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비
나 좋아해요 ?
니 입에서 환타냄새가 난다. 니가 말했다. 나, 좋아해요? 새까만 두 눈이 머뭇거리며 묻는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붙은 이목구비들이 찡그렸다가, 웃었다가, 별 짓을 다하다가, 또 묻는다. 나, 좋아하냐구요. 좋아한다고 말해라는 무언의 압박같은 그 질문에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니가 애가 타는지 발을 동동 구른다. 나는 너에게 눈길조차 주지않고 레포트를 쓴다. 너는 속이 터져라 가슴을 팡팡 두들긴다. 양 뺨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 수정. "
" … "
" 정수정. "
" … 시끄러워. "
" 나 좋아해요? "
" 뭘? "
" 좋아해요? "
" 뭐를? "
" … 나, 좋아해요? "
나는 아무말 하지 않는다. 니가 제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이며 책상에 엎어졌다. 짙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부시시하다. 나는 너의 사과같은 뒷통수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레포트로 돌아온다. 너는 하품을 하면서도 계속 묻는다. 나 좋아해요 수정?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다. 니가 책상밑으로 내 다리를 콕콕 찌른다. 날 만난다고 새로샀다는 연분홍빛 플랫슈즈를 신은 발이 앙증맞기 그지없다. 큼지막한 코사지가 달린 신발이 허공에서 달랑거린다. 나는 짐짓 무서운 표정을 하고 너를 쳐다본다. 방해되니까 혼자놀아.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표정에 너는 정말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한번 물었다. 수정, 나 좋아해요?
비가 온다. 창문을 톡톡 두들기는 소리에 창밖을 봤더니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다. 시계를 보니 벌써 4시가 다 되어간다. 너는 나 좋아해요? 하는 질문을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더 하다가 제풀에 지쳐 잠들었다. 앙상하기 그지없는 흰 팔뚝이 추워보여서 자켓을 벗어다가 덮어주었다. 니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잔다. 바보같은 얼굴에 웃음이 나온다. 맘같아선 너를 집에 데려다주고 싶지만 아직 반도 끝내지 못한 레포트가 말썽이다. 나는 관련서적을 팔랑이다가 새 책이 필요할것같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니가 뭐라고 웅얼거리려다 다시 입을 다문다. 잠꼬대를 하는 모양이다.
책을 가져와 앉았다. 너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자고있다. 톡, 톡톡. 빗소리가 고즈넉하게 도서실을 울린다. 드문드문 앉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자리를 챙겨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산이 없는데, 큰일이다. 너는 우산을 갖고 있던가? 너를 깨워 물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조심스레 니 가방을 열었다. 함부로 가방을 뒤지는건 실례지만 비를 쫄딱맞고 집에 갈 생각을 하니 몸이 근질거렸다. 니 가방은 몹시 더럽다. 과자를 먹고 제대로 버리지 않아 부스러기가 한가득이고 녹아버린 츄파츕스가 대여섯개씩 굴러다닌다. 끈적끈적한 사탕이 안감에 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으으 드러워. 나는 엄지와 검지만으로 너의 가방속을 뒤진다. 치약, 칫솔, 빗, 거울, 아이라이너, BB크림, 립스틱 … 꼭 너의 가방이라는걸 말해주는듯 쓸데없는 물건만 줄줄이 나온다. 벌써 책상위에 가득 늘어진 너의 물건들이 구질구질해서 한꺼번에 쓸어담았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도 너는 곤히 잠잔다. 점점 거세어 지는 빗줄기에 덜컥 겁이났다. 나는 가방의 지퍼를 채우고 너를 살짝 건드렸다. 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 엠버 "
" … "
" 엠버, 비와. "
" … "
" 비온다니까? "
"… "
" 일어나. 집에가자. "
코대답도 안하는 너의 귓가에 바싹 붙어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보드라운 살결과 달콤한 냄새가 꿀같다. 한번도 눈에 제대로 담은 적 없던 새하얀 니 살결에 분홍빛으로 불그스름한 두 뺨과 도톰한 눈두덩이, 원형을 그리는 동그란 콧망울과 립스틱이 반쯤 지워진 분홍빛 입술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건 처음이다. 그러고보니, 우린 아직 뽀뽀도 안했고, 손도 안 잡았고, 서로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다. 하물며 너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는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나는 숨소리를 죽이고 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살결이 빛나는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너의 길고 가는 속눈썹이 파르스름히 떨린다. 흑단같은 단발머리가 얼굴위에 엉망으로 올라앉아 있어 살포시 넘겨주었다. 훤히 드러난 얼굴이 마냥 어리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 남아있을것 같이 어리기만 한 얼굴. 삐뚤삐뚤 그린 아이라인과 어른스러운 옷차림이 어색하기만하다. 더 가까이, 입술과 입술이 닿을듯이 가까이 다가갔다. 너의 작은 숨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불규칙적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숨소리에 내 숨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쿵쿵쿵쿵 뛰었다. 꼭 너에게 고백받았던 날 처럼, 자기전에 널 생각할때 처럼, 너의 웃는모습을 쳐다볼때 처럼. 얼굴이 뜨겁다. 저절로 허리가 숙여졌다. 심장이 아프게 뛰어대서 너를 오롯이 쳐다볼 수가 없다. 꼭 만지면 사라질 신기루처럼 비현실적이리만큼 예쁜 너라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빗소리가 자꾸만 커져간다.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간신히 식히고 너를 흔들어 깨웠다. 니가 졸린눈을 하고 나를 쳐다본다.
" … 왜깨웠어요? "
" … 비와. "
" 네? "
" 비온다고. "
" 비와요? 어떡하지, 나 우산 없는데. "
" 할 수 없지, 그냥 가. "
" … 그런데 수정, 얼굴이 왜 빨개요? "
정곡을 찌르는 너의 질문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노트북을 내 백팩에 쑤셔넣었다. 마치 화난처럼 빠르게 걷는 내 뒤를 쫓아오며 너는 꾸었다는 꿈 얘기를 했다. 그게 말이죠, 수정이랑 케익먹으러 갔는데 수정이 딸기케익을 너무 많이먹어서 점원이 우리 쫓아냈어요. 상상이 가요? 수정, 그건 그렇고 딸기케익 좋아해요? 난 치즈도 좋고 초콜릿도 좋고 고구마도 좋아요. 수정, 수정 듣고 있어요? 수정 … 수정! 수정, 수정! …… 너의 새된 목소리가 조잘조잘 울린다. 우뚝 멈춰선 내 뒤에서 너는 여전히 조잘거린다. 생각보다 비가 훨씬 더 많이 온다. 아예 쏟아붇는 비를 그대로 맞고 갈 수는 없다. 더군다가 이 비를 맞았다가는 나는 물론이고, 너마저 감기에 걸릴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 우와, 비 진짜 많이와요. "
" 그러게. "
" 수정, 우산 있어요? "
" 없어. "
" 잉, 그럼 어떡해. "
" … 그러게 말이야. "
니가 울상을 하곤 내 옆에 선다. 비가오는 바람에 서늘해진 날씨에 니가 몸을 잘게 떤다. 으으, 추워요. 얇은 블라우스를 입은 니 팔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재킷을 벗어 너에게 내밀었다. 니가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와 재킷을 번갈아 쳐다본다.
" 입어. "
" 왜요? "
" 입어. "
" 왜요? "
" 아, 감기걸리면 안되잖아. 너 뭐, 그 뭐더라 … 아무튼 할 일 있다며. "
" 없는데요? "
" … 그냥 좀 입어. "
" 수정은요? "
" 난 괜찮아. "
" 왜요? "
" 난 튼튼하잖아. "
" 저도 튼튼해요. "
" 그럼 입지 말던가. "
" 아, 아니예요. 입을게요 … 저 추워요. "
니가 머쓱한 표정을 하고 블라우스 위에 재킷을 덧 입는다. 내가 빗속으로 한걸음 나왔다. 세차게 퍼붓는 비가 얼굴을 아프게 때린다. 너는 머뭇거리며 괜찮아요?한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나왔다. 니가 퍼붓는 비에 울상을 짓는다. 나는 너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걷는다. 너의 달름한 머리가 벌써 비에 푹 젖었다. 너의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내 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눈 앞이 비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 수정! "
" 응? "
" 왜이렇게 늦게걸어요. "
" 아, 어. "
" 빨리 걸어요 우리. "
니가 징징거리며 내 팔을 꼭 잡는다. 비를 맞은 몸이 무거워서 자꾸 걸음이 느려진다. 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재촉한다. 가만보자, 여기서 몇번 버스를 타야지 지하철역에 가더라? 비가와서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처럼 비를 쫄딱맞으며 뛰어가거나, 우산을 쓰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너는 계속 칭얼거린다. 나는 너의 두 손을 더 꼭 잡고 그저 걷는다. 너는 이제 투덜거리고 칭얼거리기를 포기한듯 말 없이 걷는다. 아주 비실비실 웃기까지 한다. 나는 너를 따라 웃으려다가 입을 앙 다물었다. 너를 따라 웃었다가는, 웃음을 멈출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마침내 속옷까지 흠뻑 젖어버렸다고 느낄때 쯤 우리는 플라티너스 나무가 무성한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니가 얼굴위로 흘러내린 비를 씻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검은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니가 뭐라고 내게 말한다. 말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고, 너에게선 환타냄새가 난다. 환타처럼 달큰하고 톡쏘는 냄새. 너의 입술이 끊임없이 말을뱉는다. 오물오물.
버스가 오질 않는다. 버스정류장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우린 버스정류장 아래에 모로 서서 비를 피한다. 비는 점점 거세게 퍼붓는다. 플라티너스 나무 잎사귀에 빗방울들이 맺혔다 떨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니가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뭔가 생각난듯 불이켜진 필라멘트를 연상시키며 나를 쳐다본다.
" 수정. "
" 어? "
" 아까 그거 생각했어요? "
" 뭘? "
니가 수줍게 웃는다. 두 뺨이 여전히 불그스름하다. 빗소리가 점점 커진다.
" 나, 좋아해요? "
너의 어눌한 발음과 뭉개지는 입모양이 정말로 아이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너를 바라보았다. 비에 젖어 축축한 머리카락이 니 얼굴 위로 한가닥씩 흘러내린다. 니가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을 뒤로 넘긴다. 너의 반질반질한 얼굴에 빛이난다. 화장이 거의 씻겨내려간 얼굴이 희고 곱다. 나는 너에게 한발자국 다가간다. 아까부터 잡은 손에 땀이 베어나서 걱정이 된다. 니가 혹시 나를 싫어하진 않을까, 맞닿은 손을 거북해 하진 않을까 하고. 니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다시 묻는다.
" 나, 좋아해요 수정? "
" … "
" 수정? "
너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반짝 빛난다. 꼭 봄바람이 살랑 부는것같은 너에게선 여전히 환타냄새가 나서 코끝이 아려온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너의 등허리를 어정쩡하게 감싸안았다. 반쯤 안긴 자세가 된 우리의 모습이 버스정류장 건너편 유리에 비춰 우습게 보였다. 어떻게 안아야 할 지 모르겠다. 좋아해, 하고 대답하기엔 너무 창피하고, 대답하지 않기엔 너무 말 하고 싶다. 어정쩡한 자세를 바라본 니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환타냄새와 후리지아 냄새가 주위를 가득 에웠싼다. 빗줄기가 피아노 선율처럼 뚱땅인다. 나는 비가 계속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봄비가 내린다.
ㅇ1쁜것들... 평생사랑하셈.... 마이너중에 상마이너를 달리는 수정x엠버....... 엠버 수 미시는 분 없으신가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더보기 ![[수정X엠버] 봄 비 | 인스티즈](http://img821.imageshack.us/img821/1869/ecfd0c3d6500ac2a7392c37.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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