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Jerry
6. 열애설 당장 발을 옮겨 희연한테로 향했다. 맨 뒷자리에 예쁜 외모를 소유하여 남자아이들에게 인기도 많은 아이가 왜! 왜! 그 커뮤니티에 가입한거지? 아, 이해안가. 멘붕의 상태에 이르러 걸음은 더 빨라지고 희연의 자리에 딱 서자마자 책 정리를 하고 있던 희연을 불렀다.
" 야, 정희연 " " 어? "
책 다섯권을 책상 서랍에 밀어넣고, 고개를 들어 대답을 하는 모습이 예쁘다. 그래, 인정하긴 싫지만, 아무리 내가 게이라지만 정말 예쁘긴 예쁘다. 잠깐 생각하던 도중, 책을 마저 정리하던 희연이 말할거면 빨리 말해, 하며 보챈다. 그렇지만, 너무 공개된 공간에서 '야, 너 내가 게인거 어떻게 알았어!' 이럴 수도 없고. 아니면, 너 왜 게이 커뮤니티에 니가 있어! 하고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그렇다면 분명히 둘 다에게 피해가 갈것이므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참 고민을 이어가다가, 결국 희연의 손목을 부여잡고 벌떡 일으켜 교실 밖으로 나섰다. 아, 좀 박력있었어.
" 뭐야, 왜 이러는데 " " 너 사실대로 말해, 너 8454 12XX 맞지 " " 그게, 왜? "
너 도대체 내가 게이란걸 어떻게 안 거야? 그제야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직설적인 질문에 희연이 당황한 듯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지만, 말 없이 계속 밀어붙였다. 왜 그랬어? 누구한테 말 했어? 추궁하자 희연이 끝내 고개를 저었다.
" 아무한테도 안 말했어 " " 그럼 왜 그런거야? 내가 게이인게 재밌어? "
다 알았었던 거지? 하긴, 그 커뮤니티 닉네임이 김성규인데 모를리가 있어? 성규는 답답한 가슴을 팡팡 쳐내리며 마구 쏟아 부었다. 희연이 큰 눈을 굴리며 화를 잠재우기 위해 위로되는 말들을 꺼내었다. 말하는 것들을 보니 정말 계속 문자하던 사람이 맞긴 맞나보네, 어휴.
" 내가 너 좋아해서 그랬어. " " ………뭐? " " 내가 너 계속 좋아했는데, 재미로 본 게이 커뮤니티에 너가 있더라고. 그래서 그냥, 어떻게든 너 위로 해주고, 뭐 그러고 싶어서 그런거야, 나쁜 뜻 없어 " " 내가 게이인걸 아는데도 나 좋아한다고? " " 그걸 어떻게 해, 뭘. 사람 마음이 맘대로 돼? "
두 손을 어쩔 수 없다는 듯 뻗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에 얼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정말 골때리는 여인이다. 이거 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거지. 아까의 희연이마냥 두 눈을 굴리다가 결국 내가 꺼낸 말은 단순한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희연이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너 잘못 아니잖아. 하는 말에 울컥했지만, 여자 앞에서 자존심 상하게 울고싶지는 않아 입을 꾹 다문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상봉 장면도 아니고 감격적인 장면도 아니었지만, 순수하게 감정에 의존하는 아이가 한명 더 있다는게, 좋고, 기쁘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행동했다.
좋은 분위기가 이어갈 즈음, 지나가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 갑자기 둘만 얘기 하는 장면을 마주치면 분명히 이상한 상황으로 오해할게 뻔한데, 당황해서는 무작정 손을 저었지만 그 남자애는 이미 교실로 들어가서 마구 소문을 내고 있었다.
- 야 김성규랑 정희연이랑 사귀나봐! -
오 마이갓.
7. 진심
" 야, 임마 축하한다. 어떻게 우리반 여신이랑 사귈 생각을 했어? 이 새끼 존나 능력자네 " " 아, 안 사귄다니까! " " 어쩐지 요즘 문자를 자주 하더라니, 그럴줄 알았다. "
도통 말이 통하지 않을 위인이다. 마치 내가 애인이 생기길 바랬다는 듯이 말하는것이 더 기분 나쁘다. 그래, 물론 희연이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썸타는 사이도 아니고 무슨 사이도 아니지만, 그 일로 인해 사이가 약간 오묘해진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희연이 쪽에서만. 내가 게이인 것을 알더라도 사람의 마음은 어찌 조종하거나 어쩔 수 없기에 그저 자그마한 기대를 거는 듯 싶었다. 그에 반해, 나는 점점 포기라는 동굴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 정체성을 버리고 가식적으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그게 바로 어젯밤에 있던 일이었다. 분명 아니라고 열번이나 말했는데, 굳이 나를 여자친구가 생기길 바랬다는 듯이. 축하한다는 말을 쏟아내던 우현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오늘 아침 만났을때도, 이렇게 원망스럽게 능력자라며 장난스레 축하메세지를 보내는게.
어깨에 올려진 손을 더러 치우고, 반으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우현이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준 아이가 우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달려가서 우현에게 여자애 얘기를 꺼냈다. 어땠어? 즐거웠냐? 진도는? 세세하게 물어보는 것 보니 요즘들어 여자아이와 만남이 잦아진 듯 싶었다. 희망 게이지가 담긴 병은 점점 수명이 다해갔다. 이제 버티기 조금 힘들어졌다.
" 너, 표정이 왜 그래? "
언제 온건지 내 자리 앞에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희연에 그저 웃었다. 별 거 아닌것 처럼 치부하려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 뭐가 어때서, 내가 " " 너 툭, 하고 치면 펑, 하고 울거 같아 "
그런 거 아냐.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앞에 있는 희연이는 배려하지도 않은 채 그저 엎드렸다. 사실은, 정말로 남자답지 못하게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지만, 그래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었다. 나약한 모습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 앞에서 그냥 그 아이의 모든 것 때문에 휘둘리는 자신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정작 이렇게나 휘둘리고 있는데도, 현실을 거부하는 사람 마냥 손사래를 마음속에서 쳐댔다.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고개를 들고, 꿋꿋이 피며 수업에 집중하기로 자신과 약속하고는 칠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게 오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우현이하고는 대화 한마디 조차 하지 않았다.
늦은 밤, 부재중 전화 3통이 뜬 전화기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게이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지금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옛날에는 제 집 드나들듯 왔다갔다 거렸던 채팅방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장소가 되버렸다. 혹시라도 정말 아는 사람이 게이커뮤니티에 장난스레 접속했는데 희연이처럼 같은 상황이 발발하면 곤란해질테니까. 아, 참. 가장 먼저 닉네임도 바꿨다. 게이커뮤니티라고 모두 다 날 못 알아 볼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웹서핑을 하며 기사를 몇 개 보다가, 이내 컴퓨터를 껐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일명 카톡 폭탄이라고 하는 것이 와있어 채팅방을 열었다.
「야」 「야, 김성규」
하는 카톡만 30개가 와있었다. 오늘 한마디도 하지 않고 냉랭한 모습을 보인것이 화근이 된 듯 싶었다. 풀어줘야 겠다. 하는 생각에 손을 움직여 답을 입력했다.
「왜」 「너 뭐야, 이제서야 답장하고 오늘 하루종일 말도 없고 어디 아파? 아프면 말이라도 해」 「ㄴㄴ 안 아파」
기운없는 답장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걸음이 부실했다. 몸을 날려 누우니 침대의 반동이 강하게 일었다. 이불을 아래에 깔고 배게를 꽉 쥔 채 나머지 한 손으로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카톡 비밀번호를 힘없이 입력하고, 다시 답장을 눈으로 보았다. 「그럼 왜 그러는데, 뭐 화났냐? 저번에 PC방 안 가줘서?」 「ㄴㄴ」 「아 그럼 뭔데」 「내가 할말 잘 들을 수 있냐?」
금세 긍정의 답장이 오는 것을 보고 손을 조심스레 놀렸다.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허무해졌다. 급작스레 차오르는 눈물을 어거지로 막았다. 지금 입력하는 말 덕에 너를 볼 수 있다는 현실이 마지막이라는게 슬프고 아프고 그랬다. 그냥, 무언가 이상했다. 이렇게 내가 우현이에게 이런 말을 쓸 수도 있구나, 생각도 해보고.
「희연이가 나 좋아한데」 「이미 사귀는거 아니였냐?」 「근데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고민이야」 「헐ㅋ 누구야 누군데?」
손가락이 두 번 움직였다.
「너」
그리고 침묵, 읽고나서도 답장이 없자 나는 끝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채팅창에 길게 문자를 입력했다.
「답장 없어도 돼, 이제 후련하다. 너라는 친구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보냈던 시간들이 허무하지만 이제 마음도 잘 정리하고 너 말대로 희연이랑 잘 사귀어 볼게」 「고맙다.」
밤은 어두웠고, 끝끝내 눈물을 참았던 나는 배게에 얼굴을 박고 흐느꼈다.
8. 억지 화해?
학교를 같이 등교하는 사람이 바뀌었다. 그 사람의 성도 바뀌었다.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는 더 이상 없을거 같았고 그저 어색한 미소만이 입 안에 감돌 것 같았다. 손을 잡아도 별 감흥이 없고 그 아이가 애교를 부려줘도 딱히 귀엽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이게 연애라는 건가? 분명히, 좋은 마음이 하나도 없는데 나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의 환호가 흘러나왔다. 우리반 대표 커플 납시오! 하는 장난스런 말투들이 교실 안을 채우고, 우현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금방 피했다. 분명히 경멸할듯한 눈초리일게 뻔했고 나를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을게 뻔했다. 8년간 쌓아온 정은 와르르 무너졌다. 그것의 현실을 파악했던 나는 그저 말 없이 희연이를 보내주고 내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는 이제 귀에 와 박히지도 않았다. 더 이상 평범한 나날이 이어지지 않는 다는 현실에 그저 일상이 지루해지고, 모든것에 흥미가 사라졌다.
점심시간, 여전히 나는 희연이와 걷고 있었다. 마치 이것이 당연한 마냥 종이 치자마자 희연이가 다가와서 '밥 먹으러 가자'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걸어가게 되었다. 정말, 이것이 마치 매일 있었던 일 마냥 일상처럼 몸에 맞춰져 갔다. 식당에 도달하자마자 아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분명히 희연이는 나한테 과분했다.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남자애들에게는 일명 '공주님' 이라고 일컫어지는 희연이는 분명히 나에게 과분했다. 아이들도 그것을 알고 있고, 나도, 친구들도, 심지어는 희연이도 알고 있을게 뻔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위의 환호성이 들렸다.
" 부담스럽지? " " 아냐, 괜찮아 "
미안해 하는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실은 매우 부담스러웠지만.
교실로 돌아와서 수업을 전부 다 끝내고, 종례시간이 다 되어 가방을 집어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익숙하게 우현이를 불렀을테지만, 지금 내 앞에는 희연이가 있었다. 가자! 라고 밝게 웃으며 말하는 얼굴에 싫다는 말을 할 수 조차, 꺼낼 수 조차 없었다. 내 생에, 첫 사랑이 이렇게 감흥없는 연애로 끝날 줄은 몰랐다. 분명히 난 다짐했는데, 희연이를 사랑하자고, 좋아하자고 분명히 다짐했는데 그 다짐은 오늘로써 찬찬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었다. 우현이가 아니고서는
" 오늘 뭐해? " " 그냥, 집에서 공부 좀 하려고 "
급한거 아니면 나랑 놀자. 밝게 손을 내미는 희연이의 행동에 주저않고, 그러나 감흥없이 희연이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손을 붙들고 교실을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아주 많이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저 하루, 하루 반 못들은거 뿐인데.
" 야, 김성규! "
고개를 돌려 보니 특유의 환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대답은 하지 못했지만 우현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 여친이랑 데이트 하냐? " " ……그래, 한다 " " 좋겠네, 짜식. 잘 다녀오고 밤에 롤하게 연락해라! "
손을 거하게 흔드는 모습에, 그저 웃으며 답했다.
9. 너를 알수 없음.
결국 우현이랑은 화해했다. 고백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고 나도 일부러 대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게임하거나, 가끔 만나서 놀고, 돈까스를 먹고 싶다는 말에 시내에 나가서 같이 돈까스를 먹거나, 예전 마냥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왔다. 이것이 용서해 줄 일은 아니지만, 마치 우현이가 나를 용서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괜시리 고마워졌다. 그렇다고 희연이와 헤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주 만나고, 노는것을 반복했으며, 어색함도 점점 사라지고, 물론 좋아하는 감정은 들지 않았지만 친구로서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비오는 날, 원래 놀이동산을 가려고 했던 약속을 취소하고, 카페에 들어서 앉았다가 희연이네 어머님이 급하게 희연이를 찾으시는 바람에 희연이는 먼저 쌩하고 가버렸다. 우산도 희연이와 둘이서 한 개를 쓰고 와서, 빌려줘버렸으니 꼼짝없이 비를 맞아야 하는 상황이 왔다. 결국 후드티에 모자를 덮어쓰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 아파트 단지내에 익숙한 놀이터가 보여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비가 잔뜩 내리고 있어서 당장 집에가야 할 상황이었지만,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그냥 걸음을 그네쪽으로 옮겼다. 축축히 젖은 그네에 생각없이 엉덩이를 붙였다. 차가운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냥, 예전에 놀던 추억들이 눈 앞에 슬슬 아른거려 주위를 계속 둘러보는 일 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후줄근 차림으로 심부름을 다녀오는지 봉지와 우산을 각각의 손에 들고 저를 쳐다보는 우현이 눈 앞에 보였다.
" 야, 이 미친놈아, 너 지금 비오는데 뭐하는거야 "
허겁지겁 놀이터로 뛰어들어와 우산을 씌워주는 모습에 그냥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 너 엄마 심부름 다녀오냐? 으유, 초딩이네 " " 초딩만 엄마 심부름 해?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 지금 뭐해 여기서, 차였냐? "
차였냐는 물음에 가운데 손가락을 줄기차게 올리며 꺼져라고 대답했다. 난 너처럼 한심한 새끼 아니거든? 나 연애 고수야. 의기 양양하게 저를 가리키고 말하는 말이 낯뜨거웠지만 이것도 다 장난이니 뭐,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우현은 그저 기가 찬다는 웃음을 지었다.
" 그럼 왜 비오는데 이러고 있냐, 감수성 터지셨어요? " " 님 감수성에 대해 잘 모르면서 나대시네, 감수성하면 또 김성규지 " " 새끼 또 깝치네, 감수성 하면 김성규? 당근 남우현이지 "
내가 세계 재패하는 소울리스트 가수가 될거라는거 너도 알잖냐, 은근히 뻐기는 듯한 말투에 성규가 비웃음을 동반한 웃음을 내뱉어댔다.
" 지랄, 넌 요즘 왜 데이트 안 하냐? 님이야 말로 차임? " " 노노, 내가 찼음 " " 올, 꼴에 자존심 좀 세웠냐? 왜 찼어? "
은근히 차였길 바랬는데 남자 자존심 좀 세우려고 찼나? 괜시리 찼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정말 이젠 답이 없다. 또 엄마의 부름에 집으로 들어간 희연이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비가 거세게 내려 우산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잔뜩 들리고, 우현이 입을 열었다.
" 여자애가 너무 튕기는 맛이 없어 " " ……… " " 누구처럼 "
말을 이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야, 나 너 만나면 꼭 확인하고 싶었던거 있었어 "
우현은 우산을 내려놓고, 뽀송한 머리 위에 비를 맞았다. 그리고, 곧 그네에 앉아있는 내 얼굴을 부여잡고, 입술을 부딫혔다. 짭짤한 비 맛이 입 안으로 새겨들어왔다. 그네를 붙들고 있는 두 손은 움직이지 않고 고개만이 활발한 움직임을 더했다. 아, 이제 몰라 나도.
10. 착각이 아니네 (完)
아침에 일어났을때는 감기에 걸려있었다. 익숙하게 기침을 하는 모습에 엄마는 그냥 병원가라고 돈을 쥐어주는 일 뿐이 하지 않았다. 나쁜 엄마, 냉정한 엄마. 하고 속으로 원망하고 나서는, 결국 돈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오늘 학교 끝나고 나서의 데이트는 물 건너 갔다. 병원부터 가야겠네. 가방을 챙기고, 문을 열었을 땐 희연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늦게 일어났어? " " 아니, 감기 걸려서, 킁 "
코를 훌쩍거리며 재채기를 몇 번 하더니 머리가 띵해졌다. 희연이는 걱정하는 듯 손을 내 이마 위에 올렸다. 괜찮아, 하며 손을 내리자 희연이가 그래도, 하면서 다시한번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러다가 병간호까지 해줄 기세다 정말. 이렇게 헌신적인 여자친구를 두고,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어제 키스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만큼 짧지 않았다. 실수로 우산을 내리려고 했는데 몸이 움직여서 입술이 부딫혔다고 해도 봐주려고 했다. 그냥 넘기려고 했다. 여태까지 착각 잘 해왔으니까 지금도 착각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판단하려고 했지만, 입술을 떼고, 슥 닦으며 한숨을 푹 내쉬고, '우산 너가 써' 라는 말만을 남긴 채 가버리면,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거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건드렸다.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이게, 이 상황이. 내 감정은 그렇게도 잘 파악했으나 우현이의 감정은 더 파악할 수 없었다. 키스를 하는 것은 물론 남녀상열지사라면 평범한 일이었고, 설령 남남이라고 해도 사귀는 사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여겨질 행위였다. 하지만 우현이랑 나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내가 차인 상황이었고, 우현이는 무엇보다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더 헷갈려, 희연이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생각했던 생각들은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벌써 학교에 도달한 몸을 의자에 앉혔다.
" 오늘 끝나고 뭐해? " " 아, 나 병원가려고 " " 역시, 아까 내 말 들으려고 하는구나? "
아까 병원가라는 말 했었구나, 물론 듣지는 못했지만 나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 예쁜데 왜 도통 마음이 생기지가 않을까, 왜. 희연이의 말을 듣고, 종이 치자마자 나는 엎드렸다. 내가 자면 아이들이 잘 처신해 주겠지. 아니면 희연이가 그러던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저 엎드려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몇시가 되었는지 모를 즈음, 잠깐 정신이 번뜩 뜨여서 엎드리기만 하고 주위의 말을 듣고 있는데, 다음시간이 급식시간이라고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지금은 4교시인듯 했다. 교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선생님이 교탁에 서는 소리가 들렸다. 책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쭉 둘러보는데, 역시나 내가 걸린 모양이었다.
" 어이, 거기! 김성규! "
에이, 모르겠다. 하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선생님 오늘 성규 아파요, 엎드리고 있는데요 " " 많이 아픈가? " " 네, 지금 열도 엄청 높다고 하던데 "
니가 뭘 안다고 해명이야, 아침에 같이 가지도 않고 오자마자 엎드려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속으로 꿍얼거렸다. 그래도 이 말 때문에 더 착각은 깊어졌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학교가 끝나고, 아이들은 무엇을 하는지 금세 다 교실을 빠져나갔다. 야자를 하는 아이들은 보충을 들으려고 3층으로 내려갔으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익숙하게 가방을 챙겨들었다. 그러자 앞에 희연이가 보였다. 정말로 당연하게도 이제 이 여자아이가 내 여자친구라는 것이 보편적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예쁘게 웃는 모습이 보여 희연이에게 응답하듯 그저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이럴때마다 나는 점점 더 미안해지기만 했다.
" 오늘 병원 갈거지? 같이 갈래? " " 아냐, 됐어 너 오늘 바쁘잖아 "
오늘 빤히 컴퓨터 학원 가는 날인거 다 아는데, 너 땡땡이 칠라 그러지? 장난스런 말에 희연이 들켰다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됐어, 손사래를 치는 모습에 희연이 그럼 나 먼저 갈게! 하고 가방을 고쳐매고서는 교실을 나섰다. 나 역시 가봐야 겠다. 싶어 책상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집어들고 주머니에 넣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걸음은 얼마 안가 멈췄다.
" 야, 너 어디가! 병원가냐? " " 어, 너 안갔냐? "
어, 가방 좀 챙기느라. 가방을 힘겹게 매며 우현이 답했다.
" 같이 갈래?, 나 심심한데 " " ……나 물어볼거 있어 "
또 착각하게 만드는 말에, 난 결국 말을 꺼냈다. 이번 아니면 아예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런 애매한 사이보다는 그냥 선을 확 긋는게 차라리 나을거 같았다. 분명한 선을 그으면 그 선에 상처를 잔뜩 받을 나라는 걸 알지만 더 착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혼자 기대하는 시간들이 미련해보여 물었다.
" 나한테 왜 키스했어?, 어제 " " ………. " " 내가 우스워서? 아니면 진짜 내가 좋아서? "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태연한 척 얘기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심장은 정말 쾅쾅 소리가 나도록 뛰고 있었다. 더 지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꺼낸 말들이었지만 그냥 무서웠다. 정말로 아무감정 없이 그냥 해본거였어, 라는 대답이 나올까봐. 기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봐.
" ……………. " " 빨리 대답해 새꺄, 나 진지하다고 " " ……난 남자 안 좋아한다 "
미친놈, 결국 고개를 떨궜다. 이번에도 내 착각이었다.
" …그럼 씨발, 왜 키스를 해. 사람 헷갈리게 자꾸 말 걸고, 왜, 왜 그래, 진짜. " " …………. " " 또 착각했잖아, 씨발아 "
개같은 새끼, 나 간다. 고개를 팩 돌리려는 순간, 뒤에서 팔목을 붙들어오는 느낌에 다시 우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제 특유의 강아지 같은 웃음을 지어보인다. 뭐야, 왜 쳐웃어 지금 나 진지한데.
" …근데, 이제 좋아해 보려고 "
미친놈아, 벌써 몇번째 욕인지 모르겠다. 그제야 안심의 웃음이 지어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에, 또 들뜨는 느낌에 자꾸 욕이 새어나왔다.
" 너 뒤져, 진짜, " " 마님, 가시지요. 병원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가마 태워줘라 새끼야, 아니면 너 사살. 장난스런 말투가 울리고, 우현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웃음이 좋아서 그냥 따라 웃었다. 이번에는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完
※ 으앙 반갑긔ㅜㅜ ※ 그냥 청소년 연애썰 풀려다가 이틀 걸려서 씀!!! ※ 어엉엉엉ㅇ 사랑해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꼭 1년만 지나면 꼬박꼬박 연재하는 사람으로 돌아오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