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뢰, 믿음 - 정택운
나아지지 않는다. 좀처럼 진전이 없다. 희망이라는게 있는걸까? 왜 항상 나에게만.
유소년 축구대표였다. 하지만 부상을 당하고 그 꿈을 접어버렸다.
그러다 다시 꾼 꿈이, 이루어나가고 있는 꿈이 다시금 색종이처럼 접혀지고있는것 같다.
미세한 움직임 조차 느껴지지않는 오른쪽 손을, 다리를 바라보면 어쩌면 평생 이렇게 반불구자로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던 중에 학연이에게 심한말을 해버렸다. 누구보다 나를 믿고 의지해주며, 때론 이끌기까지 하던 학연이에게 화를냈다.
내마음대로 되지않는 야속한 몸에 몸도 마음도 지쳐있을때즈음에 해버린 말, 그대로 뛰쳐나간 학연이는 상혁이와 함께 병원을 나가버렸다.
유난히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학연이에게 내색은 안했지만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내 몸상태를 알아챈 후로는 제대로 잠을 잔적이없다.
잠을 자면 꿈을꾸고 꿈속엔 늘 그날의 일이 회상되곤 해버려서, 어느새 잠에 드는게 두려워졌다.
새벽에 한참을 뒤척였을까,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몸을 일으켜세웠다.
"..누구?"
"저에요, 형."
검은 봉지를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인영은 상혁이었다.
아까 학연이가 데리고 가버려서 얼굴도 못봤는데, 굳이 찾아온 모양이다.
"왜왔어 피곤한데"
"제가 피곤해봤자 형이나 학연이형보다 피곤하겠어요?"
상혁이의 입에서 나오는 학연이의 이름에 살짝 움찔하자 상혁이가 한숨을 쉬며 봉지를 내려놓고말한다.
"힘들죠?"
"..아니야, 괜찮아"
"형, 형은 학연이형이랑 안닮은듯 닮은거 알아요?"
"무슨 소리야?"
"얼굴생김새는 어느하나 닮은 구석이없는데, 뭐만 하면 괜찮다 말하는거. 제일 미운구석이 닮았어요, 둘이."
상혁이의 말에 그냥 웃어보이자 검은 봉지에서 바나나 우유 하나를 꺼내서 준다.
보통 이럴때 사오는건 가볍게 맥주정도 아니려나 싶었는데 뭔가 한상혁 다운 발상에 웃으며 바나나 우유를 받아들었다.
"고마워"
"그거 제가 산거 아니에요."
빨대를 꽂으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이어서 말한다.
"학연이 형이 주라고 한거에요"
"아.."
"솔직히 전 지금 어느 누구의 손도 들어줄수가없어요, 형 마음도 다 헤아릴수없고 학연이형 마음도 다 헤아릴수가 없으니까."
침대끝에 걸터앉아 조용히 말하는 상혁이의 말을 경청했다. 나보다 다섯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이런 소릴 들어버린건 엄연한 내 잘못이니까.
"후회하죠?"
"..."
"당연히 후회할거라 생각해요. 근데 저한테도 다른형들한테도 학연이 형이나 형, 둘다 너무 소중해요. 놓을거란 생각도 안했지만 놓치고싶지도 않아요."
"..미안하다."
"미안하단 소리 들으려고 하는말 아니에요. 그냥 단지.. 조금만 더 힘을 내줬으면 좋겠어요.
주위를 둘러보면 형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걸 알게 될거에요. 믿는 만큼, 믿음을 받았으면 좋겠다구요."
상혁이가 언제 이만큼씩이나 자라버린걸까,
처음 만났을땐 그저 나보다 5살씩이나 어린 애기같은 동생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상혁이한테 5살이나 더 먹어놓고선 위로를 받고있다.
이게 과연 맞는 걸까. 이렇게 위로 받을 자격이나 있을까?
"상혁아, 나는 모르겠다. 형은 이미 한번 꿈이 꺾여버린적이 있어, 어쩌면 그래서 더 무서운걸지도 몰라.
자연스럽게 오른손으로 무슨일을 하려고하면 움직이지 않고, 오른발을 떼려고하면 넘어져 버려.
사람 몸이 제 의지대로 안 움직인다는게 이렇게나 무서운건지 몰랐다. 그런데 말이야,"
나를 가만히 쳐다보며 경청해주는 상혁이에게 이어서 말했다.
"더 무서운건 잊혀진다는 거였어. 나때문에 우리가 활동을 계속 못하고 있으면 언젠간 잊혀져 버릴거라 생각해.
그래서 나 없이 너네라도 활동하는게 어떻겠느냐고 학연이에게 말했더니 화를 내더라, 그때 순간 깨달았지.
아, 내가 지금 무슨소리를 한거지. 잔뜩 화가난 표정을 짓는 학연이를 볼수도없었고, 내 자신한테도 너무 화가났어.
지금 하는 말도 다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그러다 보니까 못할 말도 해버렸던것 같아."
평소와 다르게 말을 길게 해서 그런지 골이 울리는 기분이다.
이렇게 길게 말하는데도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않고 들어주는 상혁이에겐 너무 고맙고도 미안했다.
"고마워요, 형 답지 않게 기나긴 변명이라도 해줘서. 이틀 뒤부턴 숙소로 돌아와요. 거기서 재활해도 괜찮잖아요 그쵸?"
웃으며 돌아오라는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과연 할수 있을까?
"왜 대답이 없어요, 그럼 그런줄 알고 저는 갑니다. 이틀 뒤에 형 숙소에 오면 그때봐요! 안녕!!"
아ㅡ 대답을 할틈도없이 병실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검은 봉지도 그대로 침대에 올려 놓은 채, 벙찐 채로 아직도 묵직해 보이는 봉지를 열어 그안을 살펴보자 바나나 우유 2개와 쪽지 하나가 나온다.
그 쪽지를 보곤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뚱바랑 같이 돌아와 정택운
ps. 다마시지 말고 같이 와야해!
모든게 그대로 였다. 다만 내가 조금 변했을 뿐.
이 변화를 멈추고 모든걸 되돌려 놓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오늘은 왠지 잠이 잘 올것만 같다.
ㅡ내 삶에 단 한번, 기도했던 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