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은 합격 여부가 나오는 날이다. 잠에서 깨 눈을 뜨자마자 밥을 먹을 때도, 티비를 볼 때도 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합격 생각 뿐이었다. 제발, 제발. 여부를 알려주는 시각인 1시가 되고, 간절한 마음으로 회사 홈페이지를 들어갔다. 손이 떨려 클릭도 제대로 못하고 눌러, 말어로 갈등을 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정적 속 갑자기 울린 소리에 놀란 나는 동시에 여부 확인을 클릭했다.
- 여보세요, 딸?
"......"
- 딸, 밥 먹었어? 요즘 통 전화를 안 해서 우리 딸 잘 살고있는지도 모르겠네.
"...붙었다."
- 응? 뭐라고?
OOO : 합격.
"엄마, 나, 나 붙었어. 회사 면접 통과했어!"
- 정말이야? 어머 어쩜 좋아, 딸 축하해!
"흐, 아, 나 어떡해. 엄마 나 붙었어."
그 뒤로 휴대폰만 붙잡고 회사에 붙었다며 펑펑 운 기억이 마음 속에 새겨졌다.
구남친 히스테리
ep. 2, 오랜만, 팀장님
심장이 폭팔할 것처럼 마구 뛰었다. 내가 직장에 다닌다니, 내가 사원이라니!
면접 전용 정장은 옷장에 걸어두고 취직 성공 기념으로 엄마가 새로 사준 정장을 입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는 여기에 사원증도 딱. 괜스레 웃음이 나다가도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에 의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왔다.
곧 질릴 게 뻔하겠지만 숨막히는 지하철 안에서도 싱글벙글 웃었다. 남들이 보면 미쳤냐고 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치이는 순간에도 첫 출근이라는 게, 참 설렜다. 그리고 면접 이후로 처음 온 내(가 다닐) 회사. 오늘따라 삐까뻔쩍해보인다. 그러다가도 잠시 잊혀졌던 박찬열 생각이 났다. ...괜찮을 거야. 이 넓은 곳에서 설마.
"으아... 떨려."
찝찝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에,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내 옆에서 잔잔하게 울렸다.
"어? 저번 때 그 물 주신...?"
"...아. 안녕하세요."
"면접 붙으셨나봐요. 우와 대박! 역시 제 촉이 맞았네요."
"그러게요. 그쪽도 붙으셨나봐요."
"네! 늦기 전에 들어갈까요?"
하얀 셔츠에 검정색 정장의 깔끔한 복장을 하고 나타난 저번의 그 귀염상의 남자다. 에스코트하듯이 가시죠, 라며 앞장서듯 이끄는 게 부담스러우면서도 편했다.
입구를 통과하면서 어색함과는 거리가 먼지 묻지도 않는 자기 소개를 하며 제 이름까지 물어왔다.
"변백현이에요. 나이는 스물여덟. 어차피 다신 안 마주치진 않을 것 같은데 이름 알려주실 수 있어요?"
"그럼요! OOO이에요. 백현 씨랑 동갑이구요."
"오오. 동기에 동갑!"
이라며 하이파이브를 권유하는데, 꽤 재밌는 사람인 것 같아 있는 힘껏 쳤더니 힘 좀 쓰시냐며 강아지처럼 끙끙댔다. 허얼. 얼척없는 표정을 짓자 농담이라며 내 팔을 잡고 놓칠세라,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신입 사원 설명회를 끝마치고 부서 조직 설명을 들었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 부서를 말해주는데 내 차례는 언제 올련지, 심장이 마구 뛰었다. 옆에 있던 백현 씨도 꽤나 떨렸는지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계속 꼼지락 거리는 듯 했다.
"변백현 씨, 그리고 OOO 씨. 경영기획 부서입니다."
헐, 가고 싶던 부서다. 백현 씨와 내 이름이 동시에 불리며 부서 발령이 결정됐다. 같이 합격된 것도 신기한데 같은 부서라니. 서로 또 한 번 작게 하이파이브를 했더니 주변에서 눈초리를 줬다. 신나는 건 둘째 치고, 일단 가만히 앉아 내적 기쁨을 느꼈다. 정말 직딩이 된 거구나, 나. 마지막 이름이 호명될 때까지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
부서 호명이 끝나고 각 부서의 상사가 사원들에게 소개를 해주며 부서로 데려갔다. 나도 백현 씨도 역시 상사 선배님이 직접 오셔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후배 사랑이 넘치는 선배처럼 웃으며 부서 소개와 너무 많이 떨지는 말라며 농담도 던지셨다.
"아, 내 소개를 안 했네. 김종대, 30살 어린 대리라고 무시하면 큰일나는 거 알지?"
"아닙니다 대리님!"
옆에 있던 백현 씨가 경례라도 하듯 단단히 언 목소리로 말하자 참 마음에 든다며 얘기하다보니 벌써 부서 앞이다. 힐끔 몰래 어떤지 구경하려던 차에 김 대리님이 자자 주목! 이라며 이목을 집중시킨 바람에 나 역시 단단히 얼어버렸다. 수많은 남녀 직원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저희 부서에 신입 병아리들이 두 분이나 온다는,"
"됐고 자기 소개나 합시다!"
"...너무해...... 자 백현 씨 먼저 할까요?"
새롭고 떨리고. 뭘 어떻게 말해야 하나 걱정된 와중에 백현 씨가 목을 큼큼 거리며 제 소개를 한다. 아... 나는 어떡하지. 주체할 수 없게 떨리는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박수로 끝난 백현 씨의 소개, 그리고 내 차례였다. 옆에 있던 김 대리님이 상큼한 여 사원이라며 부담을 두 배로 불려주시는 바람에 웃음 마저 억지로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숨을 크게 쉬고 마음을 굳게 먹고 한 번 하자! 하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저 앞의 팀장실의 문이 열렸다.
"어, 팀장님 나오셨네요! 이따 면담할 때 나오신다더니."
"네, 그렇게 됐...네요."
옷깃을 툭툭 털며 나오는 팀장이란 사람이 나왔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아, 말도 안 돼...
"...이 두 사람이 정말 경영 부서 발령된 거 맞습니까?"
"네 팀장님. 혹시 뭐 문제 있나요...?"
"......아닙니다."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했는데.
"아, 두 사람 이리로 와 봐."
"......"
"우리 부서 팀장님이신 박찬열 팀장님. 인사하세요."
***
면담 내내 박 팀장, 그러니까 박찬열을 마주하는 건 생각 외로 고역이었다.
정확한 부서 소개와 하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소개해주며 간간이 눈을 마주칠 때마다 기분은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더러웠다. 박찬열과 나랑은 더 이상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게 3년 전이었다. 찌질하게 헤어진 구남친이 현재의 팀장이라니.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어지러워졌다. 끝내 면담을 마치고 팀장실을 나왔다. 정말, 잘 먹고 잘 살고 있었구나.
제 자리로 배치된 곳으로 가 앉았다. 파일들을 플라스틱 간이 책꽂이에 꽂고 서랍에 볼펜들과 필요할 만한 물건들을 넣어 정리했다. 분명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정장 차림의 박 팀장이 생각나 한껏 기분이 다운되었다. 앞으로 매일 마주칠 텐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착잡해졌다.
"O 사원."
"네?
옆 자리인 김 대리님이 웃으며 저를 불렀다. 딴 생각을 하다 불리는 호칭에 황급히 대답하니 김 대리님이 활짝 웃으며 말한다.
"신입 사원이 커피 한 잔씩 돌릴래?"
퇴근하기 30분 전.
팀장실에서 나온 박찬열이 신입 사원 환영회가 있다며 끝나고 알아서 분배해서 차 타고 환영회 장소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직 어색하다고 느끼고 있던 와중에 이번엔 환영회라니. 인터넷에 쳐보니 환영회는... 정말 어마무시했다. 좋게 말하면 환영회지, 술만 진탕 멕이는 신입 사원 재롱 잔치인 줄 알았다. 한숨을 푹 쉬니 옆에서 김 대리님이 말을 걸어왔다.
"OOO 씨 차는 있어요?"
"아니요, 없는데..."
"그럼 나랑 백현 씨랑 OO 씨랑 팀장님 차 타고 가면 되겠다."
"네?!"
"항상 차 타려고 분배하면 팀장님이랑 나랑 탔거든. 뒤에 두 자리 채우면 딱이네."
"아, 저기, 따로 가면 안 될,..."
"팀장님이 저렇게 까칠하고 차가워 보이셔도 좋으신 분이야. 걱정 말고 이거 복사 부탁해!"
복사할 종이 뭉치를 들고 프린터 기 앞으로 갔다. 면담할 때도 숨 막혀 죽겠는데 이젠 차까지 같이 타고 가야하는구나. 수정이에게 들려줄 후기 이야깃거리들이 많아졌다.
후우. 프린터 기에서 종이들이 쉴 새 없이 나왔다.
*
오는 내내 뒷자리에서 박찬열이 운전하는 모습이 어색하게만 보였다. 운전 면허 따고 싶다고 징징 대던 때도 있었는데... 라며 회상하기도 했지만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가 싶어서 창밖으로 시선을 고쳤다. 물론 옆에 있던 백현 씨도 어색하기 마찬가진지 나와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답답한 속 때문에 문을 열까 고민했지만 환영회 장소로 금방 도착한 덕에 차가 멈추자마자 급히 내렸다.
"좀 늦었네요 팀장님~"
"팀장님 이리로 오세요! 팀장님 자리 벌써 마련해 뒀어요~"
룸 형식인 회식 장소로 들어가자마자 들은 소리였다. 입술은 새빨갛게 칠해진 여직원 여럿이 박찬열을 채근했다. 저것들은 눈이 없나? 삐뚤어진 시선으로 박찬열과 최대한 멀리 앉기 위해 레이더망으로 빙의하여 자릴 찾았다. 어차피 조용히만 있다 갈 거니까...
"OO 씨! 이리로 이리로!"
"...아... 네."
아무것도 모르는 백현 씨가 눈만 돌리면 박찬열이 보일 자리에 앉아 나를 불렀다. 박찬열의 시선이 느껴졌다. 안 갈 수도 없고, 가기는 너무 싫고. 모래 주머니 같은 게 발에 묶여있는 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백현 씨의 옆에 앉았다. 왜 혼자 저 먼 곳을 앉으려 해요. 신입끼리 붙어먹어야 살죠. 백현의 말에 그렇죠, 라며 대충 대꾸하니 앞에 마주 앉은 직원 분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셨다.
"오, 자네들이 신입인가?"
"아, 넵. 변백현입니다."
"OOO입니다."
악수를 권하는 손짓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악수를 한 후에 술잔을 받았다. 아직 안주 한 입도 못 먹었는데... 벌써부터 이러니, 막판엔 얼마나 처마신 상태로 있을까.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백현 씨는 이미 원샷 드링킹을 마친 상태였다. 나도 뒤늦게 꿀꺽 삼켰다. 쓰다, 써.
"박 팀장도 한 잔 받지."
"네. 부장님도 받으세요."
박찬열이 부장님에게 술을 따르는 모습이 눈 앞에 펼쳐졌다.
...박찬열이 술을 잘 마셨던가?
"엄마, 나 회식 중이야. 전화 오래 못 해."
- 알겠어.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조심히 집 들어가.
꽤 잘 마시는 나도 안주도 별로 없이 이리저리 김 대리님을 따라 술잔을 받다보니 살짝 취기가 올랐다. 와중에 엄마에게 전화가 와 잠깐 빠져나온 게 꼭 천국이다. 내일 아침 엄청 속 쓰리겠네... 집 주변에 24시 마트 하는 곳이 어디지. 해장국이라도 끓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들어가려고 뒤를 돌았는데,
"......"
"......"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던 박찬열을 봤다. 서로 있는지 몰랐는지 깜짝 놀라보였고 나 역시 놀랐다.
"......먼저 들어가."
"......"
"쌀쌀하다.
그러면서 나를 지나쳤다. 여전히 말투는 차가웠지만 아까 듣던 존댓말이 아닌 반말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야, 박찬열.
*
복잡한 마음으로 다시 환영회 장소로 들어가니 갑자기 분위기가 업이 되어있었다.
백현 씨는 소주 병에 숟가락을 꽂아 마이크 형태로 만든 후에 트로트를 열창하고 있었으며 그 외의 다른 직원들은 옆에서 박수를 치거나 움직임이 적은 춤을 추고 있었다. 아, 제발, 나는 걸리지 않길. 조심조심 자리에 앉으려고 하니 아까 내 자리의 맞은편에서 술을 따라준 부장님이 나를 가리켰다.
"아, 여기도 신입이지? 얼른 저 옆에 안 끼고 뭐 하나?"
"아, 저기..."
당황스러운 게 티가 날 정도로 나는 얼어버렸고 소주 마이크를 들고 있던 백현 씨는 그냥 얼른 나오라며 손짓했다. 남 몰래 한숨을 푹 쉬며 옆에서서 박수를 치니 다시 분위기는 좋아졌다. 간드러지는 백현 씨의 노랫소리가 애절했다.
"어이. 거기 O 사원이라고 했나?"
"네? 네!"
"춤 좀 춰 봐~ 재밌게 분위기 좀 띄어보라고!"
"예? 제가 어떻게..."
"생긴 게 딱 섹~시하게 생겼는데, 살랑살랑 춤 좀 춰 보라고. 하하."
한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미 만취한 부장님이 발언은 나름 강심장인 내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이런 수준의 말은 처음 들어봐서 놀랐고, 그런 발언을 저 늙은 부장에게 들은 것도 속상했다. 부장님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애써 웃으며 허허 웃었다. 진짜...
"제 부서 사원입니다."
"......뭐?"
"그런 말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들어온 건지 박찬열이 굳은 표정으로 부장님의 옆에 섰다. 아래로 내려다 보는 폼이 내가 다 무서울 정도로 어두웠다. 저러다 정말 한 대 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박찬열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마 울상이었던 것 같다.
"......부장님 한 잔 받으세요."
"...그러지. 허허."
그러다 자리에 착석해 웃으며 용서라도 구하는 듯 부장님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잔뜩 취한 부장님은 금새 허허 웃으며 박찬열의 잔에도 넘칠 정도로 술을 따랐다.
그리고, 박찬열은 술을 못 마셨다.
***
=3=3=3
잼잼♡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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