음이 원인이었다. 자철은 상처를 받는 것이 무서웠다.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을 내어 주었다가 잃을 경우의 큰 상실감을 자철은 맛보았었다. 


미안해.

말 한마디 못하고 자철은 제 스스로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성용을 마주했다. 차마 입 밖에서 꺼낼 수가 없었다. 성용에게, 아니 자철 스스로에게 자신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상처를 입지 않을 확신이. 성용은 아마 자철 자신에게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일지도 몰랐다. 자철은 그제서야 자신을 깨달았다.


구자철은 기성용이 귀찮은 것이 아니라 성용을 잃을까, 그 상실감을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자철은 몰려오는 퍼즐의 짜맞춰짐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자신을 당황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성용과 자신의 날 서린 어투에 은근 시선이 쏠린 반 아이들의 시선을 그제서야 자철은 눈치챘다. 자철은 벌떡 일어섰다. 그런 자철에 놀란 듯 성용이 자철을 바라 보았다. 때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자철은 그에 신경쓰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교실 밖을 나갔다.


자신을 부르는 성용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지만 뛰어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  *  *


청용은 지금 이 상황이 파악이 가지 않았다. 수업 종이 치고 늦게 들어오는 선생님 덕분에 아이들의 권유로 반 아이들이 잠시 노는 동안 문 앞에 서서 선생님이 오시는 지 일종의 망을 보는 자신을 갑작스레 나타난 자철이 제 손목을 붙잡곤 끌고 갔다. "자철아 나 수업 들어야 하는데, 자철아?" 아무리 말을 건내어도 자신은 혼잣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철은 무언가에 홀린 듯 청용의 손목을 붙잡곤 학교 뒷쪽 벤치로 끌고 갔다.


그러곤 자철이 청용을 마주했다. 자철의 눈동자가 촉촉했다. 청용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늘 강인하고 나름 굳건하다 파악한 자철의 예상치도 못한 반응을 겪게 되는 것은 청용이 생각한 범주에 들어차지 않아 있었다, 게다가 청용이 자철에게 마음의 문을 연 지 채 얼마 안 됐을 이 때에. 자철은 그러한 청용을 붙잡곤 고개를 푹 숙였다. 마주친 눈동자가 금새 사라지자 청용은 그제서야 이 일을 눈치챘다.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자철은 물기어린 목소리로 청용에게 내뱉었다.


"미안해."


청용은 답을 하지 않았다. 뭐가, 미안한거지? 자철이 자신에게 미안할 일은 없었다. 청용은 그러한 자철을 바라 보았다. 너가 뭐가 미안해. 

차마 그 말이 떼어지지 않았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을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러한 청용은 아는 것일까 자철은 그에 대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자철은 작게 흐느꼈다. 청용은 당황해 자철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으나 자철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내가 씨발놈인가봐."


청용은 역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철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종적을 감추려던 불안한 예감이 다시 급습하는 것 같았지만, 청용은 이미 자철을 제게 있어서 소중한 범위에 넣었다. 아직은 자철에 대한 막 쌓기 시작한 신뢰를 접을 수가 없었다. 자철의 흐느낌은 그런 청용의 따스한 손길에 더 깊어져 갔다. 자철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그 퍼즐이 채 다 맞춰지진 않았지만, 자철은 자신이 부정하려고 하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조금은 깨닫게 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청용은 그를 아직 몰랐다. 청용은 자철만은 성용에게 저와 같은 마음을 품지 않으리라 믿어야만 했기에 그에 대한 생각을 채 담지도 않았다. 성용에게로 뻗어지는 제 손길을 전하는 데에만 치중해야 하는 청용의 머릿속엔 자철의 죄책감의 원인까지 파악할 생각이 차지할 공간이 없었다.


#


자철과 청용 사이는 그 이후로 조금은 돈독해졌다. 하지만 자철은 제 스스로가 청용을 대하는데 있어서 늘 무언가가 자신을 옥죄는 듯한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자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성용이었다. 자철이 모진 말을 내뱉었던 그 날이 언제였다는 듯 성용이 자철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성용도 조금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자철의 태도에 조금의 공간을 자신에게 허락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젖어 한동안 누구보다 행복해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다시 자철은 자신에게 독하게 굴었다. 눈을 치켜뜨곤 날카로운 말을 내뱉어 내는데 문제는 자철의 눈동자였다. 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눈이 빨개져선 곧 울 것 같은 말을 내뱉는데 성용이 자철에게서 뒷걸음질을 칠 수가 전혀 없었다. 그저 성용은 다시 빼앗긴 자철의 마음 속 조그만한 공간을 쟁취해야 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성용은 그냥 자철이 자신을 향해 한번쯔음은 편하고 환하게 웃어 주었음 하는 바람이었다.


"구자철."

"꺼져."


"밥 먹으러 가자." "안 가." 

자철의 단칼에 거절한 반응에 성용은 자철 옆 의자를 빼내 앉았다.


"청용이 오늘 아파서 학교 못 왔는데 그럼 나 누구랑 먹어."

"니 친구 많잖아."


자철을 따라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 태도에 자철은 고개를 슬쩍 돌려 성용을 마주했다. 


"너 밥 안 먹으러 가면 나도 안 먹어."

"…."


자철이 결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교실 뒷문쪽으로 걸어갔다. 성용은 또 점심 시간에 축구를 하러 운동장에 나갈 것이 뻔했다. 그러한 성용이 밥을 안 먹는다는 것이 조금 자철의 마음께에 걸렸다. 성용을 제 마음에 염두하지 않겠다 굳게 다짐을 했던 자철이었지만, 결국은 자철은 쉽게 성용에게 굴복당했다. 


교실 뒷문으로 간 자철이 성용을 바라 보았다. 성용도 그제서야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띄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자철에게로 걸어 갔다.


"결국은 이럴 거잖아."

"조용히 해."

"니도 나 친구로 생각하잖아."

"…."


친구. 자철은 성용을 바라 보았다. 언제 키가 큰 건지 조금 비슷했던 것 같은데 살짝 위로 올라봐야 하는 성용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자철은 이제 거의 제 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냥 억누를 뿐이었다. 성용을 위해, 청용을 위해. 표면적으로는 제 주위를 위한 타의적인 배려였지만 속내는 자철을 위해서였다.


"넌 단순하게 살 수 있어서 존나 좋겠다."

"?"


의문에 가득 찬 성용의 얼굴을 뒤로 하고 자철은 앞을 바라 보았다. 성용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를 않은 자철이었다. 그냥, 성용이 더는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철은 오해할 것 같았다. 오해라고 할 것이 없는데도.


#


자철은 한때 못 누리는 것들은 적는 것이 더 힘들었던 흔히들 잘 사는 집안의 외아들이었다. 금이야 옥이야 곱게 자란 자철이 순식간에 몰락으로 떨어진 것은 흔히들 말하는 자철의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을 적이었다. 한창 제가 잘난 줄 알곤 주윗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대하던 자철은 순식간에 달라진 제 주위 환경과 저에게로 닥쳐오는 수많은 수군거림들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자철은 누구보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그저 구자철일 뿐이었다.


주윗 사람들의 그런 수군거림과 달라진 태도들이 싫어 자철은 더욱이 어려워진 집안 형편을 제 속으로 꽁꽁 싸매고 다녔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이야기들은 헛소문이라는 둥 제 아버지의 부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면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굉장히 어려운 집안 형편임에도 원래 있던 물건을 팔아 새 물건을 사곤 자랑스레 하고 다녔었다.


처음엔 그저 사람들이 저를 불쌍한 아이로 취급하는 것이 두려워 시작했지만, 자철은 이제 이런 누리는 삶이 위태롭단 위기의식이 들자마자 흔히들 말하는 있는 척, 주윗 사람들에게 소홀해지며 날이 선 성격으로 변하게 됐다. 그러한 자철 스스로의 변화에 자철의 주위에 자철이란 인물에 질려가고 있던 즈음 자철 아버지의 사업 속 비리들이 뉴스를 타면서 그간 자철이 해 온 시치미들이 거짓말로 발견되며 자철의 주윗 사람들은 모두 자철에게서 등을 돌렸다.


평생을 사랑할 것 마냥 운운하던 여자친구도 갑작스레 이별을 당하고, 학교 전체에게서 이유 없는 따돌림과 무의식적인 밀침이 점점 독해져만 갔다. 자철이 초래한 일이었기에 자철은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집에서는 또 아무렇지 않은 것 마냥 자철은 그 모든 것들은 꾸역 꾸역 참아냈다.


자철이 학교로 가 수업을 들으려던 찰나 자신과 절친했었던 한 아이가 화장실에서 학생들이 본 대소변을 모아 자철의 머리 위로 부었고, 그 모습에 반 아이들은 경악과 걱정 어린 시선은 커녕 모두 호탕하다는 듯 배를 잡고 웃었다. 그 중엔 자철과 친하게 지냈던 무리도, 자철과 사귀었던 여자 아이들도 속해 있었다.


존나 더럽네 저 새끼.


아직도 자철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웃어재끼는 소리들이 자철에게 생각했다. 자철은 그날 처음으로 실컷 눈물을 맛보았었다. 내가 왜 더러워, 난 그냥 집 망한 것 갖고 수군대는 것이 싫었을 뿐인데. 자철의 이유모를 본인에 대한 결벽증은 그때부터 비롯됐다.


자철이 주윗 사람들에게 모질고 독하게 하대했던 태도들이 모두 합쳐져 자철에게 되돌려 오는 것 뿐이었다. 자철의 머리 위로 쏟아진 것들은 자철의 버려진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철은 중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비슷한 동네였기에 자철의 중학교에서의 그 마지막 날은 고등학교에서도 따라왔다. 그러한 괴롭힘과 따돌림에 자철은 성용과 청용이 있는 학교로 전학을 왔다.


그게 자철의 이야기였다.


#


청용이 감기로 한참을 앓고 다시 학교로 찾아와 처음 단둘이 만난 인물은 다름 아닌 자철이었다. 성용의 교실에 들어와 엎드려 자고 있는 자철과 그런 자철에게 말을 거는 성용을 발견하곤 청용은 잠시 또 마음이 씁쓸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청용을 반갑게 마주하는 성용에 다시 그 씁쓸함을 설레임으로 채움에 청용은 진심으로 입가에 호선을 띄우며 웃었다.


"너 없는 동안 존나 심심해 뒤지는 줄 알았어. 구자철은 나 상대도 안 해주고."

"자철이가? 너가 또 귀찮게 한 거 아니야?"

"아냐 내가 그럴 인물이냐, 아픈 건 이제 괜찮고?"

"어, 이젠 괜찮아."

"아프지 좀 마라, 걱정하잖아 내가." 성용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에 청용은 잠시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성용이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내뱉을 때마다 청용의 마음은 하루에 몇십번 멈출 위기에 도달하는지 성용은 알까, 절대 모를 성용임을 알기에 청용은 그를 의문에 두고 있었다. 청용은 늘상 그렇듯이 성용이 제 마음을 알면 성용의 달라질 수도 있는 태도를 두려워 했다.


성용은 청용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 듬었다. 청용은 머리가 망가진다며 툴툴 대면서도 그런 성용의 손길이 좋은 듯 실실 웃었다. 성용이 아프지 마라며 걱정 어린 말을 건네는 그 수많은 잔소리에 자철도 잠이 깨어 부스스하게 일어나 청용을 마주했다. 어, 짧게 내뱉는 감탄사에 많은 말들이 포함돼 있는 것을 아는 청용이 따스하게 웃었다.


"너네 나 빼고 존나 친해졌다? 와, 배신감."


청용이 그런 성용보고 질투는 왜 하냐며 실실 웃었다. 자철이 고개를 들고 청용과 성용을 바라 보았다. 잘 어울린다, 분명 몇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철 자신은 동성간에 그런 사이가 허용된다는 것을 가치관적으로 부정했지만 청용의 마음을 깨닫고 나서는….


자철은 제 생각을 아꼈다. 성용은 그런 자철을 바라 봤다. 뭘 멍하니 보고 있어- 성용은 말하려던 것을 삼켰다. 수업 예비 종이 울렸다. 청용은 급하게 자리를 떴다. 


"야, 구자철."

"…."

"엎드려도 돼, 얘기만 들어."


자철은 성용의 말을 듣고 정자세로 있던 자세를 엎드렸다 성용은 그런 자철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자철은 눈을 감았다. 주위 아이들의 시선이 흘깃 흘깃 자철과 성용에게로 향해 있는 것 즈음은 자철도 느낄 수 있었다. 성용은, 주위 아이들의 시선이 어떻던, 수군거리던 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철이 성용에게 가지는 것은 어쩌면 동경일지도 몰랐다. 옛날에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에 겁나 거짓말을 하다 봉변을 당한 저와는 달리 성용은 당당했다. 그런 당당함에 동경을 가진 것일지도 몰랐다.


"너가 날 왜 밀어내는 지 솔직히 말하자면 모르겠다."

"…."

"그냥 난 너랑 친구 먹고 싶고, 나 안 밀어냈음 좋겠다 싶어."


아 존나 오글거려. 성용의 중얼거리는 말의 자철의 귀에 꽂혔다. 자철은 조심스레 고개를 다시 들어 성용을 마주했다. 나도 너 안 밀어냈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이 자철의 목 끝까지 올라 찼는데 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성용에게 꽤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이 감정이 동경일 것이란 것은 너무나도 자신의 바람밖에 되지 못할 것을 자철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철은 성용에게 모질 수 밖에 없었다.


"왜 나한테 그렇게 안달복달인데."

"뭐?"
"나 친구 없이 다니는 게 존나 불쌍하디?"
"야. 구자철, 너 지금 존…."

"멀쩡한 놈이라면 욕 쳐듣고도 친구하고 싶은 애새낀 없거든? 존나 내가 불쌍해서 손이라도 내밀고 싶어? 성인군자 납셨다, 아주."

자철은 신경질 적으로 말을 내뱉곤 성용에게 눈을 치켜 세우곤 노려 보았다. 성용은 그러한 자철을 당황스레 보고 있었다. 자철의 눈시울은 또 언제 울 지도 모르게 붉었다. 성용은 순간 치밀었던 화가 그런 눈에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난 그냥…."

"그냥 뭐? 씨부릴 거 또 있어?"

"…."


성용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고보니 자신이 왜 이렇게 구자철에게 목을 매냐는 질문이 순간 성용의 머릿속에서 감돌았다. 성용에게도 주어진 퍼즐이 있음을 성용은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성용이 자철에게 있어서 불쌍하다는 마음을 가진 적은 단 한차례도 없음은 떳떳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왜?


자철이 솓구친 화를 채 풀지 못해 고개를 푹 숙였다. 선생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렷, 경례- 소리에 맞춰 성용은 몸에 베인 인사를 자동적으로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성용은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행동이 너무 이상했다, 자철에게 유독.

그런데 더 성용의 정신을 가만히 냅두지 않는 것은 방금도 자신에게 모질게 말을 내뱉은 자철에게 자신의 존재가 각인됐으면 좋겠단 바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성용에게 주어진 맞춰야 할 몫의 퍼즐이 성용이기에 더욱이 짜맞추기가 더디면서도 어렵단 것과 일맥상통했다. 제 마음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에 봐도 훤한 것임에도 본인이 깨닫는 것은 달랐다.


성용은, 자철을 향한 제 마음을 스스로가 고찰해 보기 시작했다.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성용은 그러함을 은연중에 확신했다.




미도리빛 트라우마 10


사람의 관계는 무엇이던 순식간이다. 어떤 형태이던, 언젠가는 끝이란 게 존재하는 법이며 그것이 다가오는 형태는 관계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각양각색이었다. 구자철의 과거 속 자철의 집안의 순식간에 길거리에 내몰렸듯이 자철은 그의 주위 인물들과도 순식간에 틀어졌다. 청용에겐 비 내리는 날이 트라우마이듯 자철에겐 하나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러하기에 자철은 성용이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감정마저 변색될 것임에 확신했다. 사람은 간사하다, 구자철의 감정이었다. 무엇을 연모해 뜨겁게 불타오르던 애정의 감정도 순식간에 식고 만다. 자철이 누군가에게 갖는 믿음이란 오래 전 흔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밖의 비 때문인지 교실의 공기는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청용은 이 츱츱한 분위기에 급하게 조퇴, 자철과 성용은 냉전 중. 성용은 엎드려 잠을 취했던 등을 꼿꼿이 펴 제 옆에 누워 곤히 잠을 자는 자철을 주시했다. 


새근 거리는 자철의 머리를 습관적으로 쓰다듬으려 손을 내밀었던 성용은 이내 곧 걷어 제 품으로 넣었다. 성용은 제 머리를 짜증스레 털었다. 무언가 제 속을 옥죄는 느낌이었다. 구자철이 어느새 나에게 이런 비중이었나, 성용은 새삼 실감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다시 걷은 손을 자철에게로 내빼 자철을 쓰다듬고 싶었다. 바로 옆에 있는데 정작 둘의 거리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창문을 성용은 바라 보았다.
한창 미도리빛으로 물들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성용은 다시 자철을 바라 보았다.
알 수 없고도 생소한 이 감정이 조금씩 형태를 잡아가는 것 같았다, 자철은 확실히 달랐다. 성용은 청용의 옆에 한동안 있어서 그런가 이놈의 비가 제 머리도 어지럽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청용을 만나야 겠다, 만나서 지금 구자철에게 드는 이 생각을 이야기할 참이었다. 성용은 청용의 도움을 요구했다, 그것이 어떠한 영향을 끼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  *  *

 

"너가 날 왜 밀어내는 지 솔직히 말하자면 모르겠다."

"…."

"그냥 난 너랑 친구 먹고 싶고, 나 안 밀어냈음 좋겠다 싶어."


아 존나 오글거려. 성용의 중얼거리는 말의 자철의 귀에 꽂혔다. 자철은 조심스레 고개를 다시 들어 성용을 마주했다. 나도 너 안 밀어냈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이 자철의 목 끝까지 올라 찼는데 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성용에게 꽤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이 감정이 동경일 것이란 것은 너무나도 자신의 바람밖에 되지 못할 것을 자철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철은 성용에게 모질 수 밖에 없었다.


"왜 나한테 그렇게 안달복달인데."

"뭐?"
"나 친구 없이 다니는 게 존나 불쌍하디?"
"야. 구자철, 너 지금 존…."

"멀쩡한 놈이라면 욕 쳐듣고도 친구하고 싶은 애새낀 없거든? 존나 내가 불쌍해서 손이라도 내밀고 싶어? 성인군자 납셨다, 아주."

자철은 신경질 적으로 말을 내뱉곤 성용에게 눈을 치켜 세우곤 노려 보았다. 성용은 그러한 자철을 당황스레 보고 있었다. 자철의 눈시울은 또 언제 울 지도 모르게 붉었다. 성용은 순간 치밀었던 화가 그런 눈에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난 그냥…."

"그냥 뭐? 씨부릴 거 또 있어?"

"…."


성용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고보니 자신이 왜 이렇게 구자철에게 목을 매냐는 질문이 순간 성용의 머릿속에서 감돌았다. 성용에게도 주어진 퍼즐이 있음을 성용은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성용이 자철에게 있어서 불쌍하다는 마음을 가진 적은 단 한차례도 없음은 떳떳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왜?


자철이 솓구친 화를 채 풀지 못해 고개를 푹 숙였다. 선생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렷, 경례- 소리에 맞춰 성용은 몸에 베인 인사를 자동적으로 했다. 

 

… … ….

성용은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 나홀로 걸어가는 자철의 뒤를 재빨리 밟았다, 청용은 정호와 학교 조 모임이 있었다. 구자철의 홀로 걷는 뒷모습을 성용은 뒤에서 바라 보았다. 그렇게 매서운 말을 내뱉으면서도 끊임없이 흔들렸던, 마치 자신을 잡아달라 외치는 것 같았던 자철의 눈동자가. 계속 마음에 밟혔다. 그렇게 자철을 뒤쫓는 성용을 자철도 눈치챈 모양인지 뒤를 돌아 성용을 바라봤다. 자철의 눈동자가 잠시 일렁였다 가라앉았다. 그래 저것이다, 성용은 저 일렁거리는 눈동자가 자꾸 제 마음을 찌른다고 생각했다. 자철의 눈동자가 가라앉고, 그 둘의 적막을 깨는 것은 자철의 깊은 한숨이었다.

 

"니 새끼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내 인생 신경 끄고."

 

성용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철은 그를 순식간에 알아챘다. 기성용은 본디 다혈질적인 인물이다, 지금껏 그것이 자철에겐 나오지 않았던 모습이라 하더래도 사람은 분위기에 휩쓸리기 마련이었다. 낮부터 혹은 며칠 전부터 이어져 온 자철의 냉전에 성용은 곯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자철은 그를 잘 파악해냈다. 기성용의 촉이란 것은 지금 한창 날카로워져 있다. 구자철이 그것을 건드리면 순식간에 터질 터였다.


자철은 말을 이으려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철은 지금 성용에게 모질게 구는 자신의 가슴이 아프게 저려오는 이유는 이 모든 게 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서 그렇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 이유가 성용과 관련됐다 인정하는 순간 자철은 이 모든 것을 돌이킬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성용이 제 멱살을 쥐고 세게 주먹이라도 날리며 끝이라고 악담을 퍼부었으면 좋겠다고 자철은 생각했다. 그러면 모진 말을 뱉으면서도 도려내는 듯한 제 가슴이 이렇게까지 시리지는 않을텐데.


"…그래, 새끼야."

 

자철의 감겨졌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자철의 눈에 비친 성용은 바닥을 쓸쓸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난폭하게 구겨졌던 성용의 미간은 풀어지고, 세게 쥐어졌던 성용의 손은 펴져있었다. 자철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분명 성용이 자신을 포기하길 간절히 바랐던 자신인데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말도 안 될 모순이었다. 자철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성용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자철을 따라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자철은 그런 성용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당장에라도 발걸음을 떼어 성용에게 다가가고 싶단 마음이 잠시 자철의 마음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자철은 고개를 도리 저었다. 이청용이 자철의 뇌리 속을 스쳐지나갔으며 자철을 향해 덮여졌던 과거의 치욕이 밀려 나왔다. 기성용도, 결국엔 구자철을 떠날 인물이었다. 그 시기가 조금 빨랐을 뿐.

잠시 뿐이지만 성용한테 정을 줬던 것일까.

자철의 가슴이 아렸다, 성용 때문인 것 같았다. 아, 기성용 때문이면 안 되는데…. 나 울면 안 되는데…. 자철은 읊조리면서 제 집으로 걸어갔다. 괜히 자철의 눈에 뭔가가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자철의 눈에 눈물이 조금씩 흐르는 이유는 없었다.

 

*

 

"성용아."

"…."

"기성용? 야, 성용아."

"어, 어?"

 

청용의 여러 부름에도 답 않고 허공만 바라보던 성용이 청용의 손이 닿자마자 제 정신이 돌아온 듯 탁해졌던 눈동자도 다시 돌아와 청용을 마주했다. 청용은 성용의 눈동자를 바라 보았다. 성용의 눈동자 속 비쳐지는 청용의 모습이 청용의 눈에 들어왔다. 청용이 보여지는 성용의 눈동자에 담겨진 것은 분명히 청용이었지만, 성용에게서의 성용의 시선은 청용이 아닌 다른 인물을 담아 내는 것이 뻔했다. 청용은 그것을 모를만큼 아둔한 인물이 아니었다, 더욱이 기성용에 관해서라면 촉을 날카로이 지세우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할 줄 알았다. 확실하게, 더딘 성용에게서 무슨 변화가 존재하려 들고 있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오늘따라 왜 이리 정신이 없어."

"…아무것도 아냐. 별 일은 무슨."

 

청용이 입술을 지그시 이빨로 짓누르곤 똑바로 청용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성용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성용은 고민을 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술을 축이곤 청용을 마주했다. 청용의 촉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청용의 촉은 예견하고 있었다.

 

"나."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봐."

"구자철이, …아니다."

"…?"

 

청용은 심부름을 하던 와중 성용의 전화를 받고 급히 발길을 튼 터라 심부름을 본 것들이 잔뜩 담겨져 있는 검정 비닐 봉지를 애써 꽉 쥐었다. 자신을 바라 보지만 흔들리는 성용의 눈동자 속 그려지는 청용의 모습도 위태로이 흔들려 지고 있었다. 성용이 얘기하는 것을 멈추곤 청용을 바라 보았다.

 

"너, 누구 좋아해 본 적 있냐."

 

청용의 눈동자가 급작스레 커졌다. 

청용의 촉은 틀린 적이 없었다, 청용은 머리를 굴려가기 시작했다.

남의 감정에 둔해 제 마음도 모르는 기성용이 남에게 사랑의 감정을 묻고 있었다, 청용은 눈동자를 질끈 내려감고는 떴다. 기성용은 제 자신에게 구자철을 언급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를 좋아했느냔 질문을 하고 있다. 청용은 예견하고 있던 사실을 하나 하나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게 좋아하는 게 맞다면."

"…어."

"나 좋아하는 사람 생긴 것 같다."

 

청용의 얼굴이 급작스레 경직되어져 갔다. 겨우 입꼬리를 올리곤 그렇냐며 물으려는 청용이었지만 그게 생각한 대로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너한테만은 얘기하고 싶어서."

 

성용이 황급히 붙여말하는 말에 청용은 손에 쥔 비닐봉지를 떨어트렸다. 이 병신같은 새끼, 왜 나한테만…. 성용은 나름 청용에게 우정의 의미로 덧붙인 말이겠지만 그 한마디는 더욱이 청용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남을 좋아한다는 것을 말하고 고민할 사이, 성용에게 청용은 딱 그랬다. 혹여나 일절의 호감이 있는 사람을 붙잡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언급할 인물이 아니었다, 성용은.

 

미친듯이 돌아가던 청용의 머리가 갑자기 멈추어 가며 한 인물을 그려내었다.

유독 성용이 친절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던 그 아이. 

굳어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청용은 축였다. 바르르 떨리는 청용의 입술이 안쓰러웠다. 청용은 눈을 감았다. 성용에게서, 현실에게서.

 

"…구자철…, 이야?"

 

청용은 눈을 떠 성용을 바라보았다. 성용은 답을 하지 않았지만 잔뜩 커진 성용의 동공과 답 없는 성용의 무언이 대신 그러하다 답을 해 주었다. 청용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진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청용의 촉은 틀린 적이 없었다, 청용은 굴리던 머리를 멈추었고 예견해나가던 모든 것들이 일시정지됐다. 성용이 부랴부랴 청용에게 무언가 말을 거는 것 같았지만 청용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손을 뻗어 청용의 정신을 붙잡으려는 성용의 팔을 청용은 난생 처음 뿌리치곤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지금 성용을 다시 한번 제대로 본다면 겨우 붙잡고 쥐고 있는 이 이성의 끈을 놓칠 것만 같았다. 청용은 삐꺽이는 인형마냥 잘 안 움직여지는 제 몸통을 겨우 돌렸다. 뒤에서 성용이 따라올까 싶어 청용은 미친듯이 뛰었다. 지금 당장은 성용과 되도록 멀리, 더 멀리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청용의 꾹꾹 눌러 담고 꾹꾹 인내했던 마음이 한정선을 넘어가도 겨우 유지됐던 그 마음이 성용의 한마디로 바늘에 눌러져 터진 격이었다. 

 

*

 

 미친듯이 비가 쏟아졌다. 무언가를 씻겨내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우악스럽게 쏟아지는 비들을 밖에 두고 청용은 제 집에서 틀어박혀 이불로 제 몸을 꽁꽁 싸맸다. 가리고 싶었다. 부끄러웠다. 비참했다. 시끄러운 벨소리들로 울려 청용의 귓가를 난잡하게 어지럽히는 전화 소리들에 휴대폰과 배터리를 분리시켰다. 전화벨소리와 함께 적혔던 기성용, 이름 석자가 청용의 마음을 후벼팠다. 이불을 다시 꽁꽁 싸맸다. 온통 어두운 청용의 이불 속이 청용의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청용은 생각했다. 창문을 시끄럽게 두들기는 비들이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눈을 질끔 감았다. 기성용, 기성용. 

….

성용을 미워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디부터가 꼬인 것일까. 

이불로 꽁꽁 싸매 잠시나마 세상과 단절했던 청용은 눈을 감아도 보여지는 성용의 환한 얼굴에 숨이 턱 막혔다. 감겼던 눈이 떠지고 급하게 이불을 내팽겨쳐 일어났다.

비가 두들기는 창문 밖 커텐을 신경질적으로 치곤 청용은 다시 침대 위로 돌아왔다.

어디서 부터 꼬였을까, 청용은 자신이 스스로 그저 성용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했었던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 나 따위가 용기를 내어서, 이렇게 비참해지는 것일까.


성용에게서 급하게 전화가 왔던 휴대폰을 청용은 기억해냈다. 급하게 휴대폰을 던진 곳으로 달려가 배터리를 꽂고는 휴대폰을 켰다. 성용이 혹시 전화를 안 받은 내게 화가 났을까, 날 피하면 어쩌지….

그렇게 생각을 하던 청용은 급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기성용에 얽매여 있다, 아직도.


청용은 이를 악 물었다. 다시 휴대폰을 움직여 켰다. 부재중 전화 13통.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성용의 전화 목록을 확인했다. 그러던 와중에 온 문자 한 통.

[전화해.]

성용답게 상당히 간결했다. 청용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에 가져다 대었다.


모든것은 자철이었다. 청용에게 닥친 비참함들을 청용은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이 책임을 물어야만 했다. 기성용이 좋아하는 것은 구자철이었고, 자신이 욕심을 내기 시작한 계기도 자철이었다. 자철이 성용에게서 받는 관심들이 부러웠고, 탐났다. 자철이 모든 원인이란 생각이 미치자마자 청용은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고.

자철만 없으면, 구자철만 없으면 모든 사연들은 없었다는 양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청용은 생각했다. 성용이 청용을 좋아하는 것까지는 원치 않았으나, 성용은 오롯 자신과 함께해야만 했다. 내가 성용을 좋아하는 한, 성용은 누군가를 좋아하면 안 된다.

청용의 마음은 그렇게 점점 비들이 잔뜩 내려 눅눅해진 미도리빛으로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절 기다려주신 분이 있으련지 모르겠지만..ㅠㅠ 인스티즈 정지 풀렸습니다^ㅇ^! 오랜만이에요 

중학교 생활도 잘 적응해나가는 중에 그동안 썼던 것들 옮겨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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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 세상에 각계님 세상에 지져스 크라이스트 이게 얼마나 오랜만이에요ㅠㅠㅠㅠㅠㅠㅠ궤변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육개월만이네요 내사랑ㅠㅠㅠㅠㅠㅠㅠㅠ작년에 익스에 각계님 대란 일어났을때 내 작가님이라며 자랑하던 게 엊그제같은데ㅠㅠㅠㅠㅠㅠㅠ중학교 생활은 잘 하신건가요? 이제 중학생이시네요! 저 처음에 중학교 입학했을 적에는 적응못하고 그랬었어요ㅋㅋ교복도 낯설구..☆ 못본만큼 그새 더 각계님의 글실력은 는 것 같아요 정말 작가님의 미래는 밝다.. 제가 반휘혈을 만들고 있었을 시기인데.. 그나저나 그동안 미도리빛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자철이의 사연도 알게됐고, 청용이가 이제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건가요..? 성용이도 제 마음을 알아챘고!ㅠㅠ이 삼각관계가 이제 제대로 빛을 발할 것 같아서 기대가 매우 돼요 다시봐서 반가워요 각계님!
11년 전
독자2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헐 겁나 오랜만..!ㅜㅜㅠㅠㅜㅠㅠㅜㅠㅜㅠ
11년 전
독자3
헐 각계님 저 나중에 읽으러 올게요 일단 선댓 글고 저 냉면이에요!
11년 전
독자4
헐 각계님.................!!!!!!!!!!!!!!!!!!!!!!!!!!!!!!!!!!! ㅠㅠ
11년 전
독자5
헐 각계늼 아 헐 각계님 헐
11년 전
독자6
이게 얼마만이에요!!!!!!!!!!!!!!!!!!!!! 엄청 옛날에 익스에서 보고 왔었는데 그게 벌써 7개월이 지났네요..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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