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장그래. 좋은 아침.”
“…안녕하십니까, 한석율씨.”
오늘도. 역시나. 여김 없이. 빈틈 없이 반듯한 가르마와 능글 맞은 웃음, 생각 없이 어깨를 훑고 가는 큰 손.
오늘도. 역시나. 여김 없이. 나는 이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운 채로 기분이 썩 좋지 않은 하루를 시작한다.
언젠가부터 그랬다. 짜증남에서 귀찮음으로 변하고, 귀찮음에서 익숙함으로 변하고, 그 익숙함은 어느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애매한 감정으로 변해 날 완전히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침마다 굳이 인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그가 업무로 바빠 하루 정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날에는 온종일 그 생각 때문에 신경이 거슬려 우리 층의 프린터가 모두 고장났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윗층까지 올라가 그의 얼굴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인사를 하고, 할 필요도 없는 복사를 몇 장씩이나 해 잔뜩 종이를 낭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어쩌다 한 번 술자리에서 그가 술에 취해 그래야, 하며 개죽이 웃음을 지었을 적에 나는 그 날 잠을 설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몇 번이고 그래야, 그래야, 하는 그 다정한 음성을 되뇌이며, 또 그런 자신을 수십 번이고 질책하며. 이제 요즘에는 그의 손이, 그의 몸이 스치기라도 하면 소스라치듯 놀라 뒷걸음질을 치곤 한다. 물론 그럴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입을 비죽이며 우쭈쭈, 하고 날 강아지 다루듯 하고 넘어가는 한석율이지만.
나는 이런 연유로 요즘 한석율을 대하는 게 편치가 않다. 아침 인사 한 번 나누는 게, 커피 한 잔 같이 마시는 게, 밥 한 끼 같이 먹는 게, 입사 동기로써 술 한 잔 걸치는 게. 그와 함께라면 모든 게 힘들다. 그를 마주친 날에는 업무 보고 하나 올리는 일에도 제대로 집중이 되질 않아 차장님께 된통 한 소리를 듣기도 한다. 다이어리를 꺼내 멍하니 오늘 할 일을 적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한석율이라는 글자가 빼곡하다. 머리를 부여 잡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왜. 한석율이 왜. 나는 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아주 성가신 난제이다.
“장그래씨.”
“…하아.”
“어이, 장그래.”
“아, 네, 대리님!”
놀란 탓에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그에 대리님이 피식, 하고 웃음을 짓더니 까딱 까딱, 하고 따라 나오라는 손짓을 하신다. 커피 두 잔을 뽑아 들고 옥상에 올라가니 날카로운 바람이 복잡한 정신을 맑게 한다. 무슨 일 있어? 조심스레 묻는 말에 웃으며 그저 바쁜 도로를 내려다봤다.
“…그냥,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왜 이러는지.”
“왜? 무슨 일인데?”
“자꾸 신경쓰이는 사람이 있어요. 같이 있으면 불편하고, 얼굴 보기가 무섭고.”
그럼 안 보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하는 대리님의 말에 근데 안 보면 보고 싶어요, 라고는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보기 싫은데 보고 싶고, 듣기 싫은데 듣고 싶고. 나는 그를 피해도 그는 나를 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기심의 끝을 달리는 이 마음을 난 뭐라고 정의할 수 없었다. 수년 간 사람과의 관계도 끊고 혼자 지내왔고, 애초에 낯선 사람과 친밀해지는 것을 기피하는 탓에 이런 감정은 난생 처음이다. 그래서 뭐든 좋으니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옆에서 홀짝 홀짝 커피를 들이키고 있는 대리님을 쳐다보았다. …어쨌든 나보다 십 년은 더 오래 사셨으니까.
“저기, 대리님.”
“그래, 장그래.”
“있잖아요, 막…, 가슴이 답답하고. 그 사람 얼굴이라도 본 날에는 하루 종일 우울하고. 근데 신경 쓰이고, 막….”
“근데 막 보고 싶고? 막 생각 나서 잠도 못 자겠고? 일도 안 되고 막 그러지?”
…어떻게 아셨어요? 벙찐 표정에 대리님은 킬킬 웃으며 내 머리를 잔뜩 헤집었다.
“어이구 우리 장그래 어떡하냐. 병 걸렸네.”
“…네?”
“상사병에는 약도 없다던데.”
“상사병…이요?”
“고생 깨나 하겠구만. 근데 거 누군지 궁금하네. 우리 선비 같이 빈 틈 없는 장그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말이야.”
다음에 술 한 잔 하면서 말해줘? 하며 대리님은 자리를 떠났다. 상사병…이라. 나는 텅 빈 종이컵을 손에 꽉 쥐고 난간에 머리를 콩, 콩 연신 박아댔다. 이런 경우에 보통 상사병에 걸렸다고 하는 건가? 아니 나도 남자고, 상대방도 남자인데? 나는 찬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저었다. 아냐. 아닐 거야. 평생 여자한테도 느껴본 적 없는 걸 남자가 처음이면 너무 억울하잖아. 그냥 나는 한석율이 싫은 거야. 그래. 그냥 그렇다고 하자. 강하게 현실 부정을 하며, 계단을 성큼 성큼 내려섰다.
근데 어째 오늘은 하늘이 저를 돕지 않는 날인가 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차장님의 커피 심부름에 탕비실에서 열심히 커피를 휘휘 젓고 있을 때, 휘파람 소리를 내며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단박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직감했다. ‘나는 이 사람이 싫다. 그냥 싫은 거다.’ 주문을 외우듯이 되뇌며 반갑게 인사하는 그를 무시하고 문을 나설 찰나, 그가 한 팔로 앞을 막더니만 그대로 탕비실의 문을 닫아버렸다.
“…비켜 주십시오. 가봐야 합니다.”
“왜 그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는 거야, 장그래?”
“피한 적 없습니다. 원래 이러는 거 아시잖습니까.”
“튕기는 거랑 피하는 거랑은 다른 거지. 넌 요즘 날 너ㅡ무 피하잖아.”
그래. 그도 사람이라면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확실히 요즘 저를 대하는 태도가 한겨울 찬바람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쌀쌀 맞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매사에 낙관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변 사람이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할 테지. 물론 그건 잘 알지만, 이유를 묻는다면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신 때문에 하루 종일 일이 안 잡혀요. 자기 전에도 생각 나고, 꿈에서도 나타나요ㅡ 라고…? 잠시만, 이렇게 정리하니 이거 생각보다 더 이상하잖아.
종이컵을 굳게 들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한석율은 되려 무슨 일 있냐며 잔뜩 걱정하는 눈빛으로 또 아무렇지도 않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 팔을 만졌다. 아아, 방심한 틈에또 한석율이 직구로 다가온다. 그가 닿는 모든 곳이 아리다. 머리 속이 새하얘지는 건 일순간이었다. 귀끝이 빨갛게 물드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주문을 외우자, 주문을…. 나는 한석율이 싫다, 나는 한석율이 정말ㅡ
세상 그 어떤 주문의 말도 애절한 듯 나를 바라보는 한석율의 반짝이는 눈빛 한 번이면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난 대체 언제부터 이 인간 앞에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 되었는가. 지금 무언가 말을 한다면 분명 목소리가 떨릴 것이다. 왼손에 든 커피를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조용히 내 팔을 붙들고 있는 그의 손을 치웠다. 그의 손에 내 손이 잠시 닿는 것조차 힘겨워 무슨 닿으면 독이라도 옮는 것을 만지는 것 마냥 신체의 접촉을 최소화하여 손가락 두 개로 간신히 떨어트리긴 했지만. 꽉 막힌 목을 몇 번이고 가다듬고 힘겹게, 힘겹게 겨우 말을 꺼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얼굴이 빨게. 어디 아픈 거야?”
“아니요, 사지 멀쩡합니다. 저 먼저 가볼….”
게요. 라고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뒤를 돌기도 전에, 한석율은 내 손목을 꽤나 강하게 붙잡아 날 돌려세운다. 그리고는 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와락, 제 품에 가두어 버린다. ……아아. 옴짝달싹 못하고 한석율의 품에 제대로 안겼다. 벗어나야 하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로 밀쳐 내야지 평소의 장그래 처럼 끝내는 건데, 나는 지금 평소의 장그래가 아니다. 내 뒷통수를 쓰다듬는 손이 정말로 저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일으켜 울컥하는 것이, 이렇게 따뜻한 손은 반칙 아닌가. 왜 이래 장그래. 난 한석율이 싫은데. 정말 싫은데. 근데 왜 자꾸….
“힘든 거 있음 말 해. 너는 너무 독립적이야. 좀 의존적으로 살라고.”
“…싫습니다.”
“바로 옆에 이렇게 좋은 동기가 있는데 말이야. 난 장그래라면 언제든 오케이라고.”
“…….”
남이 본다면 참으로 남사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남자 둘이, 꽉 막힌 공간에서, 연신 머리를 쓰다듬으며 꼭 껴안고 있다는 것이. 당장 누가 들어올 지도 모르는 위험 천만한 상황이지만,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힘든 거 다 받아줄 테니까, 그렇게 나 피하지 말라고.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나오면 상처 받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는 한석율 때문에. 나는 잠시 미쳤다ㅡ 생각하고 그의 등에 조심스레 손을 올리고 얼굴을 파묻었다. 그가 움찔하고 놀라는 것이 대놓고 느껴졌다. 누구 때문에 힘든 건데, 누구한테 기대라는 건지.
정말로 난 역시 한석율이ㅡ
“…전 역시 한석율 씨가 싫습니다.”
“…에?”
다시 눈을 부릅 뜨고 다 식어 빠진 커피를 들고 당차게 탕비실을 나왔다. 더 이상 있다가는 제 귀에까지 들리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엄한 곳까지 새어 나갈까 무서웠다. 차장님께 커피를 드리고 자리에 앉아 한숨을 푹 쉬며 책상에 계속 머리를 박아대니 어디 그렇게 해서 머리 깨지겠냐, 라는 대리님의 핀잔이 따라올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미쳤다. 아주 단단히. 내 인생에 커다란 오점 하나를 남긴 순간이었다.
탕비실에 멍하니 혼자 남은 한석율은 대체 방금 무슨 태풍이 지나갔나, 눈을 꿈뻑거렸다. 노골적으로 스킨십을 했는데 장그래가 가만히 있었다. 어깨 동무 한 번 할 때 마다 탱탱볼 마냥 튕겨 대는 장그래가 말이다. 게다가 손수, 자기 손까지 올렸다. 제 품에 작은 머리를 푹 처박고 있었던 주제에 하는 말이, 내가 싫단다. 크리티컬으로다가 사나이 마음을 잔뜩 어지럽혀 놓고는, 대체 이게 뭔가. 석율은 정말로 그래가 어디 아픈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걱정을 하며 장그래의 머리가 닿았던 심장 부근을 연신 쓸어 내렸다. 쟤 왜저래 진짜.
“…사람 심장 떨리게.”
미생을 보다가 정말 제 인생 호모를 만났다, 하는 직감에. 혼자서 끙끙 앓다가 욕망을 참지 못하고 결국 똥 투척을... 하하...
가끔 덕심이 폭발하다 못해 넘쳐 흐를 때 찾아 오겠습니다.
그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