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두둥
토끼를 키우기 시작한 타쿠야는 얼마 뒤, 제가 키우고 있던 토끼가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게 바로 장위안. 장위안 = 토끼
[타쿠안] 토끼 키우는 남자 5
타쿠야는 예상했다. 어쩐지 좀 도도해 보이는 위안과의 한집살이가 어색할 것이라고. 하지만 위안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토끼라는 것을 알게 된지 3일이 채 지나지 않아 타쿠야는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1
일주일에 3번, 타쿠야는 학교 수업이 끝난 뒤, 집 근처 카페에서 알바를 했다. 알바가 끝나고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와 보면 위안은 집주인 마냥 이불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어, 왔어?”
타쿠야의 다녀왔다는 말에도 위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익숙하다는 듯 어어~하고 대강 대답해줄 뿐이었다. 물론 위안은 토끼일 때도 마중을 나오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편하게 지내는 위안의 모습에 타쿠야는 안도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게 작은 관심조차 주지 않는 위안에게 묘한 서운함을 느꼈다. 내심 타쿠야는 현관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위안을 바라고 있었다.
뭐 어찌되었든 간, 사실 타쿠야는 그저 집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타국에서 대학생활을 하며 느꼈던 외로움이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위안이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타쿠야의 귀가 시간을 빨라졌다. 그에 따라 알바가 없던 날에 종종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친구들과의 술자리 출석률은 점점 떨어져갔다. 가끔 과 선배의 권유로 피치 못하게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서 빠져나오기 일쑤였다. 어디 가냐고 못 간다고 친구들이 타쿠야를 붙잡으면 타쿠야는 한결같이 말했다.
“우리 토순이 밥 챙겨주러 가야 돼."
점점 멀어져가는 타쿠야의 뒷모습을 보며 친구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토순이는 개뿔. 토순이가 지 마누라라도 되냐. 저 새끼, 분명 집에 여자라도 숨겨 둔 것이 분명하다.
#2
알바가 있을 때는 6시, 알바가 없을 때는 대강 2시 안쪽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타쿠야의 귀가가 평소보다 조금 늦어지는 날이면 위안은 토끼로 변해 창문 근처 책장 위로 끙끙 거리며 올라갔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보이는 빌라 입구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키가 큰 남자의 그림자가 빌라 입구 쪽에 비취고 그 남자가 타쿠야라는 것을 발견하면 위안은 누구보다 재빠르게 책장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바닥에 대충 깔려있는 이불 위에 올라가 평소 같이 배를 깔고 누웠다. 시간이 조금 흘러 타쿠야가 문을 열고 들어와 다녀왔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면 절대 너를 기다리거나 너를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을 티내기 위해 최대한 무신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어, 왔어?”
#3
가끔 집에 들어온 타쿠야가 다녀왔습니다, 라고 인사를 해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대부분 위안은 토끼인 상태로 책장 위에서 잠들어있었다. 그런 위안을 처음 목격했을 때, 타쿠야는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온 걸까 궁금해 하며 위안의 안전을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반복되면서 점점 위안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타쿠야가 아침에 집을 나서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위안은 늘 집에 있었다. 타쿠야는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이 조그마한 집에서 위안이 홀로 하루를 보내는 것을 상상했다. 내가 없는 동안 위안이 얼마나 심심할까, 타쿠야가 곤히 잠든 위안을 보며 중얼거렸다.
집 열쇠를 하나 더 만들어 위안에게 줄까 생각해보았지만 위안은 아직 어리숙한 토끼(겸 사람)였다. 밖에서 어떤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어쩐지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타쿠야가 미소를 지었다.
*
어느 날 저녁, 타쿠야가 차려준 맛있는 저녁을 먹은 위안은 기분이 최고조였다. 설거지를 마친 타쿠야는 피곤하니 일찍 잘 거라며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위안은 배를 기분 좋게 문지르며 방으로 들어와(원룸이라 부엌에서 한걸음만 가면 방이다) 이불 위로 올라갔다. 그때 바닥에 굴러다니는 두툼한 종이 한 뭉치가 위안의 눈에 들어왔다. 이런 질 좋고 두툼한 종이를 무시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예술혼을 저버리는 것이라 생각한 위안이 테이블 위에 있던 타쿠야의 검은 펜을 집어 들었다. 두툼한 종이 한 뭉치에는 작은 글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문화...콘턴...츠?쯔?에 대한...에이, 모르겠다.”
모르는 글자가 나오자 바로 읽기를 포기한 위안이 펜 뚜껑을 열고 글자에 있는 ㅁ 과 ㅇ을 죄다 메꾸어 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뒷장으로 넘겨 본격적으로 신나게 낙서를 시작했다.
곧이어 타쿠야가 말끔하게 씻고 나왔을 때, 위안은 이미 잠이 들어있었다. 위안을 깨워서 씻겨야 하나, 타쿠야가 잠시 고민했다. 평소에도 위안은 잠이 많은 편이기에 지금 깨운다고 해서 정신을 차리고 씻으러 갈 것 같지는 않았다. 낙서를 하느라 이불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위안이었기에 타쿠야는 위안을 살짝 깨워서 편하게 자라고 얘기할 심산이었다.
“위안형, 잠깐 일어나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위안을 깨우던 타쿠야의 손이 멈칫했다. 타쿠야의 시력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위안의 얼굴 아래 깔려있는 저 두툼한 종이 뭉치는 타쿠야의 리포트였다. 그것도 당장 내일까지 내야 하는. 심지어 교수님도 깐깐했다. 순간 타쿠야의 머릿속에 새하얘졌다. 한 손으로 조심스레 위안의 얼굴을 받쳐 들고는 남은 한 손으로 조심스레 종이 뭉치를 꺼내들었다. 제발, 제발. 타쿠야가 중얼거렸다. 제발.
“아.....”
짧은 탄성 뒤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20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는 장수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고 공평한 위안은 어느 한 페이지 빼놓지 않고 모든 페이지에 낙서를 남겨놓았다. 타쿠야가 급히 시간을 확인하였다.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타쿠야는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다급하게 집을 나서는 타쿠야와 다르게 곤히 잠이 든 위안은 무슨 꿈을 꾸는지 잠꼬대까지 해가며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쇄가 되는 피씨방을 찾아다닌 끝에 타쿠야는 새로 인쇄한 리포트를 손에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11시가 넘어 타쿠야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타쿠야의 시선이 위안에게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는 토끼가 너무나도 얄미웠다. 성큼성큼, 자고 있는 위안에게로 다가간 타쿠야가 위안의 양쪽 볼을 꼬집었다. 분명 있는 힘껏 꼬집으려고 했는데 꼬집으려는 순간 타쿠야는 저도 모르게 위안의 볼을 잡은 손에 힘을 빼버렸다.
“그래, 자고 있는 사람 괴롭혀서 뭐해.”
타쿠야는 엎드려서 자고 있는 위안의 자세를 바르게 바꿔주고 위안이 잔뜩 낙서 해놓은 제 리포트를 집어 들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면서 위안이 해놓은 낙서를 구경하는 게 꽤나 재미있는지 타쿠야의 입꼬리가 스믈스믈 올라갔다.
위안이 해놓은 낙서는 대부분 그림이었다. 토끼, 해, 달, 별, 집, 나무 등등. 나름 갖출 것은 다 갖춘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았다. 다음 쪽으로 페이지를 넘긴 타쿠야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종이 한가운데 쓰여 있는 위안의 글씨는 꼬물꼬물 꼭 초등학생이 쓴 것만 같았다.
나느 토기입니다
장이안
타구야
건사가 조타
타쿠야가 위안이 써놓은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위안이 써놓은 문장에서 토끼는 '토기'가, 타쿠야는 '타구야'가 되어있었다. 심지어 제 이름인 장위안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모습에 타쿠야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말은 꽤나 하는 것 같은데, 유난히 ‘쓰기’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정식으로 한글을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뭐 어쨌든, 한국에 온지 2년이 막 넘어가는 타쿠야의 눈에 위안은 그저 귀여웠다.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는 꼴이었다.
“이게 뭐야?”
학교 갈 준비로 분주한 이른 아침, 타쿠야가 위안에게 책 한권을 건넸다. 위안은 졸린 눈을 비비며 책을 받아 들었다. 나갈 채비를 마친 타쿠야가 양말을 신으며 말했다.
“선물이에요.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어보세요.”
“우리 아이 한글 공부?”
“네, 형 거예요. 형이 한글 공부할 책.”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어리숙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위안에게 타쿠야가 다가가 손수 책 표지를 넘겨주었다. 자음과 모음을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과, 풍선과 같이 간단한 단어까지 한글 쓰기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아용 책이었다. 타쿠야가 제게 준 책이 유아용 한글 교재라는 것을 깨달은 위안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애기들 쓰는 거자나.”
“형 한글 쓰는 실력이 애기던데요?”
위안이 뽀로퉁한 표정으로 책을 뒤적거리는 모습을 본 타쿠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타쿠야와는 꽤나 나이차이가 나기 때문에 언제나 그보다 어른이라고 자신해왔던 위안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잔뜩 불만을 품은 위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쿠야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타쿠야 너도 여기 한국사람 아니잖아.”
“.....”
타쿠야는 순간 웃음을 잃었다. 위안은 생각보다 예리했다.
".....그렇죠, 저는 일본 사람이죠."
“너는 한글 잘 써?”
타쿠야를 추궁하는 듯한 위안의 눈빛이 정적 속에서 번뜩였다. 타쿠야의 머릿속에서 얼마 전 어학당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타쿠야가 다니는 어학당에서는 한 달에 한번 받아쓰기 시험을 봤다. 타쿠야의 어학당 짝꿍 다니엘은 늘 최저점을 맞으며 시험마다 신기록을 달성하는 걸로 유명했다.(점수가 어디까지 낮아질 수 있을까를 증명하는 중) 그리고 저번 달, 타쿠야는 다니엘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다니엘이 타쿠야를 보며 비웃었다. 이정도면 타쿠야의 받아쓰기 실력에 대해 할 말 다한 것이다.
위안의 물음에 타쿠야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형 보다는 잘 써요.”
“칫.”
약간의 양심이 쿡쿡 찔려오긴 했지만 위안보다 잘 쓰는 건 사실일 것이라고, 타쿠야는 자신을 애써 위로 했다.
“아참, 그리고. 내 이름 이렇게 쓰는 거예요.”
타쿠야가 펜을 하나 꺼내 위안이 펼쳐놓은 페이지 빈곳에 제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타쿠야의 펜 끝으로 위안의 시선이 향했다.
“타...쿠...야. 이렇게 쓰는 거예요. 형은 타구야라고 쓰잖아요.”
“칫, 잘난 척.”
위안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타쿠야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위안도 이제야 한글 교재에 조금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건지, 여기저기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열심히 해요!”
며칠 뒤, 타쿠야가 알바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 와보니 위안이 토끼인 상태로 잠이 들어있었다. 근처에 펼쳐져있는 한글 교재와 앞발에 연필이 쥐어져있는 것을 보아하니 위안은 한글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타쿠야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위안의 모습에 기특함을 느꼈다. 위안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위안에게 다가가 앞발에 쥐어져있는 연필을 조심스레 빼냈다. 그리고는 위안의 옆에 펼쳐져 있던 한글 교재를 집어 들었다.
타쿠야
타쿠야
타쿠야
타쿠야
한글교재를 주었던 날에 타쿠야가 써놓은 ‘타쿠야’ 밑으로 위안이 연습한 흔적들이 보였다. 타쿠야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연필을 쥔 타쿠야가 위안이 연습해 놓은 곳 옆에 ‘참 잘했어요!’를 써 넣고 이어 페이지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다음 장은 ‘좋아한다’라는 표현을 연습하는 페이지였다.
나는 ~을(/를) 좋아한다.
‘좋아한다’를 쓰는 방법 밑으로 직접 예시를 들어보는 칸이 있었다. 천천히 페이지를 훑던 타쿠야의 눈이 어느 한곳에서 멈췄다.
나는 이불을 좋아한다.
나는 건사과를 좋아한다.
나는 타쿠야네 집을 좋아한다.
나는 타쿠야네 집을 좋아한다. 타쿠야가 이 문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위안이 매일 끼고 사는 이불과 위안이 애지중지하는 건사과와 자신의 집이 같은 수준이라는 것에 타쿠야는 감동했다.
“기왕이면 타쿠야네 집이 아니라 ‘타쿠야’라고 해주지.”
어쩐지 위안에게 주인으로서 인정을 받은 것 같아 타쿠야는 기분이 좋아졌다. 실실 웃으며 타쿠야가 잠든 토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위안이 공부를 하느라 지쳤을 테니, 저녁밥으로 맛있는 것을 해줘야겠다고 타쿠야가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 생각했다. 토끼를 키우면서, 그러니까 위안을 만난 뒤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인 것 같다고.
"어어, 왔어?"
사실 타쿠야가 오기를 기다렸으면서 안 기다린척 하는 츤데레
안녕하세요!
토끼는 사랑이죠입니다.
필명 정할 때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보니까 좀 기네요 허허
5화가 너무 늦어서져서 죄송합니다ㅠㅠ
사실 고3이라 수능끝나고 대학 발표까지 난 후에 가벼운 마음으로 연재하고 싶었습니다ㅎㅎ
이제 자주 오겠어요 약속해요!!
많이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