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나무가 줄을 지어 세워진,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곧게 걸어. 길의 중간 쯤에 다 다랐을까, 작게 파인 흙구덩이에 어제 내린 봄비가 그 모습 그대로 고여있어. 너처럼 맑게, 지독히도 맑게. 방금 물 위로 꽃잎 하나가 살풋 떨어졌어. 바람에 따라 그네를 타 듯 움직이는 저 꽃잎이 꼭 네가 웃는 모습 같아서 계속 바라보고 있게된다.
이 자리에 서있다보니 야속하게 매정함 마저 따뜻했던 네가 떠올라 눈을 슬며시 감아봐. 눈가에 톡톡 물방울이 튀어. 이게 내게서 나온 것인지, 네게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어. 입 안에서 솜사탕이 녹는 느낌도 이렇게 부드럽진 않을거야. 넌 예전처럼 부드러운 감촉으로 내 몸을 그렇게, 그렇게, 사르르 녹였어.나른한 발걸음으로 쭉 걷다보면 작은 컨테이너 하나가 나와. 예전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해. 아직도 선명한데, 너는 보이지않아. 흐릿하게라도 보이면 좋겠는데 말이지. 마주하기만 해도 좋아 어쩔줄 몰라하던 우리가 눈앞에 일렁여. 또 눈물이 흐를거같은데 그냥 꾹 참아. 컨테이너에 작게 달린 문을 잡고 당기면 삐그덕 소리와 함께 온기가 나를 사로잡아. 네 온기가. 아직 네가 여기서 살아숨쉬는 느낌이 나. 예전에 네가 좋아했던 흰 장미가 바싹 말라버렸어. 나도 저렇게 말라버렸으면 좋겠는데, 네가 자꾸만 떠올라서 그렇겐 못 하겠다. 우리가 아니라면 아무도 모를거야. 저게 우리의 전부였다는 걸. 기어코 눈물이 떨어져. 눈앞이 일렁이는데 있지, 그게 또 너로 보여. 눈에 보이는게 뭐든 다 네가 떠오르더라. 그만큼 너와 내가 사랑했다는 뜻일까? 네가 내 기억에 너무 짙게 슬어있기 때문일까 생각해 본다. //// "너를," 손짓 발짓 온갖 표현 방법을 동원해서 한 자, 한 자, 설명해나가. "좋아해." 내 마음을 읽은 네 얼굴에 크게 미소가 번져. 사르르, 녹는 것 같아. 예쁘다. 행복해. 너와 함께 하는 이 시간들이. 아마 내가 그 시각 그 장소에 가지 않았더라면 널 만날 수 없었겠지. 내가 지독한 편견과 색안경을 떨쳐내지 못했더라면 이 행복도 날 찾아오지 않았겠지. 넌 내 손을 잡고 한발, 한발, 조심스레 내딛어. 혹여나 내가 네 속도에 따라오지 못할까봐 말이야. 그게 또 너무 예뻐. 기분이 좋아. 네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 속에 있던 검은 연기가 없어지는 느낌이야. 네 미소는 날 행복하게 해. 당장이라도, 구름에 올라가 뒹굴뒹굴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 "태형아." 네가 고개를 들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봐. 네 맑디 맑은 눈동자에 내가 비춰져서 반짝거려. 너로 인해서 나도 같이 맑아지고, 깨끗해지고, 순수해져.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로 와." 네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거려. 심장은 그럴수록 더 쿵쾅쿵쾅 뛰어. 미칠 것 같아. 너무 불안해서. 네가 입은 환자복을 모두 풀어 바다 저 깊숙히 박제해버리고 싶어. 다시는, 절대로 떠오르지 못하도록. 그게 네 아픔 같아서, 난 꼭 그러고 싶었는데. 지금은 너와 같이 바닥으로 한 없이 떨어져 짓밟힐 것 같아. "나 화낼거야." "……." "제발," "……." "내 옆에 있어줘." 넌 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듣지 못 하겠지. 바람이 세차게 불어. 어서 떨어지라는 듯이 매섭게, 날카롭게. 그 칼바람에 온 몸이 긁혀. 그렇지 않아도 피투성이던 네가 더욱 벌겋게 물들어. 금방이라도 바닥로, 바닷 속으로 떨어질 것 같이. "김태형, 장난 하지..!" "사…, 랑해." 누군가가 내 뒷통수를 세게 내려친 것 같다. 어딘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해.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된 건가 싶을 정도야.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걸까, 우리는. 네가 며칠 전부터 지민이를 데리고 와서는 내가 듣지 못하게 구석으로 가서 무언갈 열심히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이거구나. 박지민 알면 화내겠네. 왜 가르쳐줬냐고 자신한테 따질거야 아마. "김태형." "고마워." "……." 너무 놀라서, 슬퍼서, 화나서. 눈물이 나오지도 않아. 그냥 믿겨지지가 않는달까. 네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어디선가 튀어나온 박지민이 얼음처럼 얼어버렸어.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게 돼. 요란한 소리들이 머리속을 헤집어 놔. 슬픈, 그래도 나름대로 행복하다면 행복한. 끝이났어. // "태형아, 나 왔어." 넌 언제나 대답이 없네. 당연한 건데. 그래도 좋아, 너 이렇게 보고있는게. 넌 봄을 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름이 오면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근데 또 이렇게 니 생각이 나는걸 보면 넌 여름이었나? 난 네가 가을도 닮았을까봐 겁이나. 하얀 겨울에도 네가 있을까 두려워. 다시 봄이 오면, 너는 또 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